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의 밥 냄새와 노랫소리는 영원히 우리 곁에 남을 것”[에필로그]

김송이 기자 2024. 7. 12.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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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 십시일반 밥묵차 대표. 십시일반 밥묵차 제공

“진짜 대단한 사람이네. 목소리가 저렇게 우렁차다니.”

1980년대 말 88서울올림픽을 앞둔 정부는 서울 곳곳 노점을 일제히 단속했다. 단속에 맞서 현장을 찾은 전국노점상연합회 소속 조덕휘씨 눈에 젊은 여성이 보였다. 완장을 찬 단속반이 거세게 밀고 들어올 때 맞서 소리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유희씨였다. “단속반이 들어오면 젊은 사람들은 위축되기 마련인데 유희는 앞에서 절규하듯 소리를 치더라고. 목소리가 그렇게 우렁찰 수 없었어.” 조씨는 36년 전 귀에 박힌 유씨의 똑 부러진 목소리가 생생하다고 했다.

유씨는 지난 30년간 그 목소리를 거리 위 약자들과 나눴다. 그가 대표로 있던 ‘십시일반 음식연대 밥묵차’는 전국 방방곡곡 집회와 농성장을 찾아다니며 밥을 나눴다. 유씨는 밥을 퍼줄 때마다 “밥은 하늘이고 사랑이고 힘”이라고 외쳤다. 싸움에서 이길 때까지 함께 하겠다는 응원이자 언제든 뒤를 지키겠다는 위로였다.

유씨는 지난 6월18일 하늘로 떠났다. 향년 65세. 마지막으로 유씨가 주는 밥을 먹으러 많은 이들이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발걸음을 했다. 빈소 입구에는 주황색 앞치마를 입은 유씨 사진이 걸렸다. “어서 와! 절하고 얼른 밥 먹어!” 현수막 속 유씨는 여느 때처럼 활짝 웃는 얼굴로 조문객을 맞았다.

두 노점의 죽음…밥묵차를 이끌다

날 때부터 투쟁가는 아니었다.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 아세아 극장 앞에서 공구노점을 시작했을 당시 유씨는 하루 벌어 하루 먹는 데 치여 살았다. 그러다 돈암동 달동네에서 철거당한 이들이 모여 사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됐다. 손도끼와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철거용역반원이 노인과 어린이를 때리는 동안 경찰은 방관했다. 그 장면이 유씨를 거리로 이끌었다.

사람을 이끄는 재주가 있는 전국노점상연합에서 문화국장을 맡았다. 처음 마이크를 잡는 순간에도 전혀 버벅대지 않았다. 유씨와 노점상 투쟁을 함께 했던 이들은 “얼마나 호소력 있게 얘기하던지…. 발언을 정말 잘했다”고 기억했다.

전국노점상연합 부의장을 맡았던 유씨는 1995년 인생의 두 번째 변곡점을 맞았다. 서초구 양재역 인근에서 카세트테이프 노점을 하던 장애인 노점상 최정환씨가 구청의 노점 단속에 반발하며 자기 몸에 불을 붙였다. 사경을 헤매는 최씨 옆에서, 유씨는 그의 유언을 들었다. “내 억울한 죽음을 밝혀달라.” 그때부터 유씨는 장애인·노점상들이 농성하는 병원 앞에서 밥을 지었다.

같은 해 11월 인천 아암도 바닷가에서 변사체가 발견됐다. 아암도에서 노점을 하던, 인천시의 노점 철거에 맞서 투쟁하던 이덕인씨의 사체였다. 행방불명됐던 이씨의 시신이 폭행·포박 흔적과 함께 발견됐다. 유씨와 인근의 대학생들이 ‘부검으로 사인을 밝히라’며 시신 곁을 지켰다. 그러나 시신을 가져간 경찰은 이씨가 익사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이후 6개월 동안 이어진 장례투쟁에서 유씨는 밥을 짓고, 이씨의 유가족을 챙겼다. 그 인연으로 매년 열리는 ‘이덕인 열사 추모제’마다 이씨의 모친 김정자씨가 유씨를 찾았다. 유씨의 세심함이 주변으로 퍼져가는 모습이었다.

이후 유씨는 공구노점을 정리하고 서울극장 인근에서 포장마차를 열었다. 장사는 쉽지 않았다. 인천으로 터전을 옮긴 유씨는 그곳에서 세 아들을 키우며 틈틈이 투쟁을 지원했다.

