에스프레소 한 잔의 열정이 세운 ‘커피제국’ [더비저너리 하워드 슐츠]
“행복한 직원이 열정 가진다”…통 큰 복지혜택
인종·성소수자 등 사회 이슈에 ‘큰 목소리’
[헤럴드경제=원호연 기자]“해답은 데이터가 아니라 매장에 있다. 고객 경험에 집중해야 한다. 이사회 멤버를 포함한 경영진은 녹색 앞치마를 입은 직원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
하워드 슐츠 스타벅스 명예회장이 지난 5월 6일 링크드인에 올린 글이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그는 글로벌 커피 체인 스타벅스의 1분기 실적이 2020년 이후 처음으로 역성장을 기록하자 ‘고객이 스타벅스에서 만나는 순간이 모두 최고의 경험’이라는 스타벅스의 기본 정신을 경영진들에게 상기시켰다.
맥킨지 출신의 랙스맨 나라심한 현 CEO가 취임한 후 1년 동안, 스타벅스는 '커피 제국'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스타벅스는 지난해 초부터 10월까지 미국 내 직영 매장을 380곳 늘렸음에도 불구하고 직원 수는 2만 9000명이나 줄였다. 직원 수가 줄자 주문한 커피를 받는 데 30분이 걸리는 일이 잦아졌다. 고객 채근에 시달리는 직원들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이를 예견이라도 한 듯 슐츠는 “바리스타가 애정을 쏟지 않고 질 낮은 에스프레소를 만들어낸다면, 그것은 영감을 주는 커피의 본질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커피에 대한 열정은 그가 스타벅스 매장을 11개에서 77개국, 2만 8000여 개로 확장해 온 비결이다.
▶에스프레소 한잔이 바꾼 인생=1953년 7월, 슐츠는 뉴욕 브루클린의 가난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일찍 부친을 여읜 슐츠의 아버지는 학교를 그만두고 10대부터 생업에 뛰어들었다. 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사이판에서 위생병으로 복무했는데 그곳에서 걸린 황열병과 말라리아 후유증으로 항상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전역 후 트럭 운전사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슐츠가 세 살 때 그의 가족은 할머니의 아파트에서 정부 보조 공동주택단지인 베이뷰로 이사했는데 가끔 외식을 가면 주머니 속 돈에 맞춰 메뉴를 골라야 할 정도로 넉넉치 않았다. 슐츠 역시 어릴 때부터 신문 배달과 간이식당에서 일하며 가족의 생계를 도와야 했다.
“한 소녀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을 때 그녀의 아버지가 내가 베이뷰에 산다는 말을 듣고 표정이 어떻게 일그러지는지 똑똑히 보았다”고 그는 기억했다.
그런 슐츠가 좌절하지 않도록 성공에 대한 영감을 준 것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아들에게 들려주며 꿈꾸면 이룰 수 있다고 했다. 슐츠는 “잠깐 접수원으로 일한 경험 밖에 없는 가정 주부였던 어머니가 그런 통찰력을 어디서 얻었는지 믿기 어렵다”고 회고했다.
대학 진학을 위해 슐츠는 미식축구 선수의 길을 선택했다. 선수생활을 하면 노던 미시간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졸업 후 그는 뉴욕으로 돌아와 제록스에서 영업사원으로 경력을 시작했고 영업 수완을 인정받아 그 지역에서 가장 많은 인센티브를 받기도 했다. 인테리어 디자인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었던 아내 셰리를 만난 것도 이 즈음이다.
1979년 그는 스웨덴 가정용품 회사 ‘해마플라스트’에서 부사장 겸 총 매니저로 승진하며 성공의 사다리에 올라탔다. 제록스에서 습득한 마케팅 능력을 십분 발휘한 덕이었다.
2년 뒤 슐츠는 시애틀의 스타벅스가 해마플라스트에서 커피 추출기를 대량 주문하는 것을 보고 호기심이 생겼다. 스타벅스의 이름을 처음 들었지만 구식 수동 드립 커피 추출기를 사용하는 이유를 알고 싶어 바로 시애틀로 향했다.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에 위치한 스타벅스 본점에는 수마트라, 케냐, 에티오피아, 코스타리카 등 세계 각국의 커피 원두가 넘쳐났다. 스타벅스의 창립자 중 한 명인 제리 볼드윈이 내린 커피의 향과 부드러운 맛은 슐츠에게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어줬다. 그는 마치 “새로운 대륙을 발견한 듯한 기분을 느꼈다”고 말했다.
