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 초밥집 비결? “인테리어가 아니라 손님에게 투자했죠”
서울 강남서 가장 오래된 초밥집
‘김수사’ 정행성·정재윤 父子
1986년 개업한 ‘김수사(金壽司)’는 서울 강남에서 가장 오래된 초밥집이다. 아버지 정행성(76)씨와 아들 정재윤(43)씨가 논현동 같은 자리에서 대를 이어 38년을 운영해 왔다. 부자(父子)가 모두 오너셰프. 셰프 자리는 아들에게 물려줬지만 명성과 서비스는 그대로다.
초밥집은 흔히 세 등급으로 나눈다. 엔트리(entry)급은 점심 5만원·저녁 10만원 수준이다. 미들(middle)급은 점심 8만원·저녁 15만원 이상 지불해야 초밥을 오마카세(코스)로 먹을 수 있다. 하이엔드(high-end)급은 점심 10만원·저녁 20만원 이상 쓸 각오를 해야 한다. 김수사에서는 초밥 오마카세를 점심 5만원, 저녁 8만원에 먹을 수 있다. 엔트리급이다. 지난달 신세계백화점 프리미엄 미식관 ‘하우스 오브 신세계’에 낸 첫 2호점에서는 오픈 기념으로 1인당 4만5000원(한시적)을 받고 있다.
지난 5일 신세계 강남점에서 부자와 마주 앉았다. 아버지 정행성씨는 “손님들이 너무 싸다며 올리라고 성화”라며 싱긋 웃었다. 아들 정재윤씨는 “저희는 올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처음부터 ‘문턱이 낮은 식당’을 추구하셨어요. 그 뜻을 잇고 싶습니다. 손님들이 김수사에서 돈을 쓴 게 아니라 벌었다는 느낌을 받고 가셨으면 좋겠어요.”
일식 조리사가 된 아들에게 아버지가 준 첫 선물은 회칼도 조리사 가운도 아니었다. 손톱깎이였다. “조리사에게는 요리도 중요하지만 청결과 위생은 생명과 같아요. 나중에는 회칼도 선물했어요(웃음).” 영업을 마치고 귀가한 아들은 그 손톱깎이로 매일 손톱을 다듬으며 초심을 되새긴다고 했다. 김수사는 그렇게 강남에서 가장 오래된 초밥집의 역사를 하루씩 더해가고 있다.
◇그런데 왜 ‘김수사’일까?
아버지 정행성 대표는 하얏트 호텔에서 일식 조리사로 일하며 성실성과 눈썰미를 인정받았다. 일본인 주방장이 도쿄 오쿠라호텔로 연수를 보내주기도 했다. 그는 “호텔 일식당은 시중 일식당과는 차원이 달랐다”며 “음식점을 하려면 호텔에서 배워야 한다”고 했다. 정 대표는 10년간 일한 호텔을 떠나 1988년 김수사로 자리를 옮겼다.
-식당 주인은 정(丁)씨인데 왜 상호는 ‘김(金)수사’인지 궁금합니다.
“하얏트 호텔 일식당에 김씨 성을 가진 단골 손님이 있었어요. 그분이 ‘함께 일식당을 해보자’며 스카우트를 제안했지요. 당시 퇴직금으로 잠실에 아파트를 사 가족을 번듯한 집에서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사직서를 내고 호텔 회장에게 사정을 얘기하니 인사부장을 불러 ‘퇴직금을 선불로 지급하라’고 지시했어요. 당시엔 그런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인사부장이 반발했지만 결국은 회장 지시대로 퇴직금을 미리 받고 호텔에 눌러앉았어요. 단골 김 사장에게는 다른 호텔 일식 조리사를 소개해줬고요.”
-그럼 김수사에는 언제 갔나요?
“일 년 뒤 김 사장이 다시 저를 부르더라고요. ‘당신이 꼭 필요하다, 스카우트비를 더 줄 테니 와달라’고 애원했어요. 결국 1988년에 호텔을 그만두고 김수사로 옮겼습니다.”
-어쩌다 김수사를 인수했나요.
