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지 않은 포퓰리즘 [박권일의 다이내믹 도넛]
박권일 | 독립연구자·‘한국의 능력주의’ 저자
“포퓰리즘”은 심한 욕이다. 한국 정치에서 특히 그렇다. 국민의힘 지지자가 더불어민주당을, 민주당 지지자가 국민의힘을 포퓰리즘이라고 욕한다. 이때 본인 주장은 지동설급 진리지만 상대 주장은 천동설급 오류다. “전 국민한테 25만원을 주자고? 저걸 말이라고 하나?” “이대남한테 편승해 여성가족부 폐지? 정치가 장난이야?” 단어 빈도만 따지면 가히 ‘대포퓰리즘 시대’다.
유럽을 보면 더 실감이 날 수 있다. 지난 6월 유럽의회 선거에서 극우 성향 의석이 20%를 점했다. 2022년 스웨덴 총선에선 극우 정당인 스웨덴민주당이 제2정당이 됐다. 얼마 전 프랑스 조기 총선에서는 중도파 연합이 가까스로 극우의 집권을 막았다. 심지어 홀로코스트 가해국 독일에서도 극우 정당이 약진하고 있다. ‘압력’이 높아진 건 분명하며 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아직 포퓰리즘 시대는 본격적으로 오지 않았다. 앙시앵 레짐, 구체제에 여전히 힘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구체제는 ‘극단적 중도’(The Extreme Centre)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저널리스트 타리크 알리의 개념으로, “중도 좌파와 중도 우파가 현 상태의 유지를 공모한 상태”를 뜻한다. 영국 보수당과 노동당,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 한국의 국민의힘과 민주당이 정확히 여기 해당한다. 대표 사례가 영국 노동당 전 총리 토니 블레어다. “부시의 푸들”이란 별명으로 유명한 그는 “최고의 보수당 총리”라는 별칭도 갖고 있는데, 블레어 이후 영국 노동당은 ‘신노동당’으로 따로 명명될 정도로 성격이 다른 당이 됐다. 미국 민주당은 총기, 낙태 등 특정 이슈에서 공화당과 입장 차이가 있지만 군사패권주의나 경제 정책에서 크게 다르다 보기 어렵다. 한국도 사회경제 정책에서 국민의힘과 민주당은 별 차이가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좌파 신자유주의”는 ‘한국형 극단적 중도’를 상징하는 말이었다.
극단적 중도파의 특징 중 하나는 포퓰리즘에 대한 이율배반적 태도다. 입으로 포퓰리즘을 비난하며 스스로를 현실주의자로 포장하지만 실제로는 무책임한 포퓰리즘적 정책을 뻔뻔하게 내놓는다. 그럼에도 사회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는다. 갈수록 포퓰리즘이 뜨는 건 그런 무능한 위선과 ‘내로남불’ 정치에 사람들이 아주 넌더리가 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40년 넘는 기간 동안 전세계에 몰아친 신자유주의 광풍이다. 제조업 노동자는 일자리를 잃었고, 서비스 노동자는 프레카리아트(불안정노동계급)가 되었으며, 농민은 땅을 갈아엎고 트랙터 시위에 나서야 했다.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는 그 과정을 “강탈(을 통한 축적)”이란 말로 요약한다. 극단적 중도파는 이를 저지하기는커녕 태연히 방조하거나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그 결과 다수 인민의 고통은 극심해졌다. 극우 포퓰리즘은 그 틈에서 성큼 자랐다. 그들은 이민자 같은 ‘내부의 적’을 쫓아내고 ‘우리’의 원래 지위를 회복하자고 역설하며 분노한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다.
언론은 극우 포퓰리즘에 주목하지만 그건 절반의 진실이다. 좌파 포퓰리즘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그리스의 시리자, 스페인의 포데모스가 대표적 예다. 극우 포퓰리즘이 공동체 내부를 갈라치는 ‘배제적 포퓰리즘’(Exclusive Populism)이라면, 좌파 포퓰리즘은 모두를 포용하는 ‘포괄적 포퓰리즘’(Inclusive Populism)이라 할 수 있다. 정치학자 잉글하트와 노리스의 연구에 따르면, 1960년대 이후 유럽에서 우파 포퓰리스트 정당이 얻은 표는 2배, 좌파 포퓰리스트 정당이 얻은 표는 5배 늘어났다고 한다(‘Cultural Backlash’, 2019).
누군가는 “포괄적 포퓰리즘이란 결국 가진 자를 배제하는 것 아니냐”고 비난할지 모른다. 그렇지 않다. 가진 자들이 배제되거나 차별받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소수자·약자와 달리 그들은 막대한 자원과 발언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포괄적 포퓰리즘은 가진 자가 범죄를 저질렀을 때 못 가진 자와 ‘똑같이’ 처벌되도록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다. 즉, 민주적 평등 원칙에 따라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누구도 우대하지 않을 뿐이다. 그래도 포퓰리즘보다 극단적 중도가 나을까? 그럴지 모른다. 분명한 건 ‘포퓰리즘 모멘트’를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단지 ‘어떤 포퓰리즘이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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