스타벅스는 제리 볼드윈, 고든 보우커, 지브 시글이 1971년 시애틀에서 설립했다. 샌프란시스코 대학에서 룸메이트였던 이들이 버클리의 ‘피츠 커피 앤 티’에서 판매되는 커피 원두에 매료돼 만든 커피 스토어였다. 가게 이름은 ‘모비딕’ 소설 속 커피 애호가인 스타벅 일등항해사에서, 로고는 신화 속 인어 ‘사이렌’에서 영감을 받았다.
슐츠는 커피에 미친 창업자들의 열정에 푹 빠졌다. 그는 자신의 영업 기술을 이용해 스타벅스를 글로벌 브랜드로 만들겠다는 꿈을 안고 스타벅스로 이직했다. 셰리는 갑자기 뉴욕에서 시애틀로 이사를 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도 기꺼이 따랐다. 슐츠는 “끊임없는 아내의 격려는 나에게 생명과 같은 것이었다”고 말한다.
합류 1년 만에 슐츠는 고급 커피 추출기를 확보하기 위해 이탈리아 밀라노의 전시회에 참가했다. 그곳에서 맛본 에스프레소는 미국의 드립 커피와는 또 다른 커피의 세계를 제시했다. 그는 커피 바에서 에스프레소를 즐기며 대화하는 이탈리아인들의 모습에서 미국에는 없는 카페 문화를 발견했다.
당시 스타벅스는 원두만 판매하는 소매점이었고, 커피는 시음용으로 제공되었을 뿐이었다. 슐츠는 밀라노의 카페 문화를 미국으로 가져올 수 있다면, 사업적으로도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슐츠는 “이건 마치 신의 계시와 같아”라고 속으로 외쳤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스타벅스는 고급 커피를 판매하고 있었지만, 수세기에 걸쳐 이어져 온 커피의 정신에서 멀어져 있었다”고 당시의 자신이 받은 충격을 묘사했다.
시애틀로 돌아온 슐츠는 스타벅스에서 커피 음료를 직접 팔자고 제안했고 창립자들의 반대에도 1984년 스타벅스에서 에스프레소 바를 시험적으로 개시했다. 기대대로 시범 운영은 큰 성공을 이루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탈리아 카페 문화에 흥미를 느꼈지만 볼드윈과 보우커는 6개월 후 시범 운영을 종료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실망한 슐츠는 1985년 스타벅스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꿈을 꾸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가 되면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 익숙한 것을 떠날 용기가 필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커피는 경험이다”=그해, 그는 시애틀에 ‘일 지오날레(Il Giornale)’이라는 카페를 열었다. 이탈리아어로 ‘매일’이란 뜻이다. 미국인들에게 이탈리아 커피 바의 경험을 그대로 전하기 위해 메뉴는 이탈리아어로 적었고, 오페라 음악을 틀었으며 직원들에겐 나비 넥타이를 매게 했다. 커피 전문가인 데이브 올슨을 고용해 직원들에게 커피 교육을 실시하고 질 좋은 카페라떼와 카푸치노를 내리게 했다.
이 카페는 개장하자마자 매일 1000명의 방문객이 찾는 시애틀의 명소로 떠올랐다. 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시애틀에 두 번째 매장과 캐나다 밴쿠버에 세 번째 매장을 열었다. 세 매장 모두에서 커피의 질과 맛, 향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 1987년 슐츠에게 기회가 온다. 스타벅스 창업자들이 시애틀의 스타벅스 매장을 팔려고 하자 바로 투자자들을 모아 손에 넣었다. 380만달러의 투자금을 유치해 스타벅스의 여섯 개 매장, 공장, 그리고 브랜드 권리를 포함한 인수했다. 자신의 카페 ‘일 지오날레’도 스타벅스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커피 제국의 씨를 뿌린 순간이었다.
슐츠는 미국 전역에 고급 커피와 카페 문화를 전파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5년 내에 125개의 매장을 개설하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스타벅스는 우편 주문 서비스를 통해 전국적으로 원두를 배송했고 이를 통해 매장이 생길 때마다 가장 충성도 높은 고객층을 확보했다.
매장이 빠르게 늘어나는 가운데, 슐츠는 양적 성장이 품질을 해치면 안된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는 품질이 떨어진 커피를 마신 고객이 스타벅스를 다시 찾지는 않을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시애틀의 커피 공장에서 로스팅된 원두는 신선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특수 포장해 배송되고, 모든 매장은 직영점으로 운영했다. 어느 매장이든 동일한 커피 경험을 제공하기 위함이다. 커피의 향을 보존하기 위해 샌드위치 메뉴를 판매하지 않는 것 역시 이러한 품질 관리의 대표적인 예다.
