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중 앞장서는 필리핀 대통령의 속내[가깝고도 먼 아세안](33)

2024. 7. 12.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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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반중 시위를 벌이는 시위대 /todaienglish.com


중국과 필리핀의 남중국해(필리핀 서해) 영토 분쟁이 격화되고 있다. 중국 해경이 필리핀 해안경비선을 가로막고 물대포를 쏘며 경비정 선체로 직접 충돌해 필리핀 해경과 해군이 다치는 일들이 연달아 벌어졌다. 지난 7월 초에는 칼과 도끼를 든 중국 해경들이 필리핀 해군 보급선의 진로를 방해하고 장비를 파괴했다. 이 과정에서 필리핀 해군의 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앞서 중국은 지난 6월 15일부터 자신들이 영유하는 남중국해 해역에 진입하는 외국인과 외국 선박을 최장 60일간 구금하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이에 미국, 호주, 일본, 인도 등 반중국을 표방하는 쿼드(QUAD) 4개국은 중국을 맹비난하고 필리핀에 다양한 군사지원을 시작했다.

이미 미국은 지난 4월, 중국에 가까운 필리핀 북부 루손섬에 SM-6 요격미사일과 토마호크 순항미사일을 배치했다. SM-6 요격미사일의 사거리는 450㎞로 탄도미사일 요격은 물론 중국 함정까지 공격할 수 있고, 토마호크 순항미사일의 사거리는 2500㎞로 대만해협과 중국 동남부 지역까지 타격할 수 있다. 적은 국방 예산으로 전투함이 부족한 필리핀으로서 남중국해에서 중국 해군과 싸울 수 있는 긴요한 무기들이다.

인도는 러시아와 공동개발한 사거리 290㎞의 극초음속 미사일 브라모스를 필리핀에 수출했다. 브라모스 미사일은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으며, 마하 3의 빠른 속도로 수면 위를 낮게 비행해 탐지하기가 어렵다. 중국 해군이 쉽게 필리핀에 접근할 수 없게 만드는 무기다. 호주는 지난해부터 미국, 필리핀과 함께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하고 필리핀과 남중국해 해상-공중 합동 순찰을 진행하고 있다.

일본은 2022년 6월 차관 형태로 필리핀에 97m 길이의 해안경비정 2척을 제공했고, 이번에 5척을 추가로 제공하기로 했다. 애초 2016년 협의에 따라 44m 경비정 10척을 제공하기로 했으나 필리핀이 중국에 일방적으로 당하자 크기가 2배가 넘는 대형 경비정을 제공하기로 한 것이다. 일본은 여기에 한 발 더 나가서 지난 7월 8일 필리핀과 상호접근협정(RAA)을 맺었다. 일본 자위대가 필리핀군과 합동군사훈련을 할 수 있고, 유사시 파병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남중국해 분쟁을 둘러싼 각국 속내


일본은 <2022년 방위백서>를 통해 ‘5년 내에 국방 예산을 2배로 늘리겠다’고 선언했다. 동중국해-남중국해에서 중국의 위협과 북한의 미사일 위협,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국제 안보 변화를 이유로 들었다. 전범국가로서 변변한 군대를 조직하지 못하는 일본이 중국의 급성장에 위기를 느낀 미국에 면죄부를 받아 군사 대국으로 부활하려는 것이다. 일본은 평화헌법을 통해 전쟁을 포기하겠다는 약속을 ‘반중국’이라는 명분과 미국의 적극적인 침묵으로 정당화하고 있다. 여기에 이번 필리핀과 체결된 상호접근협정(RAA)을 통해 필리핀이 중국의 공격을 받으면 얼마든지 참전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미국은 아세안 내에서 확실한 반중 국가 연합을 형성하고 싶어한다. 아세안 10개국 중 중국이 ‘운명공동체’라 부르는 친중 국가는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태국 4개국이다. 미국이 오랜 공을 들이며 반중 최전선에 내세우고 싶었던 베트남은 지난 6월 러시아 푸틴 대통령을 국빈 초청하면서 ‘중국은 견제하되 그 누구와도 싸우고 싶지 않다’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주간경향 1585호 ‘러시아를 버리지 못하는 베트남’ 참조). 미국의 오랜 우방이었던 필리핀은 전임 두테르테 대통령의 적극적인 친중 정책으로 미국과 갈등을 빚어왔다. 확실한 ‘아세안 반중연합군 확보’라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미국은 마르코스 대통령 당선을 계기로 필리핀을 다시 붙잡았다. 2014년 맺은 방위협력확대협정(EDCA)을 근거로 2023년 2월 필리핀 정부와 협상해 이용할 수 있는 필리핀 내 군사기지를 5곳에서 9곳으로 늘렸다.

