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마이너스의 손으로 살며

2024. 7. 12.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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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의 어느 날, 나는 집 현관의 한쪽 벽을 빨간 페인트로 칠했다.

미국 드라마에서 실연 당한 인물이 침실 벽을 피처럼 새빨갛게 칠하는 것을 보고 나도 시도해본 것이다.

다행히 함께 사는 가족이 나의 기벽을 이해해주어 해괴한 현관 벽도 참아주었지만, 이따금 손님이 방문할 때면 그 우둘투둘한 자색고구마빛 벽을 보며 의문을 표했다.

손대는 것마다 황금으로 바꿔놓는 신화 속 '미다스의 손'에서 파생된 말로, 손대는 것마다 망가뜨리는 참으로 손재주가 없는 사람, 그게 바로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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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깔끔한 손재주 없어
페인트칠로 집안벽 망치고
새옷 태워먹는 좌충우돌에도
부족함 채워주는 타인 덕에
도움주고 받는 삶 의미 깨닫다

20대의 어느 날, 나는 집 현관의 한쪽 벽을 빨간 페인트로 칠했다. 미국 드라마에서 실연 당한 인물이 침실 벽을 피처럼 새빨갛게 칠하는 것을 보고 나도 시도해본 것이다. 당시 내 방의 벽면은 가구들로 가로막혀 있어서 나는 앞이 트인 현관 쪽 벽을 바꿔보기로 했다. 도배지를 뜯어내고, 콘크리트 면에 석고를 바른 다음 그 위에 색을 칠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가 호기롭게 꾸민 벽은 드라마 속 파격적이고 세련된 실내장식과 거리가 멀었다. 석고를 고르고 평평하게 펴 바르지 못했고, 색도 환한 붉은 톤이 아니었다. 흰색과 검정 페인트를 섞어 명도를 조절해보라는 동네 페인트 가게 사장님의 조언에 휩쓸려 나는 그만 내가 목표한 색조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벽은 이도저도 아닌 우중충한 팥색. 다행히 함께 사는 가족이 나의 기벽을 이해해주어 해괴한 현관 벽도 참아주었지만, 이따금 손님이 방문할 때면 그 우둘투둘한 자색고구마빛 벽을 보며 의문을 표했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사촌 동생은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웃음을 참는 얼굴로 나에게 묻는다.

"근데 누나, 대체 그때 벽을 왜 그렇게 해놓은 거예요?"

이른바 마이너스의 손. 손대는 것마다 황금으로 바꿔놓는 신화 속 '미다스의 손'에서 파생된 말로, 손대는 것마다 망가뜨리는 참으로 손재주가 없는 사람, 그게 바로 나이다. 설거지할 땐 그릇을 깨뜨리는 일이 잦고, 뭔가를 말끔하게 자르거나 붙이는 일엔 젬병이며, 설명서를 찬찬히 읽지 않는 부주의한 성격 탓에 작동법을 모르는 기계도 일단 전원 버튼을 켜고 본다. 그러나 이런 나에게도 남들이 칭찬하는 장기가 있다.

바로 옷을 다리는 일. 구깃구깃한 천이 재봉선을 따라 반듯하게 펴지는 걸 보면 덩달아 내 기분도 좋아져서 나는 자청해 식구들의 옷을 다려주곤 했다. 몇 년 전, 형부가 결혼 후 처음으로 집에 왔을 때도 그랬다. 나는 내 셔츠를 다리는 김에 형부의 바지도 다리미판에 놓고 쓱쓱 문질렀다. 그 옷은 얇고 까슬까슬한 섬유에 옅은 물빛이 도는 여름 바지였다. 결혼 예복과 함께 신부 측에서 선물한 옷, 딱 한 번밖에 안 입은 값비싼 그 옷을 그날 내가 태워먹었다. 더 완벽하게 바지의 솔기 선을 세우려는 나의 과욕이 화를 부른 것이다.

어찌하여 내 손은 중요한 날에 소중한 옷을 골라 홀라당 태워먹는 걸까. 한 잡지사의 인터뷰를 앞둔 어느 날 연인이 나에게 새 옷을 사주었다. 인터뷰 전날 밤 나는 공들여 그 옷을 다림질했다. 스팀 버튼을 누르고 분무 기능도 쓰면서 다림판의 열기를 조절했지만, 내가 잠깐 손목에 힘을 꾹 준 사이 마치 금이 간 것처럼 섬유에 가느다란 구멍이 생겼다. 그나마 팔 뒤쪽 부분이라 옷을 입을 순 있었지만, 다리미는 연기를 내뿜으며 고장이 나버렸다. 이럴 수가, 정작 구김이 심한 셔츠 깃은 펴지도 못했는데!

당장 새 다리미를 살 수도 없고, 다음날 아침부터 먼 거리에 있는 세탁소로 뛰어가는 것도 버거워서 나는 구김살이 있는 그대로 옷을 입기로 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연인이 좋은 방법을 찾았다며 냄비에 물을 끓였다. 바닥이 판판한 스틸 냄비를 가스 불에 달군 뒤 마치 인두처럼 옷에 대고 자분자분 문질렀다.

"오, 펴진다, 펴지고 있어!"

그날 나는 연인의 도움으로 무사히 일정을 마쳤다. 그래, 나의 두 손이 마이너스면 어떤가. 그 모자란 손을 잡아주는 따듯한 손길이 있는데. 어쩌면 그렇게 한 사람의 손만으로는 다 채울 수 없기에 우리는 다른 이와 손을 맞잡는 게 아닐까. 앞서가는 의욕에 못 미치는 서툴고 투박한 나의 손. 나는 그 부족함으로 나에게 다가온 이들의 마음을 더욱 귀하게 받아들인다.

[김멜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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