▶열정을 가진 직원이 고객을 만든다=스타벅스는 다른 기업들과 달리 초기부터 파트타임 직원을 포함한 모든 직원에게 의료보험 혜택을 제공했다. 물론 투자자들은 사업이 자리잡기도 전에 막대한 비용이 드는 의료보험 혜택을 직원들에게 주는 것에 반대했지만 슐츠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이러한 결정은 다니던 직장으로부터 의료보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고생하다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 대한 슐츠의 슬픔에서 비롯됐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스타벅스를 인수한지 1년만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되면 아버지 같은 약자를 보호하겠다”는 게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한 그의 다짐이었다.
1991년에는 세계 최초로 모든 일반 종업원에게 스톡옵션을 제공했다. ‘콩줄기(Bean Stalk)’와 비슷한 발음인 ‘빈스톡(Bean stock)’이라고 이름 지은 것은 직원과 함께 성장하겠다는 그의 의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정신은 스타벅스 직원들을 ‘파트너’라 부르는 데에도 반영돼 있다.
대학 진학 시 4년 간의 장학금 지원, 바리스타 및 관리자 교육을 대학 학점으로 인정하는 ‘스타벅스U’ 프로그램 운영 등 직원의 성장과 발전을 위한 지원도 아끼지 않고 있다.
1998년 포춘지는 이러한 노력을 인정해 스타벅스를 ‘100대 최고의 직장’으로 선정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슐츠를 백악관에 초대하여 스타벅스를 기업 윤리의 모범 사례로 치하한 바 있다.
스타벅스의 복지 혜택은 단순한 시혜적 조치로 제공된 게 아니다. 직원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면 장기적으로 기업의 성장에 기여할 것이라는 전략적 결정이었다.
스타벅스 직원들은 고객과 개인적으로 유대감을 갖고 취향에 맞는 메뉴를 추천하는 등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직원들이 자주 바뀔 경우 고객과의 관계가 손상될 수 밖에 없다.
다른 회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혜택을 주면 직원들이 스타벅스를 쉽게 떠나지 않을 것이란 게 슐츠의 생각이었다. 실제로 스타벅스의 이직률은 바리스타의 경우 60~65%, 매니저의 경우 25%로, 다른 소매점이나 패스트푸드 체인의 이직률인 150~400%에 비해 월등히 낮다.
직원들은 자신의 미래를 투자하는 회사에 애정을 갖고 회사 발전을 위한 아이디어를 제공하기도 한다. 캘리포니아 지역 매장 직원의 제안으로 1996년에 출시된 후 여름철 대표 메뉴로 자리매김한 프라푸치노가 대표적인 예다. 처음에 슐츠를 포함한 경영진은 얼음과 커피 가루로 만든 프라푸치노가 커피 맛을 손상시킨다고 반대했지만 직원들은 재료와 얼음을 갈아내는 방식을 개선하여 맛을 향상시켰고 프라푸치노는 대표적인 여름 음료로 자리잡았다.
반면 직원들의 사기와 열정을 중시하는 슐츠가 스타벅스 초기부터 노조 결성에 반대한 것은 모순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지난 2022년에는 스타벅스 내 노조 설립을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되자 슐츠는 노조 결성 투표에 참여한 50여 곳을 제외한 나머지 매장에만 5% 임금 인상을 약속하며 노조 결성을 저지했다. 민주당 내 진보파인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이 소식에 격분해 그를 상원 청문회에 소환했고 결과적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런 비판에 대해 그는 “직원들이 나와 내 행동의 동기에 대해 믿음이 있다면 그들은 노조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항변했다. 경영진과 직원 간 신뢰가 있다면 그 사이에 노조가 필요 없다는 얘기다.
▶“준비 없이는 성장도 없다”=스타벅스 인수 초기부터 슐츠는 빠른 성장을 추구했지만 “100층 건물을 세우려면 그만큼 튼튼한 기초가 필요하다”며 질적 내실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점포 수 증가에 따른 원두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로스팅 시설을 지속적으로 확장하고, 25년간 소매 업계 경험이 있는 하워드 비하와 재무 전문가 오린 스미스를 영입한 것은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한 기반을 다지기 위한 것이었다.
1992년에 스타벅스는 뉴욕 나스닥에 상장되어 자금을 모집했고, 여기서 모은 자금을 통해 1990년대 중반에 연간 40~60%라는 놀라운 매출 성장률을 기록했다. 당시 포춘지는 스타벅스의 성장세를 “커피를 갈아 금으로 만든다”고 묘사했다.
2000년에 슐츠가 CEO 자리를 스미스에게 넘기고 글로벌 사업에 집중한 이후에도, 스타벅스의 성장세는 지속되었는데, 이는 슐츠가 성장 기반을 잘 다져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2005년 짐 도널드가 북미 지역 총괄 사장에서 CEO로 승진하면서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도널드의 공격적 경영 전략 덕분에 2007년에는 매장 수가 1만6000개를 넘어섰지만 금세 급성장의 부작용이 나타났다.
