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죽어라 수학 선행 시킨 아이, 나중에 불효자가 된다고? [공부 뇌 만들기 프로젝트]
여러분은 자녀를 교육시키면서 “너희가 잘 살면 되고, 난 그냥 그걸 지켜보는 걸로도 충분히 보람을 느껴” 라고 말하는 현대적 스타일이세요? 다시 말해서 ‘부모로서 너희를 잘 키우는 것이 목적 그 자체이지 난 아무것도 너희에게 바라는 것이 없어’라는 말을 평소에 자주 하느냐고 묻는 겁니다.
아니면 여러분이 자녀를 정성을 다해 키우지만 자녀가 그것을 고맙게 여겨야 하고 나중에 부모를 호강시킬 의무까지는 모르겠지만 부모에게 은혜를 받았으니 당연히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을 아이에게 자주 말하고 가르치는 약간 전통적인 스타일이세요?
전자에 해당하는 분들도 부모된 도리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자녀교육을 시켰지만, 아이의 마음에 감동이 있어 적극 효도를 한다고 하면 정말 행복하고 보람될 겁니다. 그렇다고 후자도 효도를 받기 위해서 또는 뭘 바라고 자녀를 뒷바라지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좀 억지스러운 질문을 한 의도는 여러분이 전자의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 아이를 교육하는 방식과 후자의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 교육하는 방식이 좀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두 질문의 차이는, 아이를 잘 키우려는 것에는 둘 다 똑같지만, 나중에 커서 아이가 효도를 하라는 교육을 일정 부분 포함시킬 것인지의 유무인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이야기는 오로지 저의 주관적 의견임을 밝힙니다. 여러분이 제 의견에 동의를 해도 좋고 비판적인 입장을 가져도 좋습니다. 다만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를 여러분들도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제 바람의 전부입니다.
부모로서 자녀를 잘 키우는 것은 본능이자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중에 자녀로부터 효도를 받겠다는 생각을 일정 부분 가지고 그것까지 고려하면서 자녀 교육을 하면 어떨까라는 게 제 입장입니다. 이 말은 처음부터 아이를 교육할 때 공부도 잘하고 나중에 커서는 효도도 잘하는 아이를 만들자는 이야기입니다. 둘 다 잘하기 위해서는 엄마가 자녀교육에 정말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문제는 엄마로서 아이를 그렇게 키우기가 생각처럼 쉽지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그것이 왜 그리 어려운지를 제가 엄마입장에 서서 한번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우리나라 교육열은 세계 어디에 내놔도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질문 들어갑니다. 좀 과한 표현처럼 들리겠지만 엄마들이 아이 공부에 왜 이렇게 까지 ‘목숨을 거는’ 건지 한번 생각 해본적 있으세요? 물론 양육은 모성 본능이죠. 또 내가 낳은 자식의 미래에 관한 문제이니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지요. 하지만 정말 그게 끝일까요?
저는 자녀 교육문제가 ‘아이의 미래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지금 당장 엄마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아이의 미래문제라는 것은 바로 이해가 되는데 지금 당장 엄마의 문제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는 금방 와닿지 않을 겁니다. 우리 아이를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서 또 우리 아이가 미래에 남부럽지 않게 잘 살게 하기 위해서 엄마로서 현재 아이 공부에 올인한다면 이것은 아이의 미래문제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겁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엄마의 문제‘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다음의 장면을 보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조금은 이해가 될 것입니다. 한번 볼까요. 몇년 전에 어떤 엄마가 제 강연을 듣기 위해 왔는데 그 당시 다른 엄마들의 꽁무니를 붙잡고 따라왔을 정도로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엄마 그 자체 였어요. 그러던 중 아이가 전교 1등을 하더니 그 이후로 쭉 1등을 했나 보더라구요. 몇년 뒤 이 엄마가 여러 엄마들을 데리고 다시 나타났어요. 그때 보니 머리 뒤 아우라가 장난이 아니더군요. 처음 봤을 때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말에 카리스마까지 배어 있었어요. 그 지역 커뮤니티에서 완벽한 오피니언 리더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엄마의 말 한 마디에 다른 엄마들이 바로바로 움직이더군요. 수학학원은 이 학원으로 하면 이 학원으로, 영어학원은 저 학원으로 하면 저 학원으로 등등 말입니다.