“장사가 잘 안됐어요. 1년쯤 뒤에 김 사장이 ‘남는 게 없어 나는 도저히 안 되겠다’면서 인수를 권하더라고요. 고민하다가 ‘오너셰프로 잘만 운영하면 승산이 있겠다’ 싶어 제2 금융권에서 대출을 받아 1990년 가게를 인수했죠.”
-상호를 ‘정(丁)수사’로 바꿀 생각은 안 했나요?
“장사만 잘되면 그만이지 싶더라고요. 김(金)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성이고, 손님들에겐 이미 ‘김수사’로 익숙해졌으니까요.”
-인수하자마자 장사가 잘됐다면서요.
“희한해요. 이상하게 막 손님이 밀려들었어요. 대출 이자가 만만치 않아서 제가 그만큼 절박하게 모든 걸 걸고 장사를 했습니다.”
-당시 일식집에서 팔지 않던 소주를 내놓은 건 획기적인 서비스였어요.
“그때는 일식집에서 위스키나 사케 같은 비싼 술만 팔았어요. 하지만 ‘소주를 마시고 싶다’는 손님이 많았죠. 소주를 주전자에 담아서 내놓자 반응이 폭발적이었어요.”
-코키지도 받지 않았다면서요?
“원래 일식당에서는 손님이 술을 가져오면 병당 4만~5만원씩 받았어요. 그걸 기분 나빠하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와인과 위스크 반입을 무료로 허용했습니다. 그냥 음식만 드시고 가셨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했어요.”
-요즘은 병당 1만원을 받지요?
아들: “코키지를 받지 않았더니 편의점에서 소주, 맥주 심지어 탄산음료까지 사 들고 오는 손님들이 계세요. 어느 정도 질서가 필요해 받기 시작했어요. 상징적으로 1만원씩만.”
-생선은 제일 좋은 걸 남보다 비싸게 사는 이유가 있나요.
아버지: “그래야 좋은 물건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대개 납품 업자들이 명절이면 식당에 선물을 해요. 저는 반대로 거래처에 줬어요.”
아들: “아버지가 호텔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업체들과 지금도 거래합니다.”
◇소 먹이며 외운 영단어로 호텔 입사
정행성씨는 전남 고흥 빈농 출신이다. 8남매 중 일곱째, 아들로는 막내다. 먹고살기 빠듯한 집안에 태어나서일까. 그는 식사를 마친 손님에게 “맛있게 드셨느냐”가 아니라 “배부르게 드셨느냐”고 묻는다. 그는 “어릴 적 제 고향 사람들은 초밥을 못 먹어봤어요. 그래서 문턱 낮은 초밥집을 꾸리고 싶었다”고 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소에게 여물을 먹이고 등교했다면서요.
“그래도 공부를 게을리하진 않았어요. 영어 시험이 있는 날인데 비가 내리면 우산 받쳐 쓰고 소 먹이며 영어 단어를 외웠어요. 동네 어르신들이 ‘저 놈 싹수가 있네’ 하셨죠(웃음).”
-어떻게 일식 조리사가 됐나요.
“고등학교 진학할 무렵에 형편이 어려워서 서울로 올라왔어요. 둘째 형 집에서 며칠 묵었지요. 단칸방에 조카들까지 있어 미안하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했어요. 형 집을 나와서 숙식을 제공하는 공장에서 일했어요. 한 달 다녀보니 공장은 아니다 싶어 서울 종로 ‘옥천’이라는 일식집에 취직했습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엔 다른 직원들과 함께 가게에서 잤어요.”
-그때 꿈은 뭐였습니까.
“공무원이 되고 싶었어요. 가게 맨 구석방에서 밤 늦게까지 공부했어요. 군대 가서도 공부를 계속했지만 운이 없었어요. 두 번 낙방하곤 이 길이 아니다 싶었죠.”
-그래서 방향을 요리사로 틀었나요.
“제대하고 여의도 국회의사당 건너 동양화재 건물 지하에 있던 일식당 ‘동양’에서 일했어요. 1978년에 남산 하얏트 호텔이 문 열면서 요리사를 공채했지요.”
-경쟁이 치열했을 텐데요.
