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내면 죽는다
놀라서 비명 지르면 게임오버
방구석 불쾌지수 공포로 퇴치
쉿!
조용히 할 것, 공포의 제1원칙. 7월의 축축한 밤 나는 어느 숲에 와 있다. 날이 너무 더워 택한 길이지만 눈앞이 캄캄하다. 움직이려면 약한 랜턴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 웅웅댄다. 흐느끼는 풀벌레 소리, 발밑 낙엽까지 소름끼치는 파열음을 낸다. 뭐가 기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어둠. 곧 귀신이 출몰할 것이다. 20분 동안 버텨야 한다. 큰 소리만 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있다.
꺅! 광기 어린 괴성, 방심한 사이 머리가 산발한 웬 누추한 차림의 여성이 수풀에서 뛰쳐나와 내 앞을 비껴간다. 보통 사람이라면 놀라 자빠질 급습이었다. 본인은 그러나 다년간의 층간 소음과 개소리, 취재 현장에서 숱하게 맞닥뜨린 귀신 씨나락 까먹는 행태에 적잖이 단련된 상태. 그때 쾅, 나무 한 그루가 쓰러져 길을 가로막는다. 위험했다. 흉성이 터져 나올 뻔했다. 침묵의 장기 간(肝), 이제 슬슬 담력을 시험할 차례. 얼마나 무서운지 끝까지 가보자. 게임일 뿐이니.
그렇다. 이건 1인칭 컴퓨터 게임(쉿!·SHHH!)이다. 최근 공포 게임의 새 트렌드, ‘비명 인식’을 기반으로 한다. 헤드셋에 달린 마이크로 게이머가 내는 소리를 인식해 데시벨이 일정 수준을 넘어가면 “공포에 질렸다”고 판단해 게임이 자동 중단된다. 공포에 패배한 것이다. 소리 내지 말라는 입막음의 조건이 스릴을 극대화한다. 지난해 12월 발매됐는데 독특한 설정 탓에 여전히 인기. 장마철, 눅눅한 방구석의 불쾌지수를 공포가 해결해줄 것이다. 호러물이 체온을 낮춘다는 실제 연구 결과도 있다.
훼손된 신체, 혈흔 낭자한 폐가, 기분 나쁜 주술의 흔적 등 온갖 ‘점프 스케어’(Jump Scare)가 게임에 숨어 있다. 큰 소리나 엽기적인 이미지를 갑자기 돌출시켜 놀래는 영화적 기법. 영화는 보는 것이지만, 게임은 하는 것이다. 공포 영화는 여럿이 볼 수 있지만, 공포 게임은 혼자 해야 한다. 더 무서울 수밖에. 게임 제작사 616게임즈가 밝혀둔 전제 조건은 “불을 다 끄는 것”. 마른침을 하도 삼켰더니 수분이 손바닥으로 분비돼 금세 축축해진다. 등줄기가 차갑다. 20분이 더럽게 길었다. ‘침묵이 당신을 불운에서 구해냈습니다.’
‘인 사일런스’(In Silence) ‘클래스룸’(The Classroom) 등 ‘비명 인식’ 게임은 잇따르고 있다. 지난해 나온 ‘돈 스크림’(Don’t Scream) 역시 마찬가지. 귀신의 숲에서 18분을 버텨야 한다. 시간이 얼마나 경과했나 볼 수 있게 화면 하단에 타이머가 표시되고, 움직임이 없으면 타이머는 작동하지 않으며, 소리를 내면 게임이 끝나는 등 대동소이한 콘셉트다. 단순한 규칙이 제작과 유희의 진입 장벽을 낮췄다. 다만 심약자는 접근 금지. 제작사 측은 “게임 때문에 엉망이 된 속옷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진정한 공포는 물가(物價) 아니겠는가. 스릴은 돈이 든다. 놀이동산 ‘귀신의 집’ 갈 여력은커녕, 주말에 극장에서 영화 한 편 보기도 부담되는 게 현실. 그 점에서 비명 참기 게임은 마음씨가 착한 편이다. ‘쉿!’은 50% 할인 중이라 1150원에 구매했고, 대개 1만원 이하의 가격으로 플레이가 가능하다. 온라인으로 결제한 뒤 게임을 다운로드해 설치하면 된다. 다만 일반 업무용 노트북으로는 구동되지 않을 수 있기에 성능 괜찮은 PC가 필요하다.
현실이 잔혹할수록 가상의 공포는 더욱 진화해야 한다. 지난 4월 발매된 신작 게임 ‘사일런트 브레스(Silent Breath)’는 비명만 단속하는 데 그치지 않고, 괴물에게 잡히면 안 되는 규칙 등을 추가해 긴장 상황을 곳곳에 심어놨다. 그래픽도 이전 게임에 비해 훨씬 사실적이다. 이용자 후기 하나. “이 게임을 하고 나서 12년 만에 처음 침대 밑을 확인했다.” 그러나 공포가 재미가 되는 순간은 남이 놀라는 것을 볼 때. 유튜버들이 해당 게임에 도전하는 체험 영상도 재미거리다. 공포가 야기하는 인간적 호들갑. 고대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는 일찍이 간파했다. “가장 무서운 사람은 침묵을 지키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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