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센터 상담원이 콜센터에 ‘갑질’ 전화 거는 풍경

차형석 기자 2024. 7. 12. 0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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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한승태는 여러 직업 세계를 체험한 후에 그 경험을 담아 글을 쓴다. 최근 세 번째 노동 에세이를 펴냈다. 이번에는 인공지능 등 기술 발달로 대체 가능성이 높은 네 가지 직업이다.
책 출간 후 얼굴이 알려져 구직 과정에서 퇴짜를 맞는 일이 생겼다. 그 이후로 작가는 언론 인터뷰에서 사진 촬영을 꺼린다.ⓒ시사IN 조남진

작가 한승태(필명·42)는 온몸으로 글을 쓴다. 그는 여러 직업 세계를 체험한 후에 르포를 쓴다. 대학 졸업 이후에 생계와 집필을 위해 꽃게잡이 배, 편의점과 주유소, 돼지농장, 자동차 부품 공장 등에서 일했다. 그 경험을 담아 첫 책 〈퀴닝〉(〈인간의 조건〉 개정판 제목)을 펴냈다. ‘식용 고기’를 기르는 농장 아홉 군데에서 일한 후에는 〈고기로 태어나서〉를 썼다. 그 책으로 한국출판문화상 교양 부문을 수상했다. 한국에서 보기 드문 형태의 글쓰기 방식이다. 작업 스타일이 독특해 저자 이름을 가려도 필자를 추측할 수 있을 듯하다. 그래서 ‘한승태라는 장르’(출판사 보도자료 중)라는 표현은 적합하다.

최근 펴낸 〈어떤 동사의 멸종〉은 그의 세 번째 노동 에세이다. 콜센터 상담, 택배 상하차 작업, 뷔페식당 주방 일, 빌딩 청소. 2020년부터 2022년까지 그가 한 일이다. 전화하고, 운반하고, 요리하고, 청소하는 일. 우리 주변에 흔하게 볼 수 있지만 인공지능(AI) 등 기술 발달로 인해 대체 가능성이 높아진 직종을 골랐다. 책 제목은 어떤 직업의 소멸을 뜻한다. 6월24일, 한승태 작가를 만났다. 동사 세 개를 중심으로 