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 시간마저 ‘여행’으로 돌려주는 베트남판 ‘오리엔탈 익스프레스’
덜컹덜컹 기차 타고 떠난 베트남 중부 여행
목적지에 어떻게 가느냐에 따라 이동 시간은 지루한 기다림이 될 수도 있고, 그 자체가 여행이 될 수도 있다. 덜컹거리는 기차를 타고 떠나는 여행은 상상만으로도 낭만적이다.
올해 여름휴가철, 한국인이 가장 많이 찾을 여행지는 베트남(18.2%·교원 투어)으로 조사됐다. 비행기를 타고 5시간 정도면 닿는 그곳에서 이제 낭만적인 ‘기차 여행’까지 즐길 수 있다. 실제로 기차라는 이동수단은 ‘낭만’의 동의어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지난달 20일 내놓은 보고서에서 여행객들이 교통수단을 이용하며 느낀 감정을 분석한 결과 항공기는 ‘설렘’, 대중교통은 ‘편함’ 그리고 기차는 ‘낭만’이라는 감정을 떠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행이란 무릇 몸도, 마음도 즐거워야 하는 법. 5성급 호텔에 앉아 기차 여행을 떠나보았다. 움직이는 특급 호텔이라 불리는 ‘오리엔탈 익스프레스’의 베트남 판이다. 짧아지는 도착지와의 거리가 아쉬운, 낭만적인 베트남 기차 여행.
◇이동이 여행으로 변하는 기차 여행
지난 1일, 한국인들이 주로 ‘나트랑’이라 부르는 냐짱의 기차역에서 베트남판 오리엔탈 익스프레스 ‘비엣티지’ 열차를 기다렸다. 오후 2시쯤, 베트남 남쪽에서 북쪽으로 가는 기차가 도착하기 전부터 비엣티지라고 쓰인 기차 1량이 대기 중이었다. 남쪽에서 올라온 기차가 냐짱 역에 도착하자 대기하고 있던 비엣티지 기차를 결합하는 작업이 시작됐다. 의자로 구성된 일반석과 침대칸으로 이뤄진 기존 기차의 꽁무니에 박스석과 주방 칸, 스파 공간과 화장실로 구성된 비엣티지 차량을 연결하는 것이다. 영화 <설국열차>는 꼬리칸이 어둡고 칙칙한 하층민의 공간이었지만 이 기차는 꼬리칸이 가장 화려한 공간이다.
벨보이가 짐을 받아 기차에 싣고, 귀여운 기차 그림이 그려진 티켓을 건네 체크인을 했다. 탑승 가능 인원은 총 12명. 오직 이 인원을 위한 셰프와 보조 셰프, 바텐더, 서빙 인력과 마사지사 등이 함께 탑승했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기차가 출발하자 기차는 곧 호텔 레스토랑으로 변했다. 잘 차려입은 직원이 다가와 음료와 주류 메뉴판을 가져다주고, 이날 제공될 애프터눈 티 세트 메뉴를 설명해줬다. 갑자기 주어진 먹을거리 메뉴를 보자 배 속이 허해졌다.
작은 팬케이크에 랍스터와 캐비아를 얹은 요리를 시작으로 아기 손바닥만 한 크기의 베트남식 샌드위치(반미), 스콘과 마들렌 등을 담은 3층짜리 접시가 나왔다. 호텔 셰프가 기차 한가운데 마련된 주방에서 직접 만들어 내온 요리다. 쨍한 색감의 기차 밖 풍경을 얹어 먹었다. 눈도, 입도 황홀했다.
기차 한가운데는 다양한 종류의 칵테일과 전통 주류, 커피와 차를 제공하는 바도 마련돼 있다. 와인과 맥주, 칵테일, 차 종류는 무제한으로 마실 수 있다. 바텐더가 섭섭해하지 않도록 ‘비엣모히토’라는 이름의 칵테일을 주문했다. 민트를 잘게 다져 넣은 모히토에 생강과 레몬그라스를 넣어 베트남식으로 재해석한 모히토였다. 생강과 계피를 넣고 탕약 끓이듯 우려낸 멕시코식 커피도 별미였다. 무거워진 어깨는 기차 안에 마련된 스파에서 마사지로 풀 수 있다. 물론, 마사지도 기본 제공되는 서비스이다.
◇베트남 중부 핵심 관광지
그 사이 창 밖의 풍경은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빨랫줄을 늘어뜨린 베트남 현지인들의 집과 소와 오리, 닭이 돌아다니는 마을, 커다란 삿갓 모양의 베트남 전통 모자 ‘논라’를 쓴 농부들이 일하는 논·밭의 풍경이 흘러갔다. 밖이 보이지 않는 검은 터널을 지났더니 눈앞에 파란 바다 전경이 펼쳐졌다. 작은 고깃배와 커다란 바구니 배가 동동 떠 있는 맑고 파란 바다. 하늘엔 밀도가 높고 풍성한 뭉게구름이 둥둥 떠 있었다. 배가 동동, 구름이 둥둥. 도시에서 볼 수 없던 풍경에 눈이 시원해졌다.
