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물리친 푸줏간집 딸…역경이 그를 키웠다
커털린 커리코 지음
조은영 옮김
까치
화이자의 코로나19 백신 개발에 기여한 공로로 지난해 노벨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한 커털린 커리코의 자서전이다. 수상자로 선정되기 전에 출간됐다. 업적 자랑이 아닌, 한 과학자가 걸어온 돌밭길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지은이의 직함은 길다. 화이자 백신을 개발한 바이온텍(국내 언론에선 바이오엔텍으로, 독일에선 비온텍으로 표기)의 수석부사장이자 헝가리 세게드대 교수, 그리고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페렐만 의과대학 겸임교수다. 이 책은 화려한 직함의 그늘에 숨은 실험실의 고독과 가시밭길, 그리고 열정을 담았다.
지은이는 과학계 변방인 전령RNA (mRNA)를 평생 연구한 개척 과학자, 사회주의 헝가리에서 자본주의 미국으로 옮긴 이주 과학자, 그리고 여성이자 엄마로서의 삶을 날 것 그대로 고백한다. 결과에 대한 자랑이 아니라 과정의 기록이라는 데서 눈길이 간다.
연구비가 넘치고 기초 연구에도 정성을 쏟는다는 미국에서도 실적과 유망 분야 선호에선 예외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연구하던 펜실베이니아대에서 쫓겨나다시피 모교인 헝가리의 세게드대로 건너간 이유다. “과학의 역사는 뛰어난 아이디어를 비웃은 아주 똑똑한 사람들의 역사로 가득차 있다”는 지은이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유다. 하지만 이러한 고난도 mRNA로 인류를 구할 치료제를 만들겠다는 지은이의 신념과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과학자로 살기로 결심한 결정적인 계기는 한 명의 선생님과 두 편의 편지와 한 권의 책, 그리고 한 편의 시리즈 드라마였다. 고교시절 생물 교사였던 얼베르트 토트 선생님은 헝가리 출신의 미국 생화학자로 1937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얼베르트 센트죄르지를 소개했다. 비타민C를 분리하고, 산소호흡 생물이 에너지를 얻는 생화학반응회로(나중에 ‘크레브스 회로’로 알려졌다)를 연구한 공로였다.
지은이는 주소를 ‘얼베르트 센트죄르지. USA’라고만 적은 편지를 보냈다. 놀랍게도 몇 달 뒤 센트죄르지는 자신의 최신 저서와 함께 ‘열정적인 과학 꿈나무들에게’로 시작하는 답장을 보내왔다. 지은이는 그 ‘과학 꿈나무’가 자신이라고 확신하며 과학자를 꿈꾸기 시작했다.
토트 선생님으로부터 내분비학자 한스 셀리에가 쓴 『생명의 스트레스』라는 책을 소개받고 읽은 뒤 스트레스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키웠다. 스트레스는 자신이 어떻게 지각하고 대응하느냐에 따라 자신을 해칠 수도, 도울 수도 있다는 믿음은 평생 그를 견디게 해준 힘이 됐다.
독특한 것은 공산국가 헝가리에서도 인기를 누린 피터 포크 주연의 미국 드라마 ‘형사 콜롬보’가 삶의 중심을 잡아줬다는 사실이다. “한 가지만 더요”라는 콜롬보의 대사는 과학연구에 관한 신념체계를 형성하는 장작이 됐다. 단조로운 작업의 연속인 실험을 통해 축적한 데이터가 한 방향을 가리키면 그걸로 일을 끝내고 싶은 유혹이 있다. 하지만 지은이는 실험은 정확성이 생명이라며 ‘한 가지만 더’를 외쳐왔다. 인내심을 가지고 변수를 바꾸고 기대하는 바를 검증하면서 진리에 더욱 가깝게 접근하는 태도를 유지해왔다.
지은이의 고교시절 성적표에는 F라는 표시가 있었다. 미국식 F학점이 아니라 헝가리어로 육체(fizikai)의 머릿글자로, 부모가 육체노동자라는 뜻이었다. 중요한 것은 지은이가 사회주의 체제에서 노동자 계급의 자녀에게 제공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무진장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지은이는 “괜찮은 학생이 아니라 뛰어난 학생이 되려고 끊임없이 공부했다”고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우리의 뇌는 연습하면 그만큼 강해진다”는 믿음에 따라 행동했다고 한다.
지은이의 어린 시절도 흥미롭다. 헝가리 농촌에서 푸줏간을 하는 아버지와 책을 좋아하는 약국 근무자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방 하나짜리 흙벽 집에서 언니와 함께 자랐다. 톱밥 난로 하나로 겨울을 지냈고 공동수도에서 길어온 물을 마셨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환경이 아니었다. 훈제 중인 소시지에서 떨어지는 기름을 모아 탄산나트륨과 섞어 만든 비누로 목욕과 빨래를 했는데, 지은이는 비누를 만들어주던 동네 아주머니를 ‘난생 처음으로 만난 생화학자’라고 했다. 텃밭에 감자잎벌레라는 해충이 번지자 이를 일일이 잡아 키우는 닭에게 모이로 던져주면서 먹이사슬을 ‘선행 학습’했다. 지은이는 이처럼 일과 놀이가 구분되지 않고 뒤엉킨 어린 시절의 경험이 자신을 과학자의 길로 준비시킨,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라고 회상했다.
지은이의 삶을 보면 사람의 미래를 좌우하는 것은 주어진 상황이 아니라 이를 대하는 개인의 자세와 행동이라는 믿음이 생긴다. 원제 Breaking Through: My Life in Science.
채인택 전 중앙일보 전문기자 tzschaei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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