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물면 술이 팍하고 터지던 그날의 초콜릿, 위스키 봉봉
[한은형의 밤은 부드러워, 마셔] 위스키 봉봉
내게 잘해준 사람은 잊기 힘들다. 그것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잘해준 사람은. 어릴 때 잘해준 사람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 사람이 준 것 중에는 위스키 봉봉도 있었다. 깨물면 술이 팍 하고 터지는 기이한 초콜릿의 이름이 위스키 봉봉인지 그때는 몰랐지만 말이다. 날카롭고도 뜨거운 촉감이었다. ‘이게 뭐지?’라고 잠시 어리둥절해 하다가 바로 알았다. 그림책에서만 보던 술이 든 초콜릿이 바로 이것이라고. 이런 지행일치의 순간도 잊기 힘들다. 인생 첫 음주의 기억이다.
“알코올이 든 봉봉은 도와코씨가 우리 집에 올 때 가져오는 단골 선물이었다. 술이 들어가서, 하고 도와코씨는 내가 한 개를 다 먹지 못하도록 반으로 나눠주었다. 맛있어요, 더 먹고 싶어요, 그랬더니 “히나키는 나중에 술을 잘 마시겠구나” 하고 웃었다.”(오리가미 교야, ‘그에게는 쇼콜라와 비밀의 향기가 풍긴다’) 도와코씨는 히나키의 이모다. 위스키 봉봉은 이모의 선물이었다. 위스키 봉봉이 나오는 소설을 보다가 강렬했던 위스키 봉봉의 시간이 소환되었던 것이다. 술에 관한 단편소설을 모은 책 ‘호로요이의 시간’을 읽다가 우연히 발견한 소설이다. 이 별거 없이 담백하고 잔잔한 문장을 보다가 내게도 저런 기억이 있다는 게 떠올랐다.
최근에 갔던 바에서도 위스키 봉봉을 먹었다. 특이하게도 술보다 초콜릿이 우위에 있는 바였다. 그렇기에 바의 주인을 바텐더라기보다는 쇼콜라티에라고 불러야 할 텐데, 그분은 위스키 봉봉은 한입에 먹으라고 했다. ‘소설에서 도와코씨는 히나키에게 위스키 봉봉을 반씩 나누어주는데…’라고 생각하며 권하는 대로 위스키 봉봉을 입안에서 터트렸다. 한입에 초콜릿과 술을 삼키면서 아깝다고 생각했다. 두 번에 나누어 먹거나 천천히 먹으면 어땠을까라며.
주인 혼자 하는 그 바는 예약제로 한 번에 한 테이블만 받는데, 초콜릿 코스가 4코스로 이루어지는 술집이었다. 그러니까 술을 넣은 초콜릿이 4코스라는 말. 첫 코스는 위스키를 넣은 오렌지 소르베와 멜론 소르베였다. 일행이 오렌지, 나는 멜론을 선택했더니 술집 주인이 오렌지와 멜론에 어울리는 술을 부어주었다. 오렌지에는 코냑, 멜론에는 샤르트뢰즈였던가. 동그란 위스키 얼음처럼 얼린 멜론과 오렌지 소르베가 술에 섞여 녹기 시작할 때쯤 초콜릿이 나왔다. 동그란 모양의 초콜릿, 위스키 봉봉이었다!
초콜릿을 깨물자 술이 왈칵 흘러나왔는데… 라가불린이었던가 수정방이었던가. 둘 다 먹었을 수도 있다. 그 바는 무려 아드벡과 라가불린과 수정방 등등을 넣은 위스키 봉봉을 내주는 곳이었다. 이렇게 쓰고 보니 호사롭기 그지없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느끼지 못했다. 멜론 소르베도 술, 멜론 소르베에 부은 액체도 술, 또 위스키 봉봉도 술. 술과 당과류를 연달아 먹으면서 ‘이건 좀 과하군’이라고 생각했다. 술에 술에 또 술이 겹치니 위스키 봉봉의 귀여운 도발이 슬슬 권태로워졌달까.
‘그에게는 쇼콜라와 비밀의 향기가 풍긴다’에는 술은 마시지 못하지만, 위스키 봉봉을 좋아하는 사람이 나온다. 그 사람을 좋아했던 사람은 위스키 봉봉을 좋아하게 되고, 어린 조카에게도 위스키 봉봉을 선물한다. 어린 조카는 커서 이모가 좋아했던 사람을 찾아 나서게 되는데, 위스키 봉봉을 선물로 들고서다. 성인이 된 조카는 방문한 집에서 홍차와 술이 듬뿍 들어간 쿠키와 케이크를 대접받는데… 그저 부러웠다. 어쩌다 방문한 집주인이 알고 보니 온갖 술을 넣고 만드는 온갖 양과류에 정통한 사람이고, 그 사람은 자기가 만든 술 디저트를 즐길 사람을 기다려 왔고… 너무도 비현실적인 것이다. 성인을 위한 동화랄까.
여기까지 쓰다 보니 위스키 봉봉의 비밀(?)을 알 것도 같다. 아이만을 위한 것도 아니고 어른만을 위한 것도 아니며 과한 것보다는 부족한 것이 낫다는 것. 하지만 과하더라도 그리워하게 된다는 것. 술과 초콜릿에 거의 절여진 그 난감했던 오후가 그리울 줄이야. 위스키를 입속에서 연달아 팍 팍 터트리던 그 시간을 생각하니 웃음이 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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