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비밀, 모르는 게 더 많다"...힉스 이후 차세대가속기 개발 앞둔 CERN
초여름에 접어든 6월 스위스 국경에서 프랑스 방면으로 20분 가량 차를 타고 가니 세시라는 프랑스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지하 100m 아래 둘레가 27km에 달해 '세상에서 가장 큰 실험실'로 불리는 유럽핵입자물리연구소(CERN)의 거대강입자가속기(LHC)가 설치된 지역이다. 국경을 넘기 위해 출발한 제네바 CERN 본부 아래에도 가속기가 있으니 그 규모를 실감할 수 있었다.
LHC는 입자를 빛에 가까운 속도로 가속시켜 충돌을 일으켜 새로운 입자를 만들어내거나 충돌 시 발생하는 물리 현상을 탐구한다. 입자 간 충돌을 일으키려면 매우 높은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고에너지를 얻기 위한 긴 가속 경로가 필요하다.
CERN은 올 가을 70주년을 맞는다. 1954년 설립 후 CERN에서 진행된 연구는 신의 입자로 불리는 '힉스' 발견 등 3건의 노벨 물리학상으로 이어졌다. ‘월드 와이드 웹’ 시대를 연 공학 기술도 탄생했고 국제 협업 연구의 대표적인 모범사례로 불리기도 한다. 힉스 입자 발견에 중추 역할을 한 LHC는 내년까지 운영된 뒤 3년간 작동을 멈춘다. 이 기간 LHC 업그레이드를 거쳐 2040년대까지 운영된다. 이후 둘레가 91km에 달하는 차세대 입자가속기인 '미래원형가속기(FCC)'가 건설된다.
● LHC에서 FCC로...표준모형 넘어서기 도전
“FCC 규모는 LHC의 3배, 최대 출력은 7배에 달합니다. 물리학자들은 FCC가 표준모형을 넘어선 새로운 물리학의 지평을 열어줄 발견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지난달 11일 스위스 제네바 현지에서 만난 쟌 프란체스코 쥬디체 연구원은 FCC 건설의 의미를 이같이 설명했다. 그는 31년간 CERN 이론물리학부에 몸담으며 가속기 건설에 참여했다. LHC는 현재 최고 13.6테라전자볼트(TeV)에 달하는 충돌 에너지를 낼 수 있다. TeV는 빛의 속도에 가깝게 가속되는 입자의 질량 단위다. 에너지가 높을수록 더 무거운 입자를 만들 수 있다. 업그레이드되는 FCC는 100TeV의 충돌 에너지를 낸다. 표준모형이 설명하지 못하는 물리 현상의 발견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우주의 물질과 상호작용을 가장 잘 설명하는 이론은 표준모형이다. 표준모형은 우주가 17개의 근본 입자로 이뤄졌다는 이론으로 2012년 LHC에서 힉스 입자가 발견되면서 17개 입자가 모두 발견됐다. 하지만 표준모형은 기본 입자 중 하나인 중성미자에 질량이 있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며 우주 전체의 96%를 차지하는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도 설명할 수 없다. FCC는 표준모형을 넘어서는 현상을 설명하려는 '초대칭 이론’ 등에서 예견하는 새로운 입자나 차원 등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다.
계획대로라면 2040년대 중반에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전자와 양전자를 충돌시키는 ‘FCC-ee’가 가동되고 2070년에는 무거운 중입자(하드론)를 가속하는 ‘FCC-hh’로 넘어간다. FCC-ee를 짓는 데만 150억 스위스프랑(약 23조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막대한 비용이 들어감에도 FCC를 건설하는 이유는 힉스와 표준모형을 넘어선 ‘물리학의 미래’가 발견될 것이란 믿음 때문이다.
● FCC 건설 전, LHC 업그레이드...한국 참여도 높아
FCC로 넘어가기 전에는 고광도-LHC 프로젝트가 시행된다. 2026년부터 3년간 LHC 성능을 높여 힉스 입자와 같은 중요한 물리적 발견을 하겠다는 목표다. LHC에 있는 4개의 검출기에 대한 업그레이드도 이뤄진다. 한국은 2007년 ‘한-CERN 협력사업’을 통해 ALICE 검출기와 CMS 검출기 제작 및 연구에 참여 중이다.
