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PECIAL REPORT - 중앙SUNDAY·한국심리학회 공동 기획<하> “안녕하세요. 어떻게 오셨나요.”
복도에서 만난 한 남성이 먼저 말을 건넸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의 시선에 잠시 머뭇거린 뒤에야 “약속이 있어 왔다”고 답했다. 조금 뒤 정미향 고양시 정신건강복지센터 부센터장을 만나 “전혀 뜻밖이었다”며 당시 분위기를 전하자 그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상황을 설명했다. “조현병이 있는 분인데 여기서 안내원으로 일하는 중입니다. 그분에겐 일이 최고의 약이죠.”
중앙SUNDAY는 지난 2주간 정신질환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온 당사자와 이들의 회복을 돕는 상담·치료사를 두루 만났다. 정부가 이번 달부터 ‘전 국민 마음 투자 지원 사업’을 본격 시행하는 것을 계기로 한국심리학회와 공동으로 심층 설문조사를 실시한 데 이어 위기 극복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국민 정신건강 문제 해법을 모색해 보려는 취지에서였다.
그들의 경험담을 모아 보니 조현병, 자살 사별, 알코올 의존, 은둔·고립, 스트레스 질환 등 다양한 원인과 증세만큼 탈출구도 제각각 달랐다. 조현병 안내원처럼 누구는 일이 약이었고 또 누구는 말이 약이었다. 어떤 이들에겐 쉼과 휴식이, 맛난 음식이, 땀과 운동이 큰 힘이 되기도 했다. “일하고, 말하고, 잘 먹고, 땀 내자.” 방식은 서로 조금씩 달랐지만 그 안에도 공통분모는 존재했다. 바로 ‘함께’라는 단어였다. 사회적 편견을 딛고 일상으로 복귀하길 갈망하는 그들의 치료·회복 분투기를 중앙SUNDAY가 들어봤다.
━ “속내 툭 털어놓고 나니 희망이 다시 보였죠…혼자서 숨지 말아요”
“정신질환도 다른 병처럼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다만 혼자서는 어렵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정하(53)씨도 24년 전 조현병 진단을 받았다. 온종일 망상과 환청·환각에 휘둘렸지만 각고의 노력 끝에 이젠 거의 회복됐고, 지금은 우리나라 첫 정신장애인 인권 단체인 ‘파도손’의 대표를 맡고 있다. 화가로 활동 중인 그는 미술을 통해 정신질환자들의 회복도 돕고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온 그 또한 “일이 약”이라고 강조했다. “먹는 약도 일시적 도움은 줄 수 있죠. 이에 비해 약이 되는 일은 일상생활을 지속하는 가운데 자신감을 되찾게 해준다는 점에서 훨씬 효과가 큽니다.”
정미향 고양시 정신건강복지센터 부센터장은 현재 안내 데스크에 일하는 남성이 10여 년 전 센터를 찾아와 조현병 심리 상담을 받던 순간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우울·불안·스트레스 등 정신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상담과 치료의 문턱을 넘어가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상담받는 것만으로도 ‘정신병 환자’로 취급받을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이죠. 하지만 이 남성은 그 문턱을 넘을 용기를 낸 덕분에 지금의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한국인의 정신건강 서비스 이용률은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크게 낮은 실정이다. 2022년 보건복지부 국립정신건강센터 자료에 따르면 캐나다가 46.5%, 미국이 43.1%인 데 비해 우리나라는 12.1%에 불과한 실정이다. 자살 유족 커뮤니티 ‘미고사’의 심소영 상담사는 “모든 정신질환은 ‘이 정도는 괜찮겠지’라며 무시하는 순간 심각해지기 쉽다”며 “신체적으로 위급한 상황일 때 심폐소생술(CPR)이 필요하듯 정신건강도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전문가 상담도 아침마다 복용하는 비타민처럼 마음의 영양제라고 생각하고 부담 없이 받아보는 게 좋다는 얘기다.
전문가 상담 ‘마음의 영양제’로 여겨야 강원영(가명·32)씨는 자살 사별자다. 6년 전 친동생이 목숨을 끊었다. 이후 세상과 거리를 두고 살던 그는 “김밥 한 줄이라도 같이 먹자”는 친구의 말 한마디에 이끌려 ‘자조 모임’에 나간 뒤 삶의 활력을 되찾게 됐다. “말을 한다는 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될 수 있는지 절실히 깨달았죠. 처음엔 벽을 치는 느낌도 들지만 거기서 주저하면 안 돼요. 상대방을 믿고 마음속 작은 아픔이라도 털어놓을 때 비로소 희망이 보이게 됩니다.”
