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소할 데 없었다는 그들, 원스톱 전문 심리상담 필요” [위험수위 다다른 국민 정신건강]
SPECIAL REPORT - 중앙SUNDAY·한국심리학회 공동 기획<하>
최진영 한국심리학회장(서울대 심리학과 교수)은 정부가 이번 달부터 ‘전 국민 마음 투자 지원 사업’을 본격 시행하는 데 대해 “국가 차원에서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전문적인 심리 상담에 나서는 건 처음”이라며 이같이 평가했다. 이 사업은 우울증과 심한 불안감 등 정서적 어려움을 겪는 국민에게 전문가 상담을 지원하는 프로젝트로 2027년까지 총 100만 명에게 전문 심리상담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다.
이에 대해 최 회장은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기대가 큰 만큼 우려스러운 점과 보완해야 할 부분도 적잖다”며 정부의 지속적인 개선 노력을 주문했다. 실제로 중앙SUNDAY와 한국심리학회가 공동으로 지난달 5~11일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우리나라 성인 남녀 3명 중 2명은 번아웃·우울증·무기력감과 자살 충동 등 정신건강 문제를 한 개 이상 겪었고 지금도 2개 이상의 영역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등 국민 상당수가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족 제 기능 못하고 학교는 정글
Q : 이번 설문조사의 의미를 꼽는다면.
A : “기존에도 국민 정신건강과 관련해 여러 통계가 나왔지만 자살률 몇% 등 결과 위주의 데이터가 대부분이었다. 실태 조사도 겉으로 드러난 증상에만 초점을 맞추곤 했다. 그러다 보니 우울·불안, 더 나아가 자살 충동까지 이르게 되는 원인과 심리적 흐름에 대한 진단엔 소홀했던 게 사실이다. 이에 비해 이번 조사는 우리나라 성인 남녀의 마음 상태가 과거엔 어땠고 지금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함께 짚어봤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정신질환은 치료 못지않게 사전 예방과 초기 대응이 무엇보다 중요한 만큼 결과보다는 과정에 더 천착할 필요가 있다.”
Q : 국민 정신건강이 왜 이렇게 나빠졌나.
A : “1980년대 이후 급속한 경제발전과 고속 성장으로 온 사회가 ‘돌격 앞으로’ 분위기 아니었나. 그러다 보니 무한 경쟁과 사회적 고립 가속화 등 그 이면의 문제엔 미처 대비하지 못했고, 그런 상황에서 생각보다 빨리 경제 위기가 잇따라 찾아오면서 심리적 고통과 좌절이 배가된 탓이 크다.”
최 회장은 “특히 청년층의 정신건강 지표가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 게 문제”라고 우려했다. “사회적 어려움에 처할 때 가장 먼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 가족인데 지금 가족이 제대로 기능을 못하고 있지 않나. 게다가 학교는 그들 사이에서 정글로 불리고, 집단 따돌림도 심하고. 그러면서 청소년 시절부터 ‘나 혼자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지고 있다. 이 같은 각자도생은 정신건강 측면에서 매우 위험한 징후다. 내가 힘들 때 나를 지지해줄 사람이 없으면 심리적으로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청소년의 자살 시도가 늘어나는 것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우리네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Q : 일상의 스트레스도 심각한 상황이다.
A : “사실 스트레스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살면서 스트레스 한두 개는 늘 갖고 살기 마련이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도 있듯이 잘 극복해 내면서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을 수 있으면 괜찮은데 지금 우리 사회는 그럴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고 있다는 게 문제다. 로버트 새폴스키 스탠퍼드대 교수의 분석처럼 얼룩말이 위궤양에 걸리지 않는 이유는 만성 스트레스가 없기 때문이다. 반면 인간은 직장 내 갈등을 집에서도 계속 고민하는 존재다 보니 스트레스가 좀처럼 줄지 않고 오히려 만성화되기 일쑤다.”
최 회장은 “이번 조사에서도 응답자의 36%가 번아웃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렇게 정신적으로 소진된 상태에서 스트레스가 추가되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게 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평균적으로 2개의 스트레스까진 버틸 만하고 3개가 넘어가면 견디기 힘들어지는데 자살 시도자의 경우 거의 4개의 스트레스를 동시에 받고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며 “자살률을 낮추려면 이런 근본 요인부터 챙길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Q : 기존 정책이 중증 환자와 입원·격리 치료에 치중해 있다는 지적도 적잖다.
A : “병은 널리 알려야 빨리 낫는다는 말도 있지 않나. 정신질환도 마찬가지다. 경증일 때 치료해야 사회적 비용도 훨씬 적게 든다. 실제로 7주가 지나 정신건강 서비스를 받으면 그 전에 받았을 때보다 효과가 절반 이하로 떨어지는 것으로 조사됐다. 잊지 말아야 할 건 정신질환은 ‘누구나’ 겪을 수 있다는 점이다. 멀쩡한 사람도 정신적으로 힘들어질 때가 있는데 지금처럼 환자의 인권과 선택권이 무시되는 치료가 주를 이루면 누가 치료를 받으려 하겠는가. 마음 아픈 건 결코 비정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면 안 된다’는 사회 분위기가 문제다.”
자살 시도자, 4개 스트레스 동시에 받아
Q : 지난해 대통령 직속 국민통합위원회 ‘자살 위기극복 특위’에도 참여했는데.
A : “정부 부처 간 협력이 결코 쉬운 게 아니더라. 같은 부처 내에서조차 심리 검사하는 부서와 지원하는 부서가 분리된 채 서로 소통이 없는 모습도 봤다. 이래선 원스톱 서비스도 안 되고 전문성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범정부 차원의 협력 시스템 구축이 시급한 상황이다.”
Q : 전 국민 마음 투자 지원 사업이 효과를 거두기 위해 보완해야 할 점이 있다면.
A : “크게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정신건강 정책이 성공한 국가는 모두 과학적으로 효과가 검증된 심리 치료 전문가를 양성해 왔다. 반면 우리는 인력 기준이 없다 보니 전문성이 확인되지 않은 민간 자격증만 5000개에 달하는 게 현실이다. 둘째, 이 사업이 잘 진행되는지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매년 차이를 비교해 데이터로 구축하지 않으면 올바른 대책도 나오기 힘들다.”
최 회장이 강조한 마지막 보완점은 ‘심리적 접근성’이었다. “지금은 지자체 복지센터 등에서 먼저 상담한 뒤 그곳에서 의뢰를 해야 비로소 전문가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돼 있다. 하지만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든 상황에서 어렵게 결심하고 찾아가 속마음을 털어놨는데 또 다른 데 가서 설명하라고 하면 누가 선뜻 용기를 내려 하겠는가. 선진국들이 한 번에 상담·치료가 가능하도록 문턱을 낮춘 것도 이런 시행착오를 겪었기 때문이다. 상담할 때 가장 많이 들은 말이 ‘호소할 데가 없었다’였다. 이런 얘기가 더는 나오지 않도록 정부와 학계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개선할 부분을 꼼꼼히 챙겨야 할 때다.”
박신홍 기자 jbje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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