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의 도발] 대통령 부인의 귀신 같은 정무감각
일련의 ‘김 여사 문자 사태’를 눈이 빠지게 들여다보았다. 20년 전 TV사극 ‘여인천하’를 다시 보는 기분이다.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의 디올백 논란이 뜨거웠던 1월 한동훈 당시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감히 김 여사의 문자를 읽씹 했고, 그래서 김 여사가 디올백 관련 사과를 못 했으며, 그 여파로 여당이 총선에서 대패한 게 아니냐는 논란이 나라를 들었다 놨다 할 일인가.
진중권 광운대 특임교수의 10일 등장은 드라마틱한 반전이었다. 4·10총선 직후 김 여사가 전화를 걸어와 57분간 통화했다며 페이스북에 이렇게 밝힌 거다. “(김 여사는) 대국민 사과를 거부한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으며, 그 그릇된 결정은 주변 사람들의 강권에 따른 것이라고 했는데, 두 달 사이에 그 동네의 말이 180도로 확 바뀐 겁니다. 사과를 못 한 게 한동훈 때문이라고…. 그러니 어이가 없죠.”
그는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지금 생각해보니 이중 코드가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김 여사가 윤 대통령과 한동훈의 화해 자리를 만들어주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했는데 ‘대통령이 한동훈한테 화를 낸 것’이 아니라 ‘한동훈이 대통령에게 화를 냈다’는 식으로 말하더라는 거다. 격노의 대왕에게 화를 낼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는 희한한 내러티브다.
최근 사태를 통해 내가 얻어낸 결론은 다음과 같다.
① 김 여사는 이미 정치를 하고 있다.
② 한동훈은 김 여사가 원치 않는 국힘 당 대표다.
③ ‘대통령 부인 정치’의 제도화를 논할 때다.
● 김 여사 OK 없이 문자 공개 가능한가
이번 논란은 한동훈의 읽씹과 왜 지금 노출이냐로 나눠 보면 이해가 쉽다. CBS 김규완 논설실장이 4일 ‘편집’해 공개한 첫 문자가 중요하다. ‘몇 번이나 사과하려고 했지만 대통령 후보 시절 사과했다가 오히려 지지율이 떨어진 기억이 있어 망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에서 필요하다면 대국민 사과를 포함해 어떤 처분도 받아들이겠다’는 게 핵심이다.
이토록 애절한 문자를 한동훈이 읽씹 하다니…무례했다, 정치적으로 미숙하다, 이런 사람에게 또 당 대표를 맡길 수 있느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이 같은 반응을 능히 짐작할 한동훈 측에서 문자를 공개했을 리 없다. 당 대표를 정할 때마다 가만있지 못했던 대통령실에서도 7일 ‘개입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음날 더욱 절절한 문자 5통이 또 공개됐다.
어떤 간 큰 친윤도 대통령 부인 허락 없이 내밀한 문자를 공개하진 못 한다. 그렇다면 ‘김 여사 측’에서 대통령실도 패싱하고 나섰다고 볼 수밖에 없다. 왜? 한동훈 당 대표 등극을 막기 위해. 달랑 문자 다섯 통으로 대중을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다니. 정치 9단 뺨치는, 귀신같은 정무감각이 아닐 수 없다.
● 공사 구분 못해 공정과 상식 무너진 것
한동훈이 왜 감히 김 여사 문자를 읽씹 했느냐에 관해선 한바닥을 써도 모자랄 터다. 사람마다 해석은 다양하겠지만 맨 처음 문자를 공개한 김규완은 “김 여사 쪽, 윤 대통령 측에서 나오는 해석인데 한동훈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서 선긋기를 한 것”이라고 했다. 대통령 부부가 한동훈에게 분노한 것도 이 때문이라는 거다.
한동훈 자신은 “김 여사에게 사과의 뜻이 없다는 확실한 입장을 여러 경로로 확인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9일 방송 토론회에서다. 무슨 소리냐, 김 여사는 사과할 뜻이 있었다고 보는 분들은 진중권 발언을 다시 봐주기 바란다. 김 여사는 사과를 거부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면서도 주변의 반대를 탓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사람 헷갈리게 만드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에서 정해주면 하겠다”는 문자를 한동훈에게 보낸 바로 그날 김 여사가 주변에는 ‘사과 불가’의 메시지를 보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한동훈은 김 여사의 귀신같이 사람 홀리는 정무 감각을 너무 잘 알기에 읽씹으로 침묵했을 수 있다. 9일 토론회에서 한동훈이 “(당시 상황을) 다 공개하면 정부가 위험해진다”고 발언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6일 SBS 유튜브 채널에 나와 한동훈이 공사(公私) 구분을 강조한 것도 내게는 심쿵(심장 쿵!)이었다. “공적인 의사소통과 공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관계에서 사적인 방식으로 관여하는 대화가 이루어지는 건 부적절하다”는 말. 맞는 말 아닌가.