비슷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거나 강씨처럼 애도의 과정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속내를 털어놓고 서로를 위로하는 자조 모임은 ‘회복’이란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누구는 사별 직후에, 누구는 1~2년이 지난 뒤 자조 모임을 찾는다. 이처럼 사람마다 애도의 과정과 시간이 다른 만큼 이곳에선 ‘사별’보다 ‘믿음’이 더 큰 공통분모가 된다. 그렇게 아픔과 상처를 솔직히 드러내면서 잃어버린 희망도 다시 찾고 있다.
지난 4일 서울시 자살예방센터. 자조 모임 ‘자작나무’에 자살 사별자들이 모였다. 특이한 건 이들 대부분이 ‘동료지원가’라는 점이었다. 애도 중이거나 충격에서 회복한 각자의 경험을 살려 동료 사별자들을 상담해 주는 이들이다. 동료지원가 손지연(61)씨는 “11년 전 아들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 동료지원가를 만났는데 같은 고통을 겪어서인지 내 마음을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해 주더라”며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나도 회복되면 동료들을 도와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정희 서울시 자살예방센터 유족지원팀장도 “공감도가 높다 보니 일반 상담사보다 훨씬 더 위로가 된다는 반응이 적잖다”고 전했다.
지난달 30일 오후 10시. 일요일 늦은 밤이었지만 컴퓨터 화면 속에선 고립·은둔 청년들의 대화가 쉴 새 없이 오갔다. 이렇게라도 말을 주고받으며 세상 밖으로 나와보려는 작은 몸부림이었다. ‘펭귄의 날갯짓’이란 이름의 온라인 자조 모임이 대화 시간을 이때로 정한 건 지난 한 주 동안에도 힘겨운 도전을 이어온 서로를 격려해 주기 위해서였다.
가입 2개월째인 박인경(27)씨는 자립준비청년이다. 보육원이나 위탁보호시설에서 지내다 만 18세가 되면 홀로 세상과 마주해야 하는 이들이다. 그러다 보니 10명 중 1명은 고립·은둔 경험이 있고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는 경우도 46.5%로 일반 청년보다 네 배나 높은 실정이다. 박씨는 “취업도 쉽지 않다 보니 어느새 은둔 상태에 빠지게 되더라”며 “이렇게라도 ‘말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모른다”고 털어놨다.
“말할 수 있는 공간, 얼마나 큰 기쁨인지…”
일산에 사는 허모(60)씨는 한때 알코올에 빠져 살았다. 흔히 알코올 중독으로 불리는 ‘알코올 의존증’도 심각한 정신질환 중 하나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인구의 12%는 금주가 필요한 알코올 남용 이상의 단계로 분류되면서 정부도 알코올 중독자 치료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처음엔 하루 반병으로 시작한 게 매일 인사불성이 되자 사람들도 하나둘 떨어져 나가더라고요.” 그랬던 허씨는 고양시 중독관리통합지원센터에 찾아가 상담을 받은 뒤 13년째 술을 끊고 있다. 그의 금주 성공 비결은 뭐였을까. “일단 허기를 느끼지 않게 잘 먹어야 해요. 기왕이면 맛있는 걸로요. 허기를 느끼면 욕심이 생기고, 그러면서 마음의 고요가 깨지게 됩니다.” ‘잘 먹어야 한다’를 해법으로 제시한 그가 한마디 덧붙였다. “절대 혼자서는 성공하기 어려워요. 상담이든, 모임이든 주변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힘들기는 전문 심리상담가들도 마찬가지다. 매일 정신질환자들과 대화하며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그 누구라도 스트레스에 노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저희도 사람이고 직장인인데, 온종일 감정을 주고받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지치기 십상이죠.” 정 부센터장이 동료 상담사들에게 권하는 스트레스 해소법은 ‘땀내고, 잘 쉬자’였다. “땀이 날 정도로 운동하고, 시간 날 때마다 푹 쉬고. 정신건강엔 육체의 회복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고선규 한국심리학회 자살예방위원장은 “정신질환은 우울·불안·스트레스·공황장애·번아웃 등 범위가 넓고 구분도 모호한데다 중증과 경증을 뚜렷하게 진단하기 힘든 경우도 많다”며 “증세가 다양한 만큼 회복을 위한 지원 방식도 한층 세분화·전문화될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강민정 한국과로사·과로자살유가족 모임 대표는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은 물론 민간 분야의 상담·치료 서비스가 보다 활성화돼야 하고 환자와 전문가들이 소통할 수 있는 사회적 관계망도 한층 확장돼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