그때 저는 불과 몇년 사이에 사람이 이렇게까지 바뀔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 든 생각은 아이가 공부를 잘하면 아이가 공부를 잘하는 것이지 도대체 아이 성적이 뭔데 엄마의 삶을 이렇게까지 전적으로 바꿔놓느냐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아이 공부로 인해서 엄마의 개인적 삶의 차원 뿐만 아니라 사회적 위상까지 달라졌어요. 저도 아이 성적이 우리 엄마들 사회에 이렇게까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이러니 엄마들이 아이 공부에 목숨을 거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뭐가 어찌됐든 아이가 공부는 잘 하고 볼 일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위와는 반대되는 상황을 한번 볼까요. 어떤 엄마가 좋은 대학을 나오고 사회에서 꽤 잘 나가도 아이 공부가 받쳐주지 않으면 엄마 모임에서는 곧바로 주눅이 들어버립니다. 아이가 공부를 잘 하지 못하는 것이 마치 자신의 탓처럼 느껴집니다. 졸지에 죄인이 된 기분입니다. 자신이 아이를 방치해서 이렇게 공부를 잘 못하게 된게 아닌가라는 자책감마저 듭니다. 패션 감각이 뛰어나 옷을 좀 화려하게 입어도 엄마 모임에서는 자칫 가십꺼리가 될 수 있습니다. 애 공부는 저 모양인데 엄마라는 사람이 아이 교육에는 신경 쓰지 않고 자기 옷에만 신경 쓰는 것이란 인상까지 들게 합니다. 자기 치장하느라 제대로 애를 돌보지 않았다는 비난처럼 들립니다.
위의 이야기는 제가 좀 극단적으로 묘사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편한 진실이 일부 숨겨져 있기도 합니다. 결론은 엄마가 그 지역 커뮤니티에서 기 죽지 않고 당당하게 살려면 아이 공부가 어느 정도 받쳐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 성적이 엄마의 권력이요, 엄마의 자존심’입니다. 또 아이 성적이 엄마의 훌륭함, 유능함을 보여주는 일종의 잣대라고도 볼 수 있구요.
어느 모임에서도 자녀교육문제는 늘 단골 메뉴이고, 이어서 “아이 공부 잘 하죠?”라는 형태로 대화가 흘러가기 일쑤입니다. 아이 공부가 전교권이라고 말하는 순간 주위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고, 곧바로 모든 집중이 그 엄마에게로 쏠립니다. 그 엄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오늘의 주인공이 되어 버립니다. 반대로 아이 공부가 시원찮으면 어느새 자신이 인싸가 아니라 아싸가 되어 버립니다. 이처럼 엄마모임은 ‘기승전 아이성적’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아이 공부가 엄마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할 정도이니 어떻게 엄마가 아이 공부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을까요. 아이의 먼 미래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엄마의 현재 삶도 그 이상으로 절박하다는 겁니다. 어떤 엄마도 아이 때문에 자신의 현재 삶의 질이 떨어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이것이 현재 엄마가 처한 현실입니다. 이러니 ‘아이의 미래’와 ‘엄마의 현재’가 충돌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많은 문제가 생겨납니다. 현재와 미래가 부딪치면 인간은 누구나 발등에 떨어진 현재의 급한 불을 먼저 끄고 싶어합니다. 아이 성적이 엄마의 권력이요, 엄마의 자존심인 세상에서 아이 미래는 먼 미래의 문제일뿐 지금 당장 아이가 공부를 잘해야 엄마도 기를 펴고 제대로 살 수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과연 엄마가 아이 공부에 목숨을 걸지 않기는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여기서 잠시 옆길로 빠져서 엄마가 아이 성적에 목숨을 걸게 하는 심층적 이유, 즉 거의 무의식적 이유를 한번 따져 보겠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변수로는 개인적, 사회문화적, 경제적 등 다양한 요인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변수들을 움직이는 결정적인 상수가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뇌인지구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것은 개인의 뇌인지적 구조가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차원에서의 집단적 뇌인지구조라고 봅니다. 일종의 패러다임입니다.
