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은 돈 안된다?…CERN 연구자들 "첨단테크의 시발점"

제네바= 문세영 기자 2024. 7. 12.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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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3일 스위스 제네바 CERN에서 ALICE 검출기 한국 연구팀인 ‘KoALICE’ 멤버인 (왼쪽부터) 조재윤 인하대 물리학과 박사과정생, 최용준 부산대 물리학과 석사과정생, 유인권 부산대 물리학과 교수, 권민정 인하대 물리학과 교수, 비트 쿠체라 인하대 박사후연구원을 만났다. 제네바=문세영 기자.

빅뱅 직후 원시 우주는 고온·고밀도의 극한 환경이었다. 그랬던 우주가 어떻게 오늘날과 같은 생명과 물질들을 탄생시켰을까. 원시 우주의 비밀을 파헤치는 연구가 스위스 제네바의 유럽핵입자물리연구소(CERN)에서 이뤄진다. 

CERN 본부가 위치한 제네바와 인근 프랑스 지역에는 지하 100m 아래에 27km 둘레의 거대강입자가속기(LHC)가 있다. 가속기에서 입자들이 빛에 가까운 속도로 충돌하면 새로운 입자가 생겨나거나 초기 우주를 재현할 수 있다. 

LHC는 건설에만 수조원의 비용이 소요됐지만 이같은 기초연구에 막대한 비용을 투자한다는 사실을 납득하지 못하는 일부 비딱한 시선이 있다. 기초과학은 스마트폰처럼 내 일상을 편안하게 하거나 로봇치료기처럼 건강 개선을 돕는 기술이 아니라는 판단에서 ”기초과학은 돈이 되지 않는다“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CERN에서 진행되는 연구는 돈과 직결되는 응용기술이나 첨단테크와 무관한 걸까. 지난 6월 CERN에서 만난 국내외 연구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6월 27일 스위스 제네바 CERN에서 CMS 검출기 한국 연구팀인 ‘KCMS’ 멤버들을 만났다. (왼쪽부터) 김슬기 서울시립대 물리학과 박사과정생, 고정환 경희대 물리학과 교수, 제이슨 리 서울시립대 물리학과 교수, 김태정 한양대 물리학과 교수. 제네바=문세영 기자.

●  CERN 연구는 최첨단 기술 집합체...연구자 50% 산업계 진출

CERN에서 만든 우리 일상과 가까운 대표적인 기술로는 ’월드와이드웹(www)’이 있다. 1980년대 후반 CERN 과학자들은 정보를 보다 효율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방법을 고심했다. ‘웹의 아버지’로 불리는 컴퓨터 과학자인 팀 버너스 리는 CERN에 근무할 당시 컴퓨터 간 정보 접근 용이성을 높이는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월드와이드웹이라는 세계 첫 웹브라우저를 개발했다. 이후 과학자들 사이에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고 오늘날 누구나 사용하는 하이퍼텍스트 시스템이 됐다. 

CERN에서 현재 가동 중인 가속기와 검출기에도 초전도체 기술, 진공 기술, 반도체 기술, 그리드 컴퓨팅, 머신러닝, 인공지능(AI) 등 다양한 최첨단 기술이 결합돼 있다.  

CERN에서 ALICE 검출기를 연구 중인 권민정 인하대 물리학과 교수는 ”CERN이 보유한 기술은 암을 치료하기 위한 방사선치료 장비와 같은 의료 분야, 우주 방사선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측정하는 방사선 검출기처럼 우주 분야 등에서도 활용 가능하다“며 "인공위성에 반도체 검출기를 실어 지진을 예견하거나 번개 관련 연구를 할 수도 있어 응용 범위가 무궁무진하다"고 설명했다. 

실질적으로 CERN 연구자들은 다양한 산업 분야로 진출하고 있다. 이매뉴얼 체스멜리스 영국 옥스퍼드대 물리학과 교수는 ”CERN에서 연구를 한 물리학자들의 10~15%는 연구를 지속하고 50%는 산업으로 간다“며 ”CERN 연구를 하다보면 컴퓨터에 능숙해지고 국제적인 협업을 통해 프로젝트를 관리하는 방법도 알게 돼 산업계에서 매우 매력적인 인재들이 된다“고 말했다. 

20~30%는 정부나 금융과 같은 다른 분야에서 활약하게 된다고도 덧붙였다. 기초과학 분야의 우수 인재 중 상당수가 산업계나 국가에서 과학자이자 기술자, 행정가 등으로 일하며 높은 수준의 다양한 부가가치를 생산해내고 있다는 의미다. 

체스멜리스 교수는 ”기초과학을 통해 즉각적인 수익을 기대할 수는 없다“며 ”하지만 CERN은 연구 과정에서 월드와이드웹뿐 아니라 대규모 컴퓨팅 시설, 의료 영상 장비 등 많은 응용 분야를 탄생시켰으며 상용화되는 각종 테크 분야의 원천이 된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매뉴엘 체스멜리스 영국 옥스퍼드대 물리학과 교수가 CERN에 위치한 그의 연구실에서 동아사이언스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제네바=문세영 기자.

●  지적 호기심 해결은 인간의 본성...그 과정서 유용성 발견 

과학을 꼭 돈벌이와 연관지어야 할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구심을 제기하는 과학자들의 의견도 있었다.

CERN에서 CMS 검출기를 연구하고 있는 고정환 경희대 물리학과 교수는 ”스마트폰이 생겨서 인류는 더 행복해졌을까. 신기술 없이도 우리는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며 ”양자 세계를 들여다보고 우주선을 만들어 달에 가고 가속기를 통해 입자를 발견하는 일은 결국 인류의 근본 호기심을 채우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지적 호기심을 해결하려는 건 인간의 본성“이라며 ”그 극단에 있는 게 CERN에서 하는 연구들이며 CERN 연구자들은 호기심 해결을 위해 매일 연구를 붙들고 있다“고 덧붙였다. 

제이슨 리 서울시립대 물리학과 교수도 ”전기를 처음 발견했을 땐 이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앞으로 어떻게 쓰이게 될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며 ”전기가 이렇게 우리 일상에서 중요하게 쓰이게 될지 몰랐던 것처럼 지금 CERN에서 하는 연구도 향후 다양한 측면에서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류가 먹고 사는데 아무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기술들이 궁극적으로 삶에서 유용한 생산물로 재탄생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물리학 공부를 하고 싶지만 의대에 지원하는 것이 현실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하는 한국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해외 연구자에게 물었다. ALICE 검출기 연구자인 펠릭스 라이트는 "포기하지 말고 호기심을 가지면 된다. 물리학자가 되면 매일이 도전으로 가득 차겠지만 매우 보람이 있을 것"이라며 "나는 CERN에서 일하고 배우는 매일이 매우 즐겁다"고 말했다.

[제네바= 문세영 기자 moon0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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