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훼손된 수로 아직도 공사…폭우 피신처엔 뻘건 물 줄줄
예천 산사태·오송 지하차도 참사, 그 후 1년
지난 9일 경북 예천군 감천면 벌방리 노인복지회관. 나이 드신 할머니 10여 분이 모여 점심밥을 짓고 있었다. 갑자기 쏟아진 집중호우로 지난 7~8일 이곳으로 대피해 이틀 밤을 꼬박 새운 터였다. 유모(82) 할머니는 “1년 전 엄청난 산사태가 났을 때도 이곳으로 급히 피신했는데, 올해도 매일 대피하란다. 왔다 갔다 하다가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옆에 있던 70대 할머니도 “비가 쏟아지니까 뻘건 물이 줄줄 흘러나오는데, 어디서 새는지 주민들이 찾아 댕기고 있지만 도대체 찾을 수가 있어야지”라며 고개를 저었다.
지난해 7월 15일 경북 지방에서 역대급 폭우로 인해 대규모 산사태가 발생했을 때도 예천군의 피해가 가장 컸다. 17명이 숨지거나 실종됐고 피해액만 983억원에 달했다. 올해도 하루가 멀다 하고 물폭탄이 쏟아지면서 경북 지역에서만 2000여 명이 급히 대피해야만 했다. 인근의 충북 옥천군과 경북 안동시에서도 인명 피해가 잇따랐다. 오근택 안동시 풍산읍 수곡리 이장은 “하루에만 30여 곳에서 산사태와 침수 피해가 났다”며 “예전에도 이런 재난은 늘 있었지만 올해처럼 심하긴 처음”이라고 전했다.
이곳 벌방리도 피해가 심각하긴 마찬가지였다. 지난해 산사태 때 진흙이 쓸고 간 흔적이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동네 곳곳에 남아 있었고 마을 수로도 여전히 정비 공사 중이었다. 박우락 벌방리 이장은 동네를 둘러보며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는 “도로는 행정안전부, 사방댐 건설은 산림청, 새 주택을 지을 택지 허가는 국토교통부, 이렇게 관할 부처가 제각각 다르다 보니 행정 처리가 계속 지체되면서 이제야 겨우 복구공사 허가를 받았다”며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된 곳은 빠른 복구를 위해서라도 행정도 일괄적으로 처리해 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토로했다.
그나마 지난해 산사태 이후 건설에 들어간 사방댐 9곳 중 7곳은 정비가 완료된 상태였다. 반면 벌방리에서 1㎞쯤 떨어진 수한리를 찾아가 보니 2m 높이의 돌수로가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이에 대해 이수곤 전 서울시립대 토목공학과 교수는 “돌수로만으로는 결코 산사태 피해를 막을 수 없다. 실제로 산사태가 발생할 경우 엄청난 양의 흙더미가 마치 스키를 타듯 빠른 속도로 내려와 마을을 뒤덮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돌수로도 한순간에 휩쓸려 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처럼 대비 시설 정비가 지연된 것은 사고 지점이 산사태 취약 지역으로 지정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달 감사원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7월 14~15일 이틀간 인명 피해가 발생한 경북·충남의 산사태 지역 13곳 중 11곳이 산사태 취약 지역으로 지정돼 있지 않은 상태였다. 감사원은 “형식적인 조사만으로 이미 사방댐이 건설된 곳은 취약 지역으로 지정되고 오히려 인명 피해 우려가 큰 지역은 우선 기초 조사 지역에서 제외돼 있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2019년 부산 사하구 구평동 산사태 지역과 2020년 산사태가 발생한 전국 9개 지역이 미지정 지역이었다.
이와 관련, 이 전 교수는 “취약 지역이 아니라도 벌목 등 개발 행위가 이뤄지면 물길이 바뀌면서 언제든 산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며 “인명 피해 가능성을 염두에 둔 개발 허가가 이뤄져야 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국토는 산지가 65%인 데다 암반 위에 1m 정도의 얇은 토사로 덮여 있는 지질 형태여서 토양 응집력이 부족하다. 집중호우가 쏟아지면 토양이 수분을 머금지 못하고 그대로 흘려보낼 수밖에 없는 구조인 셈이다.
수한리 토박이인 유모(65)씨도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는 “산 위쪽에서 벌목을 한다고 차가 계속 오가다 보니 길이 깊이 파였는데 원상복구를 안 해놔서 그새 수로가 바뀌었더라”며 “물길이 마을로 트일까 걱정돼 계속 민원을 넣었지만 아직도 바뀐 게 없는 상황”이라고 답답함을 호소했다. 이 전 교수는 “개발 허가는 국토부가 내주고 산사태는 산림청이 관리하니 서로 관할 분야가 달라 통합적인 산사태 예방이 이뤄지지 못하는 것”이라며 “예방 대책도 단지 산사태 방지를 넘어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중점을 둬야 할 때”라고 주문했다.
“비만 오면 문자가 와요. 그나마 지난해엔 대피 문자도 없었지만요” 동네 주민들의 불안감이 커지자 벌방리도 마을 순찰대를 구성해 취약 지역을 점검하고 나섰다. 박 이장은 “나이 드신 어르신들도 자청해서 순찰대에 합류하고 있다”며 “주민들도 지난해 기억 때문인지 대피에 협조적”이라고 전했다. 우진규 기상청 예보분석관은 “올여름에도 기습호우가 쏟아질 가능성이 큰 만큼 대피 예보가 뜨면 최대한 빨리 대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조언했다.
예천=신수민 기자 shin.su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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