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애 vs 이정은, 50대 여배우 피튀기는 '연기 차력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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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여배우 변신은 무죄
요즘 안방극장에선 50대 여배우들의 연기 변신이 화제다. OTT 넷플릭스와 티빙에서 각각 시리즈 1위를 달리고 있는 ‘돌풍’(넷플릭스 오리지널)의 김희애(57)와 ‘낮과 밤이 다른 그녀’(JTBC)의 이정은(54) 얘기다. ‘낮과 밤’은 넷플릭스 글로벌 톱10에서도 2위로 ‘돌풍’을 바싹 추격중이다. 30여년간 한번도 주인공을 놓쳐본 적 없는 김희애와 만년 조연 끝에 주인공을 꿰찬 이정은의 연기 대결이 ‘차력쇼’ 급이다. 수십년간 상반된 이미지로 고착화된 두 여배우가 각자의 틀을 깨려는 시도도 흥미롭다.
OTT 넷플릭스·티빙서 각각 시리즈 1위
김희애는 30년 넘게 늘 화제작에서 강렬한 여성 캐릭터를 각인시켜 왔다. 90년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던 ‘아들과 딸’에서 남녀차별을 극복하고 성공하는 후남이로 동시대 여성 대다수의 지지를 받으며 톱스타로 떴다. 2000년대 ‘내 남자의 여자’에선 자신의 미덕이던 청순가련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욕망의 화신으로 변신했으며, ‘밀회’(2014)에서 유아인과 20년 연상연하 러브스토리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불륜 남편을 처절히 응징한 ‘부부의 세계’(2020), ‘퀸메이커’(2023)의 냉철한 선거 전략가까지, 시시각각 변화하는 여성상을 대변해 왔다.
‘돌풍’의 정수진은 몇 년 새 안방극장을 점령한 ‘센 언니’ 계보를 잇고 있지만, 남성중심 사회에서 고군분투하며 정의를 대변하는 교조적 캐릭터가 아니라서 차별화된다. ‘퀸메이커’만 해도 권모술수의 달인 황도희(김희애)가 어느날 대오각성하고 부패한 재벌가 사위에 맞서 정의로운 여성 시민운동가를 시장으로 키워냈다. 반면 끝까지 빌런으로 남는 정수진은 억지스런 여성 미화 문법을 벗었다. 전대협 회장 출신 남편 때문에 정경유착에 휘말린 서사가 있고 과거 시위 장면이 반복적으로 나오지만, 구차한 변명은 없다. 그저 살아남으려다 보니 어느새 자신을 고문하던 괴물보다 한술 더 뜨는 괴물이 된 것뿐.
사실 막장드라마에는 더한 악녀가 많다. 정수진이 달라 보이는 건 50대를 훌쩍 넘겨서도 아름다운 여성적 매력으로 승부해 온 김희애의 변신이라서다. 그런데 ‘옴므파탈’의 대명사 허준호처럼 매력적인 악역이 됐는지는 의문이다. 이영미 대중예술평론가는 “미모를 앞세운 멜로적인 연기 안에 머물던 김희애가 최근 들어 정치극에서 복잡한 속내를 가진 사회적인 역할에 도전하고 있어 흥미롭다”면서 “다소 어색하고 불편해 보이는 건 오랜 세월 고착화된 연기 스타일을 벗기 어렵기 때문인데, 머리를 자르고 의상을 바꾸며 강력하게 밀고 나가려 애쓰고 있다. 하지만 악역이라고 독한 면만 있는 게 아니라 능청스런 포용력도 보여줘야 한다. 김희애는 아직도 너무 예뻐서 문제다. 나이 들어 가면서 미모를 버리는 역할에 익숙해져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미진 겸 임순’은 20대와 50대의 몸이 마치 샴쌍둥이처럼 하나의 인격을 나눠 갖는 희귀한 캐릭터다. 웹소설식 로맨틱판타지 코드에 스릴러까지 가미된 플롯이라 아직 정체가 미스터리지만, 분명한 건 외모와 나이에 대한 편견을 깨부수고 있다는 점이다. MZ답지 않게 자기 업무도 아닌 일로 체력고갈이 되면서도 ‘일하니까 행복하다’며 노동을 예찬하기도 하고, 50대라도 젊은 영혼을 유지할 때 매력 있다는 깨달음을 주기도 한다. 어쩌면 50대에 활짝 핀 여배우 이정은의 메타포로도 보인다.
“주연·조연으로 코스 달랐지만 발전적”
이정은의 발자취도 의미 있다. 91년 연극으로 데뷔, 뮤지컬 ‘지하철1호선’ ‘빨래’ 등에서 대체불가 할머니 역으로 입지를 굳혔지만, 봉준호 감독에게 영화 ‘옥자’(2017)의 목소리 연기로 발탁되기 전엔 미디어에 설자리가 없었다. 40대 후반에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2018)의 함안댁, 영화 ‘기생충’(2019)의 문광 같은 개성적인 씬스틸러로 각인되더니, 지난해 어벤저스급 주인공 군단이 나왔던 ‘우리들의 블루스’를 거쳐 ‘낮과 밤’으로 ‘찐’ 주인공이 됐다. 무대에서 그에게 기대하던 욕쟁이 할머니와 미디어에서 기대하던 씬스틸러의 굴레를 모두 벗고 새옷을 입은 셈이다.
김희애와 이정은, 두 사람이 개척하고 있는 길은 50대 여배우의 진화상에 다름 아니다. 과거라면 미모 또는 웃음이라는 하나의 이미지를 고수하다 그 길이 막히면 은퇴할 수밖에 없었던 여배우들이 예전과는 사뭇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이영미 평론가는 “미디어가 그리는 여성 캐릭터가 다양해졌다는 방증이며,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이 다양해진 것도 사실”이라면서 “두 사람의 코스는 전혀 다르지만, 둘 다 발전적이다. 나이 든 여배우들이 단절 없이 각자 어떤 식으로든 살아남을 길을 뚫고 있다는 건 흥미롭게 지켜볼 만한 대목”이라고 말했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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