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NA에 미친 여자" 능멸 견디고 인류를 구한 커리코의 '돌파하는 인생'

권영은 2024. 7. 12.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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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커털린 커리코 '돌파의 시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 회고록
무시·홀대에도 mRNA 연구 고집
"가능성 믿어" 팬데믹 종식 기여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유펜) 의과대학 연구실에서 "메신저리보핵산(mRNA)에 미친 여자" 소리를 들으면서도 관련 연구를 고집했던 당시 커털린 커리코의 모습. 노벨위원회 제공

이민자 출신의 학계 아웃사이더, 엄마인 여성 과학자. 겹겹이 둘러쳐진 장벽을 쳐서 깨뜨려 뚫고 나아간 돌파의 순간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50대까지 교수 자리를 얻지 못해 연구실에서 쫓겨나고, "메신저리보핵산(mRNA)에 미친 여자"로 괄시받던 헝가리 출신 과학자 커털린 커리코(69)의 영화 같은 이야기다.

커리코의 회고록 '돌파의 시간'이 나왔다. "연이은 좌절이 마침내 비범한 돌파의 순간으로 마침표를 찍는다"는 해피엔딩은 우리도 잘 안다. 그는 세계 최초로 mRNA를 이용한 코로나19 백신 개발에 기여해 팬데믹에서 세상을 구했다. 미국의 면역학자 드루 와이스먼(65)과 2023년 노벨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돌파의 시간·커털린 커리코 지음·조은영 옮김·까치 발행·388쪽·1만8,000원

"한 가지만 더"… 연구 앞에서 포기란 없다

커리코의 삶은 일류나 기득권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1955년 헝가리의 작은 도시 솔노크에서 푸줏간집 딸로 태어났다. 가족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았다. 커리코는 두뇌가 특출나기보단 "그냥 괜찮은 정도"였다고 돌이킨다. 평범한데 비범했다. 꾸준함과 성실함도 재능이라고 친다면 말이다. 그는 타고난 재능이 부족하면 노력으로 대신할 수 있다고 믿었다. "또 하고, 또 하고, 한 가지만 더, 한 번만 더" 정신으로. 고교 시절 즐겨 본 미국 드라마 '형사 콜롬보' 속 주인공의 명대사 "한 가지만 더요"를 평생 마음에 품었다.

헝가리 명문 세게드대 생물학과를 졸업하고 박사 학위를 딴 커리코는 7년간 일한 생물학연구소(BRC)에서 연구비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계약 종료'를 당했다. 공산당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던 그의 아버지 영향인지는 알 수 없다. 커리코는 포기하지 않았다. 1985년 미국행을 결단했다. 전 재산 1,200달러(약 165만 원)를 두 살배기 딸 수전 프랜시아의 인형 뱃속에 몰래 넣고 떠난 일화는 유명하다. 수전은 미국 조정 국가대표가 돼 2008년과 2012년 올림픽 금메달을 따면서 엄마보다 먼저 이름을 날렸다.

헝가리 출신 과학자 커털린 커리코의 벽화가 2021년 8월 31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한 아파트 외벽에 그려져 있다. 부다페스트=EPA 연합뉴스

추방 위협에 연구실 빼앗겨… 결국 빛 본 mRNA

이방인에 머물렀던 미국 생활은 고달팠다. 커리코는 미국의 유명한 생화학자 로버트 수하돌닉의 템플대 연구실에서 mRNA 연구를 재개했다. 존스홉킨스대로 이직하려 하자 "미국에서 추방당하게 만들겠다"는 수하돌닉의 협박을 받았고, 우여곡절 끝에 국립군의관 의과대학 연구실로 옮겨 월요일 새벽 출근-금요일 밤 퇴근을 반복했다. 그러나 커리코는 그만두지 않았다.

펜실베이니아대(유펜) 의과대학에 새로 생긴 심장의학 연구소에서 커리코는 20여 년을 버텼다. 의사들 사이에서 겉돌면서도 "배움의 기회로 삼고자" 했다. 하지만 DNA가 아닌 RNA는 학계의 관심 밖에 있었다. 연구비도 따지 못했다. 교수 자리에서 쫓겨나는 수모도 당했다. "이 연구가 아직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정말로 대단한 아이디어가 될 거야." 그는 포기를 몰랐다.

교내 복사기 앞에서 와이스먼과 우연히 만난 건 커리코 연구 경력의 전환점이었다. 두 사람은 코로나19 백신의 토대가 되는 주요 발견을 2005년과 2008년 잇따라 내놓았지만 학계 반응은 싸늘했다. 커리코는 2013년 유펜을 떠나 독일 생명기업 바이온텍으로 옮겼다. 두 사람의 mRNA 연구가 빛을 본 건 2020년 코로나19 대유행 때였다.

2023년 노벨생리의학상을 공동수상한 커털린 커리코(오른쪽)와 드루 와이스먼.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제공

무명의 전업 연구자… 여성과학자 고뇌도 곳곳에

커리코는 끝까지 RNA의 가능성을 의심하지 않고 매달렸다. 다섯 살 연하 남편 벨러도 그를 굳건히 지지했다. "네 일이 가장 먼저야. 그래도 돼." 결혼한 헝가리 여성은 남편의 성으로 이름을 바꾸는 게 관례이지만 커리코는 커리코로 남았다. 결혼 이후 쭉 커리코는 전업 연구자였고, 벨러가 주양육자로 육아와 살림을 맡았다.

"원래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작고 성가신 생명체에게 아무런 끌림도 느끼지 않았다"던 커리코는 수전을 품에 안은 후 "내가 아기에 대해 했던 말들은 다 잊어달라"고 정정한다. 헝가리 유급 공휴일에 출산하고는 "아기와 실용적인 출발"을 해서 정말 좋았다는 그는 '수준 높고 저렴한 보육 시설'을 워킹맘을 위한 필수조건으로 꼽았다. "엄마가 된다는 것과, 아기 앞에서 자기 이름과 정체성을 가진 독립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절대 양립할 수 없는 일일까"라는 고민도 한다.

책은 과학자답게 군더더기 없는 문체로 쓰였다. 그래서 더 흡인력이 있다. 역자인 조은영은 번역 후기에서 "노벨상 수상으로 저자의 인생이 완성됐다고 생각한 게 부끄럽다"고 했다. 커리코는 지난해 10월 세게드대 교수로 부임했다. mRNA로 더 많은 질병을 극복할 수 있도록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서다. 또 한 번의 '계속'이다. 그는 독자들에게도 당부했다. "멈추지 말아라."

권영은 기자 you@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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