상상해보시라. 공인이 문제를 일으켰다. 그가 잘못했음은 안다면서도 굳이 사적 친분을 찾아 구구절절 사정을 늘어놓을 때는, 자신을 좀 봐달라는 의미다. 깨끗이 사과할 작정이면 사정사정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남이가’ 싶은 그 상대가 공적 채널 건너뛰고 그냥 봐주기로, 그러니까 박절하지 못해 그들끼리 덮고 넘어간다면, 그놈의 조직이 제대로 되겠나. 그래서 윤석열 정부의 공정과 상식이 무너졌다는 비판을 듣는 것이다. 여기에 선을 긋기 위해 한동훈이 무응답한 것이라면, 나는 잘했다고 본다.
● 차라리 ‘대통령 배우자법’으로 규제하라
오해 없기 바란다. 23일 전당대회에서 한동훈이 당 대표가 되든 안 되든 나는 상관없다. 드라마라면 결말이 궁금하지만 현실은 오싹할 뿐이다. “요 며칠 제가 댓글팀을 활용하여 위원장님과 주변에 대한 비방을 시킨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1월 23일 문자에서 드러났듯, 김 여사에게 ‘댓글팀’이 있다면 ‘정부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
그래서 과감히 발상의 전환을 해보았다. 대통령 부인에게 국가 최고 결정권자의 아내로서 이에 상응하는 법적 지위와 역할을 보장하고 책임도 요구하는 것이다.
물론 동서양을 막론하고 나대는 대통령 부인 좋아하는 나라는 없다(심지어 유능한 힐러리 클린턴도 대통령 부인 때는 미운털 박혔었다). 게다가 김 여사는 대선 전 “내조에만 전념하겠다”고 국민 앞에 굳게 약속한 전력이 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윤 대통령은 김 여사의 정무 감각에 상당히 의지하는 듯한데 김 여사의 활동과 예산을 관리 감독하는 제2 부속실과 특별감찰관 설치는 한사코 마다하고 있다(김 여사의 뜻으로 볼 수밖에 없다).
개혁신당은 총선 전 대통령 배우자의 지원과 의전의 법적 근거를 명문화한 ‘대통령 배우자법’ 제정을 밝힌 바 있다. 대통령 부인을 고위 공직자로 간주해 공적 활동을 양성화하되 국정 개입은 견제하기 위해서다. 다분히 김 여사 관련 논란을 의식한 법안이지만 어떤 식으로든 대통령 배우자에게 그 찬란한 지위에 맞는 책임을 지울 필요가 있다. 실제로 미국은 연방법 제3편 제105조를 통해 대통령 배우자를 대통령의 조력자로 정의하고 지원을 규정해놨다. 1978년 제랄드 포드 대통령 시절 부인의 역할을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 앞으론 대통령 후보 부인도 검증하라
미국서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재선 가도를 계속 뛸지 말지를 정하는 최종 결정권자도 부인 질 박사라지 않은가. 초대 워싱턴 대통령 부인부터 42대 클린턴 대통령 부인까지 퍼스트레이디 44명의 활동을 조사한 결과 최소 31명이 대통령과 정책을 토론했고 14명은 공직자 임명에 영향을 미쳤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부통령보다 더 대통령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조력적 대통령’이 퍼스트레이디라는 거다.
대통령과 사적 관계인 배우자이고, 선출되지도 않은 공인에게 이 엄청난 지위와 역할과 권력이 주어지는 게 옳은지는 당연히 논란거리다. 그래서 ‘대통령 배우자법’이 필요하다는 거다. 이 법이 나오지 않는다면, 다음 대선부터는 대통령 후보 배우자도 대통령 후보와 똑같이 검증받는 게 불가피하다.
그리하여 궁중 사극을 마무리한다면…2023년 영화 ‘나폴레옹’에서 영웅이 죽기 전 읊조린 세 마디가 “프랑스, 군대, 조세핀”이었다. 윤 대통령이 영화를 남긴다면 이럴 것 같다. “대한민국, 검찰, 건희.”
김순덕 칼럼니스트·고문 dob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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