우리 한국인들의 상당수는 우뇌적 뇌인지구조를 가지고 있다 보니, 전체를 잘 보는 매크로한 렌즈를 끼고 있고, 그걸 통해서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 결과 나무 보다는 숲을 잘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변화의 패턴을 잘 읽고, 분위기 파악도 잘하며, 뭔든 빨리빨리 하기를 좋아합니다. 이 말을 뒤집어 표현하면 정밀한 렌즈를 끼고 있지 않다보니 마이크로한 차원에서 무엇을 엄밀하게 분리하는 것이 다소 약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미(未)분화된 사고’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창업자가 자기 회사와 자신을 분리하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회사가 곧 나이고, 내가 곧 회사입니다. 그러다 보니 회사에 자신의 영혼을 갈아넣어 그것이 엄청난 회사 성장의 동력이 됩니다. 하지만 회사가 성장한 후 회사와 자신을 분리하지 못해서 많은 법적인 문제에 걸려듭니다. 또 우리 나라에서는 회사를 파는 것도 정서적으로 잘 용납이 되지를 않습니다. 마치 자신의 자식을 파는 느낌이랄까요.
이러한 우뇌적 미분화공간에 자리를 잡고 있는 대표적인 단어가 바로 ‘우리’ 라는 표현입니다. 우리라는 말은 서양사람들이 말하는 개별화된 너와 내가 합쳐서 생겨나는 집단의 개념이 아니고, 너와 내가 갈라지지 않는 원초적인 공통영역을 나타내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아이들은 아이가 혼자여도 ‘우리 엄마’라고 합니다. ‘나의 엄마’가 아니죠.
우리 사회에서는 이 미분화된 공통영역이 클 수록 우리는 ‘정(情)’이 많다고 합니다. 네것 내것을 잘 구별하지 않는 사람을 정이 많다고 해요. 반대로 네것 내것을 칼 같이 구별하면 섭섭함을 넘어서 자칫 ‘한(恨)’이 생깁니다. 특히 같은 핏줄이나 가까운 사이에서 네것 내것을 따지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한이 맺히고 나중에 원수가 되어버립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사회 전반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을 종합해서 정리해보면, 우리의 우뇌적 뇌인지구조가 엄마와 자식을 분리하지 못하는 교육현실을 만들어 냅니다. 이런 현실에 적응하고 생존하기 위해서는 엄마들은 자신들의 미분화된 우뇌적 뇌인지구조를 더욱 활성화시키는 최악의 악순환 고리를 만들어냅니다. 문제는 그 악순환이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가속화된다는 것이지요. 정말 문제는 브레이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이러한 현상이 곳곳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최근에 아이 공부를 놓고는 아이들의 성적 전쟁이 아니라 급기야는 엄마들의 대리전쟁으로까지 번지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엄마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파워게임이 시작된 것이지요. 그들이 살고 있는 각 지역의 유명 학원 중심으로 주도권 전쟁, 자존심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 아이가 이 전쟁에서 결코 질 수가 없다는 것이죠. 그것은 곧 엄마 자신의 패배이니까요. 그야말로 엄마들의 자존심 건 한 판 승부가 지금 이 순간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과도한 조기 선행학습이 이뤄집니다. 오랫동안 아이들을 교육해왔던 제가 봐도 깜짝 놀랄 정도입니다. 정상 범위를 넘어섰냐고요? 아주 많이 넘어섰습니다. 서울 그것도 강남 한복판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문제는 엄마가 이 전쟁을 앞에서 직접 진두지휘하는 사령관이라는 겁니다.
