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아동은 보호받고 있는가?
[서민의 정치 구충제]
인권 기준 엄격해질수록 보호로부터 멀어진다
#1. 몇 년 전, 한 어머니가 학교를 찾아왔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항문이 가렵다는데, 기생충 때문인지 걱정이 돼서였다. 10세 미만의 아이가 항문이 가렵다면 요충일 가능성이 있다. 과거에 비해 기생충 감염이 크게 줄었지만, 요충은 그럭저럭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몇 안 되는 기생충이다. 사람의 손을 통해 전파가 이루어지는 데다, 위생 관념이 희박한 아이들이 주로 걸리는 게 그 비결이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요충에 걸린 아이가 생기면, 같은 반 아이들이 모두 요충에 걸리는 경우도 제법 있었을 정도다.
그러니 날 찾아온 어머니의 딸이 느끼는 가려움증은 요충 탓일 수도 있었지만, 끝내 난 아이의 요충 여부를 확인해 줄 수 없었다. 왜 그랬을까? 기생충 감염을 확인하려면 대변검사를 흔히 떠올리지만, 요충은 대변검사로 진단하지 못하는 기생충이다. 사람 몸 안에서 알을 낳는 대부분의 기생충과 달리, 요충 암컷은 몸에 알을 가득 채운 채 항문으로 이동하고, 항문 밖으로 나가자마자 알을 뿌린다. 요충검사에 ‘항문 주위 도말법’을 쓰는 이유는 이 때문. 항문 근처에 스카치테이프를 붙였다 뗀 뒤 현미경으로 알이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면 된다. 이론적으로는 간단한 검사지만, 그 어머니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는 검사 자체가 아이에게 트라우마가 된다고 생각해서였다.
과거에도 요충 검사를 부끄러워하는 아이가 없었던 건 아니다. 그래도 그 아이들은, 그리고 부모들은, 기생충 감염 여부를 알아보는 게 중요하다는 명제에 대부분 동의해 줬다. 게다가 먼저 검사를 마친 아이들이 ‘하나도 안 아프다’며 검사를 독려해 줬기에, 기생충학자들은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돌며 요충 감염률을 조사할 수 있었다. 지금은 요충 감염률이 학술지에 보고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요충 역시 과거에 비해 줄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검사 방식에 대한 거부감이 과거보다 커졌다는 게 더 타당한 이유다.
요충에 관한 가장 최근 조사는 질병관리본부가 Y시에서 5년간 했던 것. 처음 조사를 시작한 2017년에는 감염률이 5.0%였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감염률이 줄어 2021년 감염률은 1.0%였다. 지속적인 관리를 통해 요충 감염을 줄여야 한다는 게 해당 논문의 결론이지만, 시대가 시대인지라 요충 검사를 하는 기생충학자들은 거의 없다시피 하고, Y시를 제외한 다른 지역의 요충 상황은 안갯속이다.
#2. 인기 웹툰 작가인 주모씨는 2022년 9월, 자신의 아들 A군을 학대한 혐의로 특수교사 B씨를 경찰에 고소했다. 자폐증 증상이 있는 A는 원래 일반 학급에서 장애가 없는 학생들과 수업을 들었으나, 여학생 앞에서 바지를 내리는 행동을 해서 특수반으로 분리 조치됐다. 그 이후 A가 불안 증세를 보이자 주씨 측은 A가 등교할 때 가방에 녹음기를 넣어 보냈는데, 그 안에는 특수교사 B씨가 A에게 “버릇이 매우 고약하다” “나도 너 싫어. 정말 싫어”라고 말하는 장면이 포착돼 있었다. 검찰은 B씨에게 아동 학대를 이유로 징역 10개월과 3년간 취업 제한을 선고해 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는데, 1심 재판부는 벌금 200만원의 선고유예 판결을 내림으로써 B씨의 아동 학대 혐의를 사실상 인정했다.
교사를 아동 학대로 보내는 탄탄대로가 만들어진 셈. 실제로 이 판결 이후 아이에게 녹음기를 들려 보내는 일이 많아졌단다. 충청도에 근무하는 한 특수교사의 말을 들어보자. “녹음기를 발견하고 손 떨림이 하루 종일 멈추지 않았다. ‘교사 일을 그만두어야 하나, 아직은 아닌데’ 등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이게 꼭 특수학교만의 일은 아니기에, 많은 교사가 ‘아동 학대’를 빌미로 학부모들에게 시달리고, 그중 일부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2021년 의정부 호원초의 이영승 교사, 작년 7월 서이초 교사에 이어 작년 9월에는 대전의 한 초등학교 교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제 교사는 아무리 말을 안 듣는 학생이 있어도 훈육을 할 수 없다. 아동 학대의 기준이 워낙 엄격하다 보니, 학부모들이 마구잡이로 아동 학대 민원을 넣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대전 초등학교 교사는 동급생을 폭행한 학생을 교장실에 보낸 게 아동 학대라는 민원에 시달린 이유였다니, 교사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그 바람에 10년 전만 해도 최고의 직장으로 꼽혔던 초등학교 교사는 선호도가 크게 떨어져, 2024년 정시에선 교대 합격선이 4등급까지 추락했다.
#3. 손흥민의 아버지인 손웅정 감독이 운영하는 ‘SON축구아카데미’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오키나와 전지훈련에서 경기에서 진 팀 아이들이 골대에서 중앙선까지 20초 안에 뛰어오라는, 일종의 얼차려를 받은 것이다. C군을 비롯한 4명은 제시간에 들어오지 못해 코너킥 봉으로 엉덩이를 맞았는데, C군의 아버지 D씨는 전치 2주 진단서를 뗀 뒤 손웅정 측을 협박했다. 손씨 변호사는 3000만원을 제시했지만, D가 5억원이라는 터무니없는 액수를 요구함으로써 협상은 결렬되고 만다. 아이를 팔아 한몫을 챙기려 한 D가 세간의 비난을 받는 것과는 별개로, 폭력을 행사한 코치 두 명과 손 감독은 아동 학대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고 있는데, 아동 학대의 기준이 워낙 엄격하다 보니 이들 셋이 유죄판결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 정도로 사건이 일단락되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민변을 비롯한 시민단체들이 “합의금은 부차적인 문제이며, 사건의 본질은 폭력이다”라며 손아카데미를 공격했고, 기자들은 손아카데미 유소년 선수들의 경기 영상을 분석한 뒤 ‘코치진의 욕설과 고성이 담겨 있었다’는 추가 보도를 했다. 손아카데미는 “경기장 바깥에서 선수들에게 지도하는 과정에서 과격한 표현이 나왔고, 긴박한 상황에 신속하게 지시 사항을 전달하다 보니 표현이 정제되지 않았다”고 했지만, ‘너 싫어’란 말도 아동 학대로 인정되는 현실에서 코치진의 거친 말은 아동학대죄의 근거가 되기 충분하다. 손아카데미에 대한 학부모들의 추가 고소가 이어질 수도 있다는 얘기.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든다. 손아카데미는 물론, 과거의 훈육 방식을 고수하던 축구교실들이 하나둘씩 문을 닫을 수도 있겠다는 것. 아동은 취약한 존재이며, 보호받아야 마땅하다. 이상한 점은 아동 보호의 기준이 엄격해짐에 따라 우리 아이들이 ‘보호’로부터 점점 멀어진다는 것, 아동 보호를 위해 기생충학자는 요충 검사를 하지 않고, 선생은 훈육을 포기하고, 축구아카데미는 점점 줄어들고 있잖은가? 2024년, 대한민국 아이들은 진정으로 보호받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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