당시 던킨, 맥도날드 등 다른 프랜차이즈 업체들이 공격적으로 커피 시장에 진출했다. 컨슈머리포트의 블라인드 테스트에서 많은 평가자들이 맥도날드 커피를 스타벅스보다 우수하다고 평가했고 이 소식에 스타벅스의 주가는 42%나 급락했다.
스타벅스 커피의 질이 떨어진 것은 각 매장들이 전년 대비 매출 증대 압박을 받으며 인형과 같이 커피와 관련 없는 제품 판매에 집중했기 때문으로 분석됐다.
당시 슐츠는 “성장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우리는 회사의 핵심 가치를 잃어버리고 있었고, 경영진의 결정, 매장 운영, 그리고 고객 경험에서 스타벅스만의 독특함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2008년 1월, 슐츠는 위기 극복을 주도하기 위해 CEO로 복귀했다. 그는 복귀 1개월 여 만에 스타벅스가 미국 전역의 매장을 하루 동안 닫고 모든 직원들에게 커피와 서비스 교육을 실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 결정으로 당시 70억원에 달했던 하루 매출을 통째로 날려버렸지만, 슐츠는 커피의 맛과 정성, 그리고 고객과의 소통이 더 중요하다고 봤다.
슐츠는 직원 사기 진작을 위해 복귀 후 한 달 동안 직원들이 보낸 5600통의 이메일에 직접 답했다. 커피 품질 향상을 위해 스타벅스는 최상급 커피 메이커 제조사인 클로버를 인수하고, 당시 인기를 끌던 블루보틀처럼 고객이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고급 원두와 추출 방법을 제공하는 리저브 매장을 선보였다.
이런 노력 끝에 2010년 스타벅스는 110억 달러의 매출을 달성하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다음 해 슐츠는 포춘지가 선정한 올해의 기업인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공동체는 스타벅스의 힘=1990년 사명선언문에서 슐츠는 “우리는 활동하는 공동체에서 경제적, 지적, 사회적 자산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스타벅스의 활동이 영리 추구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가치의 실현으로 확장된다는 선언이었다.
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스타벅스는 1998년 전 NBA 선수 매직 존슨과 협력하여 ‘도시 커피 공동체’를 세웠다. 미국 내 범죄율이 높은 우범 지역에 매장을 열기 위해서다. 이 지역 주민에게 일자리을 제공하면 지역 경제와 치안이 개선되고 구매력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결정이다. 2010년에는 존슨의 지분을 인수하고 모든 매장을 직영으로 전환했지만, 지역 주민 고용 원칙은 계속 유지되고 있다.
2000년부터는 트랜스페어(TransFair) USA와 협력하여 공정 무역 인증 커피를 구입하며 세계 최대의 공정 무역 인증 커피 구매자로 자리매김했다.
슐츠는 동성결혼, 총기 허용, 이민 정책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회정치적 이슈에 대해서도 진보적인 입장을 밝혀 왔다. 2014년부터 본부 성격의 스타벅스 지원센터 옥상에 성소수자에 대한 지지를 상징하는 무지개색 깃발을 게양하고 있다. 2020년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선을 막겠다며 대선 출마를 선언한 것도 트럼프의 반(反) 이민 정책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
일각에서는 회사 대표가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에 발언을 하면 회사를 위기에 빠뜨리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실제로 커피 컵에 인종 차별 반대 메시지를 적는 ‘레이스 투게더(Race Together)’ 캠페인은 슐츠 주도로 진행됐지만 민감한 주제를 마케팅에 활용했다는 비판을 받으며 실패로 끝났다. 오히려 2018년 필라델피아의 한 매장에서 일행을 기다리던 흑인 고객이 직원에 의해 신고돼 인종 차별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스타벅스는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전직원에게 인종차별에 대한 교육을 실시했다.
슐츠는 1998년 미국과 이스라엘 간의 긴밀한 동맹을 촉진한 공로로 ‘이스라엘 50주년 기념 공로상’을 수상했는데 이로 인해 스타벅스 음료 한 잔당 기부금이 이스라엘에 전달된다는 오해를 받았다. 스타벅스는 이러한 루머가 사실이 아니라고 여러 차례 해명했지만, 최근 가자지구 전쟁 이후 불매 운동에 휩싸이며 매출에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어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이슈에 입을 닫아서는 안된다는 게 슐츠의 생각이다. 그는 저서 ‘그라운드 업’에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생의 방향을 정하는 것이며, 이는 기업에게도 마찬가지”라며 사회적 발언을 계속할 의지를 밝혔다.
why37@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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