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은 여행법 [윤평중의 지천하 8]
‘자유여행’은 현대인의 로망이다. 틀에 박힌 여행보다는 ‘구름에 달 가듯이’ 자유로운 나그네 길을 꿈꾼다. 만인의 공개 일기장 SNS엔 멋진 여행 사진과 여행기가 가득하다. 방송가도 세계 곳곳 사람 사는 얘기와 풍광을 보여주는 ‘빠니보틀’과 ‘곽튜브’ 같은 여행 유튜버가 대세다.
해외여행이 거의 불가능했던 시대에 자란 세대로선 놀라운 변화다. 1958년 세계 일주 여행을 시작해 평생 세계를 누빈 김찬삼 교수는 소년 시절 경외의 대상이었다. 베스트셀러 ‘세계일주무전여행기’를 세계지도와 대조해 가며 닳도록 읽었다. 당시 세계 최빈국 한국에선 해외여행은커녕 여권 발급 자체가 희귀한 일이었다. 반면 올해 대한민국 여권 파워는 세계 2위다. 전 세계 227국 중 193국 무비자 입국이 가능하다. 대중 자유여행의 시대다.
하지만 ‘자유여행’이란 말에 매이지 않아도 된다.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 같은 배낭여행은 크고 아름답지만 누구나 가능한 건 아니다. 여행에 정답은 없다. 각자의 작은 여행이 있을 뿐 모든 여행은 옳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의 공기는 자유이다. 어느 곳을 어떻게 가든 맘 편히 떠나면 즐거운 여행이 된다.
‘나 홀로 국내 여행’을 즐기는 한 친구는 바쁜 일과 후 차를 몰고 산천을 섭렵한다. 유명 관광지를 피해 호젓한 계곡과 암자, 시골 마을에서 며칠씩 혼자 지내다 일상 업무로 돌아간다. 전국 자연 휴양림을 두루 다니는 친구 부부도 있다. 우리 형님은 친구 수십 명과 ‘베트남 한 달 살기’를 대중교통과 걷기 여행으로 실천했다. 바람 쐬러 훌쩍 떠난 당일치기 여행이야말로 훌륭한 자유여행이다.
몇 년 전 문명과 역사에 매혹돼 다녀온 이집트·튀르키예 여행에선 인상적인 ‘사건’이 있었다. 길에서 만난 현지 청소년들이 우리 일행을 박수로 환영하고 같이 사진 찍길 청하는 것이었다. 추측건대 그 아이들은 초로의 여행자들을 한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BTS나 뉴진스 같은 K팝 스타들과 겹쳐 보는 듯했다. ‘세계 속의 우리’를 깨닫게 한 상쾌한 경험이었다.
작년에 친구들과 함께 한 동남아 여행은 크루즈 본사를 통해 직접 구매하니 반값이었다. 칠순 아저씨들이 복잡한 영문 홈페이지 절차를 통과하는 건 산 넘어 산이었지만 ‘집단지성’으로 문제를 풀었다. 교통편, 호텔, 식당, 기항지 관광 등 책임을 분담해 예약·지불하고 귀국 후 정산하는 우정의 협업이었다. 낮엔 각자 지내고 저녁엔 선내 식당에서 만나 4박5일 동안 이야기꽃을 피운 ‘홀로 또 함께’의 시간이 빛났다.
여행 중엔 ‘아, 앞으로 여길 다시 오진 못하겠지’라는 느낌이 강렬하다. 삶의 일회성을 진하게 체감하는 시간과 장소 체험은 여행의 축복이다. 명승지나 유명 박물관만의 경험이 아니다. 이국땅 윤슬 반짝이는 작은 시냇가, 빨래 걸린 골목길, 현지 주민의 웃는 얼굴과 카페의 커피 한 잔이 모두 삶의 보석이다. 인생을 가득 채우는 유일무이한 순간들이다.
여행은 쉼의 여정이자 학습의 장이다. 동남아 여행 전엔 ‘싱가포르의 아버지’ 리콴유 저작을 통독했다. 이집트·튀르키예 여행도 마찬가지다. 미리 관련 자료를 보면서 설레고 상상하는 시간을 즐긴다. 이게 여행의 절반을 차지한다. 난 언제나 여행을 꿈꾼다. 꿈꾸는 자의 마음은 항상 청춘이라고 믿는다.
모든 여정의 시작과 끝엔 나를 기다리는 ‘집’이 있다. 여행이 신선한 건 그 시작과 끝에 돌아가야만 하는 일상이 있기 때문이다. 괴테는 명성의 정점에서 도망치듯 이탈리아로 떠났지만 바이마르로 돌아와 새롭게 우뚝 설 수 있었다. 결국 여행은 다른 이들의 삶을 봄으로써 자신을 재발견해가는 여정이다. 오늘도 나만의 상상 여행으로 넉넉한 하루를 시작한다. 우리는 충만한 인간으로 돌아오기 위해 먼 길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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