지난 4월 11일(현지시간) 첫 정상회의를 연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가운데),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오른쪽), 페르디난도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 / AFP연합뉴스


가문 재건을 위해 반중국 정책을 펼치는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


2022년 6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가 필리핀의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의 아버지 마르코스 시니어는 1965년부터 1986년까지 필리핀을 통치했던 독재자로서 인권 탄압, 고문, 살인 등으로 필리핀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100억달러(약 13조8000억원) 넘는 금액을 부정 축재했다. 마르코스 시니어의 부인 이멜다가 소장한 명품 구두 3000켤레는 전 세계적으로 사치의 상징이 됐다. 마르코스 시니어는 1986년 필리핀의 민주화 운동인 ‘피플 파워 혁명’으로 축출되고 미국 하와이에서 망명 생활을 하게 된다. 이후 필리핀 정부의 부정 축재 재산 반환 소송과 피해자들의 피해 보상 소송은 미국 하와이 지방법원에서 진행됐다. 이 과정에서 마르코스 집안은 법정 모독으로 하루에 10만달러 벌금형을 받는다. 하지만 벌금을 끝까지 내지 않은 채 필리핀으로 돌아왔고, 마르코스 집안의 벌금은 3억5300만달러(약 4900억원)로 불어났다. 마르코스 주니어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미국 거주 필리핀인들은 마르코스 주니어가 미국 땅에 발을 딛는 순간 감옥에 갈 것으로 전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22년 6월 9일자 ‘뉴스위크’에 따르면 그해 필리핀을 방문한 미 국무부 차관 웬디 셔먼은 ‘마르코스가 대통령이 된 후 미국에 입국하더라도 외교적 면책권에 따라 체포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인해주었다. 마르코스가 전임 대통령인 두테르테와 확연히 다른 반중 정책을 취하게 된 것은 바로 이 ‘반중 정책을 조건으로 미국으로부터 권력의 정당성’을 부여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마르코스는 적극적인 친중 노선을 취했던 두테르테 전 대통령과 정치적인 동맹관계였기 때문에 마르코스가 대통령이 돼도 친중 노선을 이어갈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마르코스가 반중 노선을 취하면서 ‘조국의 영토를 강탈하는 중국과 맞서 싸우는 지도자’라는 이미지로 독재자의 아들이라는 오명도 씻어낼 수 있게 됐다.

필리핀 전 국민의 시선이 반중으로 집중된 사이 마르코스는 6년 단임제인 필리핀 대통령제도를 중임제 또는 의원내각제로 바꾸려 하고 있다. 20년간 독재를 해온 독재자의 아들이 헌법을 고쳐 권력을 연장하려고 하니 필리핀 시민사회에서 반발이 극심하다. 하지만 마르코스에게는 미국이라는 뒷배경과 중국이라는 외부의 적에 대항하며 똘똘 뭉친 민심이 버티고 있다. 반중 노선으로 미국을 등에 업고 가문의 영광도 되찾고 권력도 확고히 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앞뒤 안 보고 달리는 반중 노선으로 필리핀에는 전쟁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있다.

호찌민 | 유영국 <베트남 라이징>·<왜 베트남 시장인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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