냐짱~꾸이년 구간은 올해 5월 운행을 시작한 신설 구간이다. 이 구간이 신설되면서 일주일가량 휴가를 받은 관광객이 베트남 중부 유명 휴양지인 냐짱과 꾸이년, 다낭을 모두 방문하는 일정을 짤 수 있게 됐다. 차량을 타고 이동할 경우 편도 6시간 정도가 걸리고, 국내선 비행기를 탈 경우 비행기 탑승 시간은 약 1시간이지만 수속 등을 합하면 3시간 이상이 걸리는 게 현실. 국제선 직항이 없는 꾸이년 공항에서 베트남 국내선을 갈아타는 수고를 하지 않고, 한국 직항 비행편이 있는 다낭과 냐짱 공항을 입·출국지로 잡을 수 있다. 휴가 내기 어려운 직장인은 한번의 방문으로 최대한 많은 관광지를 방문하는게 이득. 중간 지점은 기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베트남 중부 지역 유명 관광지 두세곳을 한 번에 즐길 수 있고, 이동 시간마저 새로운 경험과 휴식, 미식의 시간으로 바꿀 수 있다.
한 가지 팁이 있다면 냐짱~꾸이년~다낭으로 북상하는 기차에서는 기차 진행 방향의 오른쪽 좌석을 더 추천한다. 베트남의 뜨거운 햇살이 직접적으로 내리쬐지 않는 데다 바다를 더 자주 볼 수 있다. 거꾸로 남하하는 방향이라면 반대편 좌석이 더 인기가 많을 것. 물론, 어느 방향이든 잠깐 눈을 감는 시간도 아까울 정도로 다채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다낭으로 가는 야간 기차는 좌석이 침대칸으로 바뀐다. 덜컹, 덜컹 하는 소리가 자장가로, 흔들거리는 기차의 움직임은 침대를 요람으로 만들어준다.
우리나라의 울산 바위처럼 산꼭대기에 올라간 커다란 암석이 보이더니 금세 날이 어둑해졌다. 4시간 30분가량의 기차 여행이 끝난 것이다.
◇ 지역별 볼거리도 풍부
어쨌거나 여행처럼 낭만적인 이동 시간은 추가로 더해진 덤에 불과하다. 본격적인 여행은 기차가 고객을 실어나르는 냐짱과 꾸이년, 다낭에서 시작된다.
베트남의 나폴리라 불리는 냐짱에서는 북쪽에 새로운 조성한 관광단지 ‘베가시티’에 머물러보자. 기존 건물을 개조한 비즈니스급 호텔이 많은 시내 대신 바다를 낀 냐짱 북쪽에 조성한 대규모 관광단지이다.
그중에서도 그란 멜리아는 ‘가족형 여행’에 안성맞춤인 곳. 모든 방이 커다란 거실을 갖추고 있고, 8명 이상 앉을 수 있는 대형 식탁이 마련돼 있어 함께 식사를 즐기거나 수다를 떨기 좋다. 에너지 넘치는 어린이들과 젊은 청년들은 리조트 세 곳에 마련된 인공 해변에서 카약이나 패들보드 같은 액티비티를 즐길 수 있다. 거친 파도의 공격은 방파제가 막아준다. 뜨끈한 물에 몸을 지지는 게 더 좋은 어르신들은 수영장보다 바다를 바라보며 즐기는 온천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낼 가능성이 크다. 바다를 바라보는 온천은 혈액순환을 위해 시원하거나, 따뜻하거나, 뜨거운 세 가지 온도로 준비돼 있다.
베트남을 좀 더 이해하고 싶다면, 베가시티에 있는 공연장 도 시어터(Do theater)에서 ‘라이프 푸펫쇼’를 관람해보자. 대사가 없는 공연으로 외국인이나 아이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육상·수중·공중 등으로 구성된 무대에 베트남 전통 악기, 수중 공연, 대나무·그림자·막대 인형극 등을 결합했다. 귀여운 탈을 쓰고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베트남의 12간지를 상징한다. 우리의 소띠는 물소띠, 토끼띠는 고양이 띠로 바뀐다는 점만 알고 가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배는 동동, 구름은 둥둥, 해는 빼꼼
꾸이년에서는 조금 부지런해져야 한다. 아난타라 꾸이년에서 오전 5시쯤 눈을 뜨면 전날 밤 달을 삼킨 산 아래에서 올라오는 붉은 태양을 만날 수 있다. 아직은 하늘 한 귀퉁이만 주황빛으로 물든 상황. 파란 바다와 하늘은 빨간 태양빛을 만나 제비꽃 같은 보라색으로 변한다. 일출을 즐길 수 있도록 바다로 낸 창은 침대를 일출 명소로 만들어준다. 로비 앞 잔디밭에 붙어 있는 조식 레스토랑 역시 빼꼼 뜨는 해를 보기 좋은 장소. 부지런히 일어나 여유롭게 아침을 먹고, 잔디밭에서 진행되는 전통 무술 수업을 듣거나 바닷가 산책을 즐기면 뚝딱 소화가 된다.
다낭에서는 동서양의 건축 양식이 혼재된 호이안에서 1박을 해보자.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이다. 2022년 12월 문을 연 스타벅스 호이안점은 현지 건축 양식을 살려 지은 건물 자체가 볼거리다. 스타벅스의 상징인 초록색을 버리고, 전통 건축물에 쓰인 나무문과 붉은 기와지붕, 노란색 벽을 그대로 살렸다.
동동 떠 있는 배와 둥둥 뜬 구름, 덜컹거리는 기차. 말 그대로 이동이 여행이 되고, 그 여행이 또 다른 여행으로 이어지는 짧은 나흘이었다. 하늘 높이 오르는 비행기나 도심 속을 지나는 자동차에선 느낄 수 없는 낭만, 그 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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