‘밥 연대’ 새로운 투쟁의 지평을 열다
유희 십시일반 밥묵차 대표(오른쪽)와 성미선 밥묵차 활동가. 십시일반 밥묵차 제공

유씨가 밥차를 시작하겠다고 했을 때 많은 이들이 말렸다. 농성장에서 일회성으로 밥을 짓는 것과 달리 밥차는 품이 많이 들었다. 규모도 크고 훨씬 전문적으로 밥을 준비해야 했다. 얼마나 지속해서 유지할 수 있을지 체력도, 경제력도 의문인 상황이었다. “그 힘든 일을 어찌하려고 그러냐.” 노점 운동을 함께 해온 조씨가 앞장서서 말릴 정도였다.

그러나 유씨가 나눈 마음이 돌아와 밥차로 모였다. 노점상 운동을 하며 알게 된 많은 동지가 먼저 밥차를 돕겠다고 나섰다. 조리나 배식을 돕는 이들, 식판과 수저를 선물하는 이들 쌀·표고버섯 같은 음식 재료를 보내는 이들의 정성이 십시일반 모였다. 2010년 초반까지만 해도 생소했던 ‘밥 연대’라는 개념은 유씨가 승용차에 가득 실은 100인분, 500인분, 1000인분의 밥이 투쟁 현장을 덥히면서 점점 구체화됐다. 마이크를 잡고 무대에 서 발언하거나, 진압에 나선 공권력과 몸으로 맞서는 것이 투쟁이라고 여겨지던 때, 유씨의 밥 연대는 새로운 투쟁의 지평을 열었다.

최인기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수석부위원장은 유씨가 강조했던 ‘십시일반’ 사상이 “가장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투쟁 방식이었다”며 “자신의 문제로 싸워온 이들이 타인의 상황을 함께 고민하는 공동체를 밥 연대가 가능하게 했다”고 말했다.

유씨의 밥묵차 이후 우리밥연대, 밥통 등 다른 밥차들이 밥 연대를 이어가게 됐다. 유씨를 ‘유일한 선배’라고 부르는 우리밥연대 김주휘씨는 유씨의 하관식에서 눈물을 쏟아내며 그 약속을 다짐했다. “일상을 잃은 동지들에게 누구보다 더 가까이 힘과 위로를 밥에 담아 쫓아다니셨던 것을 기억하겠습니다. ‘밥하는 우리는 아파서도, 죽어서도 안 된다. 동지들 다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건강해야 한다’고 하시던 말씀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높고 낮은 그대들 잘 잤어요?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지난 6월9일 고 유희 십시일반 밥묵차 대표의 빈소가 마련돼 있다. 성동훈 기자

“높고 낮은 그대들 잘 잤어요?” 유씨가 페이스북에 올리던 기도문은 매번 이렇게 시작했다. 유씨의 밥은 거리에 국한되지 않았다. 높은 곳에서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는 고공농성자들의 끼니도 유씨의 몫이었다. 임금을 못 받은 이들, 노동조합을 만들었다고 해고된 이들이 망루와 굴뚝으로 오르는 모습을 유씨는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밧줄에 매여 올라가는 밥을 두고 유씨는 “생명이고 힘이다”라고 했다. 단식농성을 벌이는 이들에게는, 밥 대신 그 이름을 넣어 적은 기도문을 올렸다.

그 기도문으로 마음의 허기를 달랜 이들이 적지 않았다. 사드 반대를 외쳐온 소성리 주민들,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는 노동자들, 오랜 싸움 탓에 병으로 힘겨워하는 모든 이들이 기도문에 담겼다. 유씨의 기도문은 계속 길어지기만 했다. ‘한진중공업 마지막 해고노동자’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도 유씨의 기도문에 올랐다. ‘김진숙 동지 항암 잘하고 계시죠?’ 김 위원은 그 기도가 “인적없는 밤길에서 만난 불빛 같았다”고 했다.

지난달 20일 유씨를 기억하는 이들이 모인 ‘추모의 밤’에서 김 위원은 늦은 인사를 전했다. “당신을 알기도 전에 당신이 해주는 밥부터 먹었다.” 김 위원은 유씨가 입었던 주황색 앞치마를 응원의 깃발, 한 손에 쥐던 국자가 승리의 팡파르 같았다고 기억했다. “유희 동지의 밥이 참 맛있었다는 인사를, 받을 사람이 떠난 뒤에야 해요. 아무 대가 없이 퍼주던 그 밥을 먹고 나면 힘이 나고 충만해지던 참 신기한 밥이었어요. 잘 먹었습니다.” 모두의 마음을 대변한 마지막 인사가 끝나자 100여명이 모인 강당이 훌쩍이는 소리로 가득 찼다.

