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진화 추동한 인간의 ‘예지력’···예측할 수 있다면 변해야 한다[책과 삶]

정원식 기자 2024. 7. 1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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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지배자
토머스 서든도프·조너선 레드쇼·애덤 벌리 지음 | 조은영 옮김 | 디플롯 | 440쪽 | 2만5800원

많은 학자들은 열대 아프리카에 살던 영장류였던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의 운명을 좌우하는 지배자가 된 것은 ‘문화적 진화’ 덕분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문화적 진화를 추동하는 힘은 무엇일까.

호주 퀸즐랜드대 심리학과 교수 토머스 서든도프는 다른 심리학자 2명과 함께 쓴 <시간의 지배자>에서 ‘예지력(foresight)’이야말로 “인류 진화의 주된 원동력”이라고 말한다.

영화나 소설에서 예지력을 지닌 주인공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정확히 알고 있지만, 저자들이 말하는 예지력은 그런 초인적 능력이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상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능력을 가리킨다.

폭염이 닥칠 것을 예상해 에어컨을 수리해두는 일상적인 일부터 지구온난화에 대응해 각국이 화석연료 사용을 줄이는 등 글로벌 차원의 예방 노력은 모두 예지력의 소산이라고 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혜성의 지구 충돌 같은 확률적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한 위험에 대해서도 위기 시나리오를 짜서 대응책을 논의할 수 있다.

인간이 예지력을 지닐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정신이 “일종의 타임머신”이기 때문이다.

“이 타임머신을 타고 우리는 과거에 있었던 일을 한 번 더 경험하고,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없어도 미래를 상상한다. 사람들은 여름 휴가를 꿈꿀 때마다, 다가올 저녁 데이트 생각에 설렐 때마다, 시험 결과를 곱씹을 때마다 끊임없이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이동한다. 인간은 정신의 시간 여행자이기에 (중략) 미래를 자신이 계획한 대로 설계하며 기회와 위험을 사전에 대비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미래를 예측할 때 뇌는 실제보다 결과를 훨씬 더 나쁘거나 더 좋게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에게 미래 상황에 대비해 현재를 관리하도록 하는 강력한 동기 부여가 된다는 장점이 있지만, 반대로 과도한 걱정에 시달리게 만들기도 한다.

인간의 뇌 자체가 끊임없이 예측을 생성하는 시스템이다. 과거 신경과학자들과 심리학자들은 뇌가 단순히 감각기관으로 들어온 외부 신호를 처리하는 것으로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 가설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뇌가 신호를 처리해서 어떻게 반응할지 결정한다면, 신호 처리와 반응 결정 사이에 시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런 식이라면 “뱀이 머리를 쳐들었다는 걸 알아채기도 전에 발목을” 물리게 된다는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 뇌는 간단해 보이는 동작을 할 때도 정교한 예측 작업을 수행한다. “가볍게 던진 테니스공을 받는 일은 별다른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지만 상대가 던진 공이 나를 향해 날아올 때 재빨리 정확한 궤도를 예측해서 정확한 순간에 정확한 장소로 손이 찾아가게 해야 한다.”

예지력은 인간만의 고유한 특징이다. 침팬지도 인간처럼 도구를 만들고 동족을 죽인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고 일부 동물은 반복적인 상황에 대비하는 듯한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저자들은 그러나 “먼 미래의 사건에 대한 정신적 시나리오를 생성하거나 소통하고 또 그것들을 서사로 연결하여 더 나아가 상호배타적 미래를 추론한다는 설득력 있는 증거는 없다”고 말한다.

인간의 예지력은 달력, 시계, 문자와 같은 도구들을 통해 더욱 강해지고 정교해졌다.

동물과 달리 인간의 몸에는 천체의 운행과 계절의 변화에 조응하는 시스템이 내장돼 있지 않다. 쟁기로 언제 밭을 갈고 언제 씨앗을 뿌려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것은 우리의 본능이 아니라 달력이다. 달력을 통해 예측의 정확성이 증가하면서 “전례 없이 복잡하고 규모가 큰 협동 활동을 조율할 수 있게” 되었다.

호모 에렉투스가 제작한 양날손도끼. 디플롯 제공

시계는 시간을 더욱 정교하게 통제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협력을 증진했다. “시간을 재는 방식을 합의함으로써 인간은 장기든 단기든 일정을 계획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을 하고 싶고 어디에서 하고 싶은지에 합의하는 것도 좋지만, 언제 하고 싶은지에 합의하지 못하면 계획 자체가 쉽게 무산된다.”

애초 상거래를 기록하기 위해 발명된 문자는 “거래 당사자들을 정확한 조건에 묶어둔 덕분에 다양한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큰돈이 오가는 위험도 높은 협력”을 가능하게 했다.

저자들은 미래를 예견하고 통제하려는 인간의 욕망이 문명을 일궈냈지만 그 결과 현대 문명이 생태적 재앙을 초래했음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구는 지난 1만 년 동안 홀로세라는 안정된 상태에 있었으나 인간의 파괴적 행위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티핑포인트에 도달했다.

기원전 1600년경 제작된 천문 기구 네브라 하늘 원반. 디플롯 제공

저자들은 “자기 행동의 장기적 결과를 예견할 수 있는 유일한 생물로서” 우리가 당장 방향을 돌려야 한다고 역설한다.

“우리가 자연에 대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실, 예컨대 동물과 식물, 비와 계절과 같은 것들은 우리가 좀 더 지속 가능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급속히 변화할 것이다. 광범위한 탄소 방출, 산림 파괴, 플라스틱 오염처럼 해롭다고 알려진 활동을 대폭 줄이지 않았을 때 세계가 어떻게 될지 상상해보라. 만약 우리가 지금 의존하는 에너지원의 전면적인 변화를 시도하지 않고, 서식지를 보호하거나 회복하려 하지 않고, 지속 가능한 경제 체제를 세우는 데 실패한다면, 우리는 홀로세의 상대적인 안정성을 언제까지나 갈망하게 될 것이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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