문제는 승자가 없는 전쟁이라는 거죠. 오로지 희생자만 있습니다. 바로 자기 아이들이죠. 과도한 사교육 부작용으로 어린 나이부터 아이 뇌가 완전히 망가집니다. 이미 그 심각성은 제 글에서 수차례 언급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아이의 미래도 망칠 수 있고, 자칫 엄마도 스스로의 무덤을 팔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엄마가 스스로 무덤을 판다는 섬뜩한 경고는 무슨 뜻일까요? 엄마의 일생을 따라 잠시 시간여행을 해보면 그 말의 뜻을 곧 알게 될 겁니다. 여러분은 한때 우아하고 화려한 싱글이었죠. 그러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애 낳고 아이 키우면서 지지고 볶고 하는 사이에 세월은 가고, 어느새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가면서 엄마 품을 하나 둘 떠납니다. 그때 쯤 빈집증후군과 더불어 중년의 위기가 찾아옵니다.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아왔고 앞으로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생깁니다. 그러다 더 빨리 세월이 지나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고 이제는 자신이 우아하고 화려한 싱글이 아니라 어느새 외롭고 쓸쓸한 싱글이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나이들어 외롭고 쓸쓸한 싱글이 되었을 때 가장 두려운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외로움입니다. 혼자서 쓸쓸하게 죽어가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자식들이 엄마를 잊지 않고 뻔질나게 자주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이가 엄마를 잊지 않고 자주 찾아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이 뇌 속에 효도를 하는 영역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뇌 속에 두 가지 기능, 즉 사회적 이타성과 확산적 사고가 결합하여 부모에게 효도를 하게 합니다. 일종의 ‘효도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효도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잠시 알아보겠습니다.
첫째, 제가 앞선 글에서 설명한 뇌인지행동 맵에서 아이의 사회성 지수가 높을수록 대개 이타성을 더 많이 보입니다. 이타성이 강하면 아이는 자신보다는 엄마의 입장에 서서 생각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엄마가 혼자 계시는데 얼마나 외로울까, 엄마가 나를 얼마나 보고 싶어할까 등등을 생각합니다. 이처럼 이타성은 아이 머리 속에 엄마가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공간입니다. 이 공간이 살아 있어야 엄마의 외로운 마음을 헤아릴 수 있고, 또 엄마의 외로운 마음을 공감하는 능력이 뛰어나야 엄마를 더 잘 위로할 수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외로운 엄마를 찾아가도록 발걸음을 재촉하는 동력인 엄마에 대한 그리움도 여기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둘째, 뇌인지행동 맵에서 두번째 지수인 인지환경지수가 높을수록 확산적 사고를 잘 합니다. 여기서 확산적 사고란 A를 보면 B가 떠오르는 것이죠. 이 사고가 일상에서 엄마를 생각나게 하고 엄마가 그리워서 엄마를 찾아가게 하는 트리거 역할을 합니다. 확산적 사고가 살아있으면, 아이는 맛 있는 빵을 보는 순간 저절로 엄마가 생각납니다. 엄마와 함께 빵을 먹었던 예전 추억이 자연스럽게 되살아난 겁니다. 그러면 아이는 그 빵을 사서 엄마한테 한걸음에 달려갑니다.
또 아이가 일본에 출장을 갔다가 좋은 온천에 들리면 아이는 곧바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 여기 온천이 너무 좋아. 다음에 꼭 같이 와요” 라고 합니다. 어릴 때 여행 가서 엄마랑 물장구 친 옛기억이 되살아난거죠. 엄마는 자녀의 전화 목소리만 들어도 일본 온천 갔다온 것과 같습니다. 이게 자식 키운 보람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이가 뭘 보거나 뭘 할 때마다 엄마가 생각나 한걸음에 달려오는 아이로 만들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효도뇌가 살아 있으면 말년에 엄마는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문제는 엄마의 현재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수학공부를 열심히 시키면 이 확산적 사고를 죽이기가 너무 쉽다는 거죠. 현재에 수학을 많이 시키다가 미래에 아이를 불효자로 만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엄마가 스스로 무덤을 판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저는 ‘수학 못하는 아이가 효자되고 효녀된다’고 자주 이야기를 합니다. 위로 차원에서 드리는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그럼 수학을 잘 하는 아이가 불효자, 불효녀가 된다는 건가요라고 질문 할 수 있습니다. 그건 물론 아닙니다. 다만 상대적으로, 확률적으로 그럴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겁니다. 제일 바람직한 것은 수학을 아주 잘 하면서도 효자가 되고 효녀가 되게 하는 겁니다. 저도 그 방법을 제시하는 거구요.
어쨌든 여러분도 세월을 비껴 갈수는 없습니다. 나이가 들어 외롭고 쓸쓸한 싱글이 되면 그냥 온 몸이 아파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갑자기 좀 심하게 아프면 어떻게 하죠. 그때 필요한 것이 자식이라고 했습니다. 필시 아이에게 전화를 걸 겁니다. 엄마가 아프다고.