ALICE는 빅뱅 직후를 재현하는 검출기다. 원시 우주에서 어떻게 오늘날과 같은 물질들이 생겼는지 탐구한다. 한국 ALICE팀인 ‘KoALICE’는 업그레이드 기간 ALICE 내부 추적 시스템(ITS)을 만든다. 전면 실리콘 반도체로 교체하기 때문에 반도체 강국인 한국의 활약이 기대된다. 실리콘 판인 웨이퍼를 종이처럼 말아 넣는 작업이 전 세계 최초로 시도된다. ALICE 업그레이드 코디네이터인 안드레아 다이네세는 “원통형 웨이퍼를 집어넣는 작업은 매우 도전적이면서 선구적인 기술”이라고 말했다.
한국 연구자들이 참여하는 또 다른 검출기인 CMS는 힉스 입자 발견 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힉스 입자는 생성 직후 붕괴되는데 CMS는 힉스가 남긴 생성물을 추적해 힉스 존재를 증명했다.
한국 CMS팀인 ‘KCMS’는 업그레이드 기간 CMS 검출기의 가장 큰 부피를 차지하는 뮤온 검출기 중 GEM과 MTD 제작 등에 참여한다. GEM은 다공성 구조를 가진 얇은 금속 포일을 활용해 정밀한 입자 궤적을 추적하고 MTD는 매우 짧은 시간 간격으로 일어나는 충돌 사건을 구분할 수 있는 '시간 분해능'이 뛰어나다. CMS 업그레이드 코디네이터인 프랑크 하르트만은 “GEM은 기존 킬로헤르츠(kHz)보다 1000배 높은 주파수인 메가헤르츠(MHz) 범위로 충돌을 감지하고 MTD는 1조분의 1초인 피코초 단위로 입자 이동 시간을 식별하는 새로운 기능을 갖고 있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물리 현상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한국 공헌도 높지만, 비회원국 한계 명확
CERN에서 만난 해외 연구자들은 한국이 ALICE 및 CMS 제작과 연구에 큰 역할을 해왔으며 업그레이드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CERN에서 국제 관계를 담당하는 이매뉴얼 체스멜리스 영국 옥스퍼드대 물리학과 교수는 “한국은 준회원국인 인도나 브라질보다 더 많은 연구에 참여한다”며 “ALICE, CMS, 이론물리학, 그리드 컴퓨팅 등 다양한 측면에서 기여도가 높다”고 말했다.
한국은 CERN 비회원국으로 현재 데이터 사용 ‘유저’로 분류돼 있다. CERN 연구에 대한 공헌도는 높지만 의사 결정을 내릴 권한이 없고 회원국과의 논쟁에서 밀리는 경우도 많다. 비회원국으로서의 한계가 있는 셈이다.
CERN 현지 전문가들은 한국이 CERN의 대대적인 업그레이드를 앞두고 준회원국이 되면 얻을 수 있는 이점이 있다고 말했다. 체스멜리스 교수는 “한국 기업들은 가속기 건설 참여 계약을 입찰할 수 있고 한국 국적자는 과학자, 인사직 등으로 CERN에 입사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학생들과 젊은 과학자들은 글로벌 과학 인재로 성장하는 기회를 얻는다. 한국이 과학기술 분야에서 ‘패스트 팔로우’를 넘어 ‘퍼스트 무버’로서의 지위를 가지려면 과학자들이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김태정 한양대 물리학과 교수는 “일반 유저인 한국은 의사 결정 과정에서 한국에 유리할만한 결정이 일어나게 할 수도,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확인할 수 없고 발언할 기회도 없다”며 ""준회원국이 되면 연구자들의 발언 및 연구 참여 기회가 넓어지고 정상급 연구소에 납품하는 실력을 갖는 한국 기업들이 생기는 등 다음 단계로의 새로운 기회들이 많이 열릴 것"이라고 말했다.
[제네바= 문세영 기자,제네바= 이창욱 기자 moon09@donga.com,changwook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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