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구겐하임도 주목했다, 팔순의 퍼포머 성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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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와 친구들
성능경은 1944년 예산 읍내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다. 사촌형 중에 시인 성찬경(1930~2013)이 있었다. 성찬경은 1950년에 서울대 영문과에 입학하자마자 병을 얻어 예산으로 내려왔다. 곧 전쟁이 났다. 어린 성능경은 탱크를 열심히 그렸다. 탱크 그림을 사촌형이 칭찬해주었다. 칭찬에 고무된 소년은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성능경은 상경하여 중앙중학교에 입학했다. 탱크를 잘 그리던 소년은 미술반에 들어가고 싶었다. 미술교사가 “넌 그림을 못 그리니 미술반에 들어오지말라” 했다. 낙심했다. 존경하는 시인 사촌형에게서 많은 감화를 받았다. 고상한 정신의 세계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 세계를 동경했다.
1963년 홍익대 미대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모델을 앞에 두고서 인체데생을 하는 수업이 있었다. 자신은 데생력이 없다고 생각한 성능경은 그 수업이 싫었다. 풍경화, 정물화를 한 장도 제대로 그리지 못한 채 대학을 졸업했다. 성능경이 고교생이었을 때, 성찬경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화가 훈데르트바서를 소개해주었다. 대학 시절 한때 훈데르트바서 풍의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러나 곧 실험미술로 바뀌었다. 사촌형은 실험미술에 대한 거부반응을 보였다.
프랑스로 유학을 가고 싶었다. 충무로에 있는 알리앙스 프랑세즈에 다니며 불어를 공부했다. 문법 1, 2, 3권에 문학 1권 총 4권의 책을 마쳐야 했는데, 진도가 너무 느렸다. 1년 반 동안 겨우 2권의 반까지만 나갔다. 불어가 전혀 늘지 않았다. 프랑스 유학을 포기했다. 1989년 동경에 갔다. 그게 최초의 해외여행이었다. 해외를 나가지는 않았지만 성능경의 작업은 누구보다도 더 국제적 감각의 문법을 갖추어 가고 있었다.
“스가 기시오가 누런 서류 봉투를 하나 들고 나타났다. 누런 서류봉투 속에서 A4 용지 크기 하얀 종이 한 장을 딱 꺼내어 흔들었다. 접혀진 얇은 종이를 펴니까 두 배가 되고 네 배, 여덟 배가 되었다. 나중에는 아주 큰 종이봉투가 되었다. 얇은 종이봉투 안으로 스가가 들어가 봉투를 안에서 위로 올려버리니 사람은 안 보이고 거대한 봉투가 관중 가운데 탁 서있는 형상이 되었다. 보이는 건 손가락뿐이었다. 그 손가락으로 봉투를 집어서 찢어내었다. 빙빙 돌아가며 발 있는 데까지 마저 다 찢었다. 찢은 종이가 수북이 쌓였다. 그걸 가져온 누런 서류봉투 안에다 넣으려니 오분의 일도 들어가지 못했다. 불룩해진 봉투를 들고서 스가는 사라졌다.”
이 짤막한 얘기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김구림은 며칠 후 성능경·신학철·이건용·김용민·함연식 등 다섯명의 후배들을 모아 ‘75 오늘의 방법전’이라는 전시회를 충무로 명보극장 건너편의 백록화랑에서 열 수 있도록 주선했다. 성능경은 ‘천 미리 천 미리’라는 작품을 내놓았다. 사방 1000㎜의 천을 50×50㎝의 캔버스에 구겨 넣어 재봉질을 하니 불룩해졌다. 성능경이 김구림을 찾아간 건 딱 두 번에 불과했지만 대학 4년 동안 배운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배웠다는 느낌이 들었다.
1974년 ‘신문: 1974. 6. 1. 이후’라는 작품을 발표했다. 신문을 오려내는 작업이었다. 성능경은 유신체제가 싫었다. 미미하긴 하나 나름의 저항을 작품으로 표현했다. 성능경은 체질적으로 비체제 스타일이다. 비체제는 체제 내적인 존재도, 반체제적인 존재도 아닌 어떤 체제도 구속할 수 없는 체제 바깥의 존재를 말한다. 반체제는 체제가 바뀌면 금방 체제 내적인 존재로 변모한다. 비체제는 언제나 외곽을 맴돌 뿐이다. 성능경은 그러한 자신을 업신여김을 당함이 아니라 ‘없음여김’을 당하는 작가로 규정했다. 무리지음을 거부하는 그에게는 친구가 별로 없었다.
그에게 평생지기가 생겼다. 1979년 성능경은 서동렬을 만났다. 성찬경의 외사촌의 딸이었다. 중매를 본지 한 달 만에 결혼했다. 초등학교 교사인 서동렬은 수입이 별로 없는 성능경과 함께 살면서 네 자녀를 잘 키웠다. 부인의 희생이 컸다. 성능경은 부인에 대해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을 늘 갖고 있다. 성능경은 1981년부터 2009년까지 계원예고 강사를 지냈다. 그게 유일한 수입원이었다. 성능경은 상징소묘라는 특이한 과목을 개설했다. 예고생들은 손놀림이 능숙하다. 상징소묘는 오히려 손을 서툴게 만드는 수업이었다. 젓가락에 잉크를 묻혀 풍경화를 그리게도 했다. 상징소묘는 단순하게 사물을 보고 그리는 차원의 소묘가 아니라 사물에 대한 상상을 넘어서서 상징의 단계로까지 도약시킨 소묘 수업이었다. 영상물을 본 학생들은 아이디어를 채집하고 토론을 한 후 글쓰기를 한다. 그 글을 성능경이 지도한다. 그리고 학생들은 마음대로 그리기를 한다. 손을 서툴게 하는 그만큼 사고력을 증진시키는 수업이었다.
1990년대가 되자 이영철·박신의·백지숙 등 민중미술계열의 평론가들이 그동안 ‘없음여김’을 당하던 성능경을 반체제 작가로 인식하고 주목하기 시작했다. 주목을 받게 되자 성능경은 몸이 아파지기 시작했다. 술을 끊고 북한산 등산과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8년 정도 하니 호흡이 바뀌고 몸이 달라졌다. 몸이 좋아지면서 그의 현장 퍼포먼스가 늘었다. 한 손으로 한쪽 다리를 잡고 머리 위로 올리는 고난도의 자세를 팔십세의 나이에도 거뜬히 해낸다.
성능경은 퍼포머다. 미술가는 미술행위의 결과물인 작품을 팔아서 살아가야 하는데, 퍼포머는 구체적인 결과물이 없다. 당연히 생계가 막막하다. 막막한 삶에 극적인 변화가 왔다. 2023년에는 갤러리현대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그리고 구겐하임에서 열린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에도 참여했다. ‘없음여김’이 아닌 ‘찬란하게 있음’의 작가가 된 것이다.
성능경은 삶과 작업 사이에 경계가 없다. ‘그날 그날 영어’는 배달된 신문의 영어학습난을 오려낸 다음 텍스트를 필기한 종이 위에 꼴라주한 작품으로 1년에 200점씩, 5년 동안 계속하면서 예술, 삶, 공부의 삼위일체를 구현했다. 성능경은 자신의 몸을 신뢰한다. 하나의 인생은 하나의 몸을 갖고 일기일회의 삶을 살아간다. 일기일회의 삶 그 자체가 곧 성능경의 예술이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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