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지각사회

김태훈 논설위원 2024. 7. 12.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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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고려 후기 문신 우탁의 시조 ‘탄로가(嘆老歌)’는 짧은 인생과 이른 노화를 안타까워하는 작품이다.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 했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라고 했다. 실제로 근대 이전엔 노화가 지름길로 왔다. 한 역사학자가 고려 시대 묘비명 수백개에 적힌 생몰년 등을 근거로 평균수명을 추론해보니 39.7세였다. 죽기 전에 사람 구실 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10대 후반에 결혼해 아빠·엄마 되고 30대에 손주를 봤다.

▶한 단체가 몇 해 전 고조부모와 손자녀가 함께 생존하는 ‘5대 가족 찾기’ 행사를 열었다. 평균수명 80대인 장수 시대이니 사례가 많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전국에서 22가족만 나왔다. 만혼과 늦은 출산이 이유였다. 조사 당시 한국의 초혼 연령은 이미 서른을 넘겼다. 지난해 한국 여성의 첫 출산 연령은 33세였다. 늦게 결혼하고 늦게 아이를 낳으니 수명은 늘어도 3대 가족으로 사는 현상은 그대로인 것이다.

▶한국은 취직·결혼·출산이 모두 늦은 지각 사회다. 그로 인한 변화를 해부하는 기획 연재가 조선일보에 실리고 있다. 40대에 결혼 청첩장을 돌리고, 입사 초년에 가던 육아휴직을 부장이 되어 떠나는 낯선 풍경이 펼쳐진다. 출산도 늦어져 40대 여성 출산율이 20대 초반 여성의 두 배가 됐다. 환갑이 되어도 고교생 자녀 학자금을 버느라 은퇴를 못 한다. 실제로 2006년부터 60대의 경제활동 참가율이 20대 초반보다 높아졌다. 지각 사회가 한국인의 인생 시계를 바꾸고 있다.

▶구글은 500세까지 사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늙은 몸으로 오래 버티는 게 아니라 노화 세포를 없애 젊은 몸으로 오래 사는 길을 찾는다고 한다. 실현되면 인생 시계가 완전히 달라진다. 쉰 살까지 부모 밑에 있다가 환갑에 결혼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50세가 청년 취급 받고 65세가 노인으로 보이지 않게 되리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지각 사회가 된 이유로 취업난이 꼽히지만 수명 연장도 큰 이유다. 한국은 내년에 인구의 20%가 65세 이상인 초고령사회에 진입한다. 우리보다 먼저 그 길에 들어선 일본은 그로 인해 빚어지는 변화를 ‘저속사회’화로 받아들인다고 한다. 자녀의 취직이나 결혼이 늦어져도 초조해하거나 자녀를 닦달하지 않는다. 대신 부모가 전보다 건강하게 현장에서 뛴다. 복지를 비롯한 사회 시스템과 삶을 대하는 가치관도 그에 맞춰 바뀌고 있다.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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