“다른 지원자들은 입사원서를 대서소에서 돈 주고 인쇄해서 가져왔더라고요. 당시 글씨 잘 쓰는 요리사는 드물었어요. 더군다나 호텔 입사원서를 영어로 쓸 줄 아는 요리사는 없다시피 했지요. 저는 전부 제 손으로 직접 써서 냈어요. 면접관이 ‘자필이냐?’ 묻길래 ‘그렇다’고 했더니 ‘오케이야’ 하더군요. 합격한 둘 중 하나가 저였죠.”
-소 여물 먹이면서 영어 공부한 게 빛을 봤군요.
“그렇다고 할 수 있죠(웃음).”
◇새벽 4시에 출근한 아버지
정행성 대표는 새벽 4시에 하루 일과를 시작하곤 했다. 노량진시장에 가서 가장 물 좋은 생선을, 이어 가락시장에서 가장 신선한 채소를 직접 골랐다. 두 시장을 돌고 매장에 도착하면 오전 9시 반. 재료 씻고 다듬으면 점심 영업이 코앞이다. 밥 먹을 시간이 부족해 카운터 뒤에 선 채로 빵과 우유로 끼니를 때웠다. 그렇게 오래 살아서일까, 정 대표는 2008년 위암 수술을 받았다. 손님의 위장을 호강시켜주면서 정작 자신의 위장은 돌보지 못한 탓이다.
호텔에서 일식 조리사로 일하던 정재윤 셰프는 건강이 악화된 아버지를 도우려 김수사에 합류했다. 아버지는 식당 대표, 아들은 주방을 맡았다. 아들은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하던 아버지가 내 롤모델”이라며 “그 성실함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요리사가 된 계기라면?
아들: “대학에 막 입학했을 때예요. 밤새 친구들과 술을 먹고 사우나 가려고 돈 가지러 집에 왔어요. 눈이 많이 내린 날이었죠. 아버지가 출근하려고 차에 쌓인 눈을 치우고 계셨어요. 새벽 4시에. 저녁 때 집에 돌아오니 아버지가 마늘대 삶은 물에 발을 담그고 계셨어요. 고생하는 아버지를 도와야겠다 싶었어요.”
아버지: “영하 20도까지 내려간 겨울에 군대에서 동상이 걸렸어요. 완전히 낫질 않더라고요. 시장에 가면 바닥에 질척질척 물이 많았어요. 장화를 신어도 발이 젖어 아팠죠. 마늘대 삶은 물이 좋다길래 겨울에는 저녁마다 발을 담그곤 했어요.”
-아드님은 어디서 일식을 배웠나요.
“전문대 관광학과를 졸업하기 전 명동 세종호텔에 주방 실습생으로 갔어요. 원래 한 달인데 연이 닿아 열 달 있었고, 취직으로 이어졌지요. 그런데 아버지가 몸이 안 좋으셔서 2007년쯤 김수사로 들어갔어요. 1년 정도 아버지와 동업 아닌 동업을 하다 보니 자꾸 싸우게 되더라고요. 동부이촌동 어느 일식집으로 옮겼어요.”
-그랬는데 왜 다시 돌아왔나요?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하다가 ‘아버지의 노련함과 나의 젊은 패기가 만나면 잘되지 않을까’ 싶었어요. 세 가지 목표를 세웠습니다. 첫째, 역대 최고 매출. 둘째, 딸이 초등학교 2학년이 되기 전에 잠실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하자. 셋째, 아버지한테 대한민국에서 제일 좋은 차를 뽑아드리자. 아버지가 타고 다니던 그랜저가 중고차였거든요. 5년 안에 해보자 했는데 2년 만에 다 이뤘어요.”
-가격은 어떻게 정했나요.
“내가 손님이라면 어느 정도 가격대가 합리적일까 생각했어요. 한 끼에 10만원이 넘어가면 부담스럽지 않나 싶습니다. 식당에서 가격을 책정할 땐 재료비·인건비 등 원가를 먼저 계산해요. 저는 거꾸로 ‘내 지갑에서 점심·저녁으로 얼마까지 돈이 나올 수 있을까’ 생각해 가격대를 정한 다음 원가를 맞췄어요.”
-인건비며 원재료비가 급등했는데.
“손님을 적게 받으면 마이너스겠죠. 하지만 많이 받으면 식당도 좋고 손님도 좋고.”
-박리다매 전략이군요.
