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선데이] 음모론과 직관의 코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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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적 양극화가 음모론 환경 조성
편견 강할수록 음모론에 쉽게 빠져
논리성 따져봐야 별다른 효과 없어
상대 입장에서 보고 공감 끌어내야
」
음모론에 현혹되는 것은 사람이 스스로 생각하는 만큼 이성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의 전후좌우를 살핀 뒤 합리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직관적으로 판단하고 이후 자신의 결정을 정당화할 근거를 합리적으로 추론한다. 음모론을 접하면 이를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의 경험과 정치적 태도 등이 농축된 직관을 사용해 순간적으로 믿거나 무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직관과 합리적 추론의 관계에 대해 심리학자 조나선 헤이트는 코끼리와 그 등에 올라탄 기수의 비유를 동원했다. 거대한 직관의 코끼리가 먼저 판단을 내린 뒤 방향을 틀어 움직이기 시작하면, 합리적인 기수는 코끼리의 행동을 부지런히 변호하고 대변한다는 것이다. 정치적 판단이 얼마나 짧은 순간에 이뤄지는지 잘 보여주는 실험이 있다. 미국 공화당 지지자에게 ‘클린턴’ 다음에 ‘햇빛’이라는 단어를 제시하자 반응 속도가 긍정적 단어 두 개를 연속으로 제시했을 때보다 현격히 떨어진 것이 발견됐다. 공화당 지지자의 입장에서 부정적인 단어를 먼저 접한 뒤 긍정적 단어를 접하자, 직관의 코끼리가 느려진 것이다. 뒤집어 보면 어떤 대상에 대한 정치적 예단과 같은 방향의 정보에 노출될 때 아주 빠르게 이를 받아들인다는 말이 된다. 음모론을 접한 사람들 중 일부가 ‘충분히 그러고도 남지’라고 반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국 정치적 편견이 강한 사람일수록 음모론에 쉽게 빠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음모론이 창궐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은 정치적 양극화다. 필자의 연구팀이 2022년 대선 기간 게시된 뉴스 댓글 3000만 건을 분석한 결과, 정치적 반대편을 모욕·멸시하거나 그들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선동한 사례가 전체 댓글의 절반을 넘어섰다. 이 중에는 상대를 인간보다 저급한 동물, 벌레, 바이러스 등에 비유하거나 물건이나 악마 등 인간성이 없는 존재로 묘사한 사례도 많았다. 이처럼 상대에 대한 부정적 편견이 팽배한 상황에서 심각한 재난 재해가 발생하면 사건의 배후에 정치적 반대편이 있다는 음모론을 아주 쉽게 받아들이게 된다.
다행히 이 거대하고 강력한 직관의 코끼리를 돌려세울 방법이 없지는 않다. 헤이트는 이 난제에 대한 해답으로 기수가 아니라 코끼리에게 직접 호소하는 공감의 자세를 제시한다. 반대편이 펼치는 음모론의 논리성을 따지는 정치적 논쟁은 온갖 기술과 언변으로 무장한 기수와 싸우는 것으로 결코 코끼리의 방향을 바꿀 수 없다. 진정으로 상대의 시각에서 사안을 바라보며 공감할 때만 그의 마음이 열린다는 것이다. 정치적 반대편에 대한 따뜻한 공감으로 직관의 코끼리를 움직여야 음모론의 힘을 뺄 수 있다.
이재국 성균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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