트로트로, 투쟁가로 응원…‘진정한 민중가수’
유희씨는 투쟁 현장에서 가요 ‘저 높은 곳을 향하여’를 가장 즐겨 불렀다. 십시일반 밥묵차 제공

그가 가장 즐겨 부르던 노래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였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우리가 지금 가는 이 길이/정녕 외롭고 쓸쓸하지만/우리가 가야 할 인생길’ 가사로 시작하는 노래는 길 위에 앉아 노래를 듣는 이들이 싸움에 나서게 된 마음을 대변하곤 했다. 유씨는 때로는 흐트러짐 없이, 때로는 ‘울지 않겠다’며 눈물로 노래를 불렀다.

그는 무릎까지 올라오는 부츠와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거리와 봉사 현장에서 노래를 즐기는 ‘디바’였다. 상황에 맞춰 개사해 부르는 트로트 한 소절에, 농성장에 모인 이들은 마음의 여유를 되찾았다. 5년 전 성주 소성리에서 열린 ‘효 평화 콘서트’에서도 유씨는 반짝이는 목걸이와 함께 무대를 뛰어다녔다.

민중가수 지민주씨는 “유희 언니의 삶이야말로 민중가수 그 자체였다”고 했다. “언니가 한사코 자기는 민중가수가 아니라며 몸을 낮추셨어요. 하지만 고통받는 민중들과 함께 투쟁하는 삶을 살면서 노래로 사람들을 응원한 언니야말로 민중가수였다고 생각해요.” 유씨는 눈을 감기 전 ‘다시 일어나면 공연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추모의 밤에서 유씨가 ‘저 높은 곳을 향하여’를 부르던 영상이 소개됐다. 지씨는 “이날이 언니의 콘서트로 기억되길 바란다”고 했다.

세 아이의 엄마, 말 안 듣는 동생…투쟁을 이끌었던 이 옆에 잠들다

새벽같이 일어나 밥을 지어 전국을 도는 어머니,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자란 유씨의 세 아들은 늘 걱정 속에서 컸다. 먹고살기 어려울 때나, 형편이 좀 나아져 지낼만 할 때나 어머니는 늘 밥을 지어 투쟁 현장으로 나섰다. 유씨의 큰언니 유덕희씨는 “아들이 셋이나 있는데 뭐하는 짓이냐고 다그치고 혼내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했다.

걱정 속에서, 가족들은 밥묵차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를 자처했다. 세 아들은 ‘어머니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며 매달 밥묵차에 후원금을 댔다. 인천 청라에 집을 마련해 음식 조리가 편하도록 개조한 것도 아들들의 지원 덕분이었다. 유씨의 언니도 유씨를 따라 거리와 봉사 현장을 찾았다.

동생의 하관식에서 언니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리자 곁에 선 이들과 함께 팔뚝을 흔들었다. 박자는 맞지 않고 움직임은 어색했다. 따로 노는 언니의 팔 동작에서 동생의 삶을 존중하려는 마음이 내비쳤다.

유씨의 큰아들 김청희씨는 “이번에 어머니 찾아와 주신 분들 한 분씩 만나 뵈니 어머니가 ‘나 이렇게 살아왔다’고 말해주신 것 같다”며 “저 하나 더 안다고 해서 티끌밖에 안 되겠지만 그래도 어머니가 어떤 뜻으로 어떤 일들을 해오신 건지 이번 기회에 공부하겠다”고 말했다.

초여름 해가 뜨겁던 날 유씨는 모란공원에 잠들었다. 밥묵차는 여름철 밥과 함께 나눠주던 하지감자와 수박을 마지막 밥 연대로 준비했다. 유씨는 밥 연대를 시작한 이유이기도 했던, 이덕인 열사 바로 뒷자리에 모셔졌다. 사람들은 “유씨는 저 높은 곳을 떠났지만 그의 밥 냄새와 노랫소리는 잊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기 남양주 모란공원에서 지난 6월20일 유희 십시일반 밥묵차 대표의 하관식이 준비되고 있다. 이덕인 열사 묘소 바로 뒷자리에 유씨가 잠들었다. 김송이 기자

☞ “밥은 하늘이다”…밥심으로 투쟁하던 이들이 기억하는 ‘십시일반 밥묵차’ 유희 대표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301151708001


☞ 약자들의 투쟁이 있는 곳, 마음의 허기까지 채운 그가 떠났다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406192049005

김송이 기자 songy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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