이때 자녀의 반응을 한번 보겠습니다. 참고로 아래 두 아이는 다 꽤 괜찮은 경우입니다. 어쩌면 그렇지 않는 경우가 더 많을 수 있습니다. 그건 비극입니다.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되겠지요.
어떤 아이는 엄마가 아프다고 하니까 전화로 묻습니다. 어디가 어떻게 아프냐고 말입니다. 엄마 이야기를 쭉 듣더니 내일 아침에 자신이 지정한 병원을 찾아가라고 자세히 안내를 해줍니다. 그리고 당부를 합니다. 의사 선생님에게 이런 질문, 저런 질문도 하라고 알려줍니다. 내일 결과를 보고 다시 통화를 하자고 하면서 전화를 끊습니다. 아이는 지금 당장 엄마에게 가야겠다는 생각까지는 하지를 않습니다.
또 다른 어떤 아이가 있습니다. 엄마가 아프다고 전화를 하기 전에 매일 같이 안부 전화를 합니다. 어디 아픈데 없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뻔질나게 엄마를 찾아옵니다. 그런데도 그날밤 엄마가 아프다고 전화를 하니 아이는 만사를 제쳐놓고 한걸음에 달려옵니다. 아이의 심정은 그렇습니다. 엄마가 아픈데 그때 아무도 곁에 없으면 엄마가 얼마나 외로울까. 아픈데 혼자 밤을 새면 엄마는 분명 별의별 생각을 다 할텐데 내가 가서 엄마를 안심시켜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엄마에게 와서는 “엄마 별일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라고 위로를 합니다. 엄마와 함께 자고 아침에 엄마 손을 붙잡고 병원으로 모셔갑니다. 여러분도 알잖아요. 아플 때 사랑하는 사람이 손만 잡고 있어도 통증이 덜 하고 두려움도 덜 한거 말이예요.
여러분은 위의 두 아이 가운데 어떤 자녀를 원하세요? 너무나 당연해서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첫째 아이도 엄마를 생각합니다. 하지만 둘째 아이는 엄마의 입장에서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는 기특한 마음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엄마도 아이 뇌 속에 그 기특한 마음을 사라지게 하기를 원하지는 않을 겁니다. 문제는 많은 엄마가 그 사실을 몰라서 지금도 불행의 씨앗을 뿌리고 있다는 겁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 지금도 진행형이라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제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이의 현재도 중요하고, 아이의 미래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엄마의 현재도 중요하고, 엄마의 미래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하나도 무시할 수 없는 변수입니다. 우리 아이의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자는 겁니다. 또 엄마의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자는 겁니다.
그 해법은 무엇일까요.
우선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이의 확산적 사고도 살리면서 아이의 사회성도 살려놔야 엄마가 미래에 외롭지 않습니다. 초등 저학년 때 과도한 수학공부만 덜 해도 엄마의 미래는 지킬 수 있습니다. 거기에 더해 지난 글에서 말씀드린 아이의 사회적 역량을 키워주는 방법을 참고하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그 다음 반드시 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아이가 수학을 비롯해서 모든 과목을 다 잘 할 수 있도록 뇌인지역량을 강화해주어야 합니다. 이 말은 과목별로 지식을 열심히 가르치는 방식이 아니라 아이 공부의 기본기를 잡아줬더니 모든 과목을 다 잘 하더라는 겁니다. 공부에서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원전이(far transfer)이가 일어나도록 해주자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아이는 지금도 공부를 잘하고 나중에는 더 잘할 수 있습니다. 이 방법이야말로 아이의 현재도 지켜주고 미래도 지켜주며, 더 나아가 엄마의 현재 자존심도 지킬 수가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참고로 원전이가 일어나는 교육 방법에 대해는 다음 글에서 알려드리겠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지금 아이를 보고만 있어도 마음 든든하고, 훗날 엄마에게 큰 위로가 되는 아이로 키우시기를 강력히 희망합니다. 또 아이의 현재와 미래, 엄마의 현재와 미래, 이 네 마리 토끼를 동시에 다 잡는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여러분의 자녀교육 가운데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응원합니다.
[안진훈 MSC브레인컨설팅그룹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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