아들: “저희가 쓰는 참치나 활어 양이 다른 데보다 훨씬 많으면, 거래처에서 싸고 좋은 걸 줄 수밖에 없어요.”
아버지: “저희 식당에서 쓰는 생선 양이 다른 집의 세 배가 넘습니다.”
-아버지에게 손톱깎이를 선물 받은 날 기분이 어땠나요.
아들: “저도 다른 식당 갔을 때 조리사 손톱이 길면 먹기 싫어요. 머리를 민 것도 조리모를 썼을 때 지저분하게 까치집이 될 수도 있어서입니다. 청결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제 캐릭터가 될 수도 하고요. 사실 탈모가 진행 중이기도 했고요.”
아버지: “돈이 들더라도 심어주려고 했는데 아들이 싫다네요(웃음).”
◇싸지만 후지진 않은 식당
지난달 10일 ‘하우스 오브 신세계’가 문을 열었다. 여기 입점한 외식업장 12곳 중 최고 화제는 김수사다. 개업 이래 분점을 한 번도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수사 신세계 강남점’에서 초밥을 먹으려면 주중에도 2시간가량 기다려야 한다. 신세계 관계자는 “오전 10시 30분 백화점 문이 열리면 자리를 예약하려고 손님들이 뛰어들어오신다”며 “오픈런(open run)이라지만 실제로 뛰는 건 처음 봤다”고 했다.
-그동안 제안이 많았을 텐데 이제야 2호점을 낸 이유라면.
아버지: “시시한데 여럿 내기보단 확실한 데가 나오면 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아들: “아버지가 늘 ‘변화하되 변하진 말자’ ‘서두르지 말고 순리대로 가자’ 하셨는데 그렇게 된 것 같아요.”
-반걸음만 앞서 가야 한다면서요?
아들: “스시야(壽司屋)가 유행하면서 고급 가게들이 등장했어요. 김수사는 너무 촌스러운가 싶어 인테리어 등 이것저것 바꾸고 싶었지요. 하지만 아버지는 ‘마음 편히 들어와서 회덮밥처럼 간단한 식사도 할 수 있는 가게로 가자’고 하셨어요.”
아버지: “너무 화려한 가게는 들어가기도 전에 겁을 먹잖아요. 너무 앞서 가면 거부감이 생겨요. 인테리어에 투자하지 말고 손님에게 투자해야죠.”
-어떻게 변화하고 싶은가요.
“의류 브랜드 ‘유니클로’는 돈이 있는 사람도 입고 없는 사람도 입지요. 김수사도 싸지만 후지지 않고 명품 같은 식당이길 바랍니다. ‘김수사에서 먹었어’ 하면 듣는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가게로. 그리고 손님과 친구가 될 수 있는 식당으로.”
-손님과 친구가 될 수 있는 식당이란 어떤 곳인가요.
“인테리어나 음식도 중요하지만, 나를 반겨주는 집이 편하잖아요. 이야기도 하고 술도 나누면서 손님과 친구 사이가 됐으면 좋겠어요.”
-김수사가 3대로 이어질까요?
“제 딸이 이어가면 좋겠어요. 요리도 최소한의 기본을 배우고, 실무를 1~2년 뛰고서요. 유행하는 레스토랑, 특히 여자 셰프가 있는 곳으로 딸을 자주 데리고 다녀요. 저도 어렸을 때 아버지 따라서 일식당 많이 다녔어요. 가게 문 열고 들어가면 ‘여기 잘하겠구나’ 알게되더라고요.”
-뭘 보면 알 수 있나요.
아들: “잘하는 일식당은 비린내가 나지 않아요. 재료를 철저하게 다룬다는 증거죠.”
아버지: “조리사가 서 있는 모습만 봐도 일을 잘하는지 못 하는지, 진심으로 하는지 아닌지 알아요. ‘엉성하네, 열정이 없네, 자부심이 있네’를 앞치마 두른 모양새만 보면 알죠.”
철학이 있는 식당 주인은 절대 가게를 비우지 않고 주방을 장악한다. 무엇보다 기본을 지킨다. 또 대를 잇게 되면 첫 선물로 뭘 하겠는지 물었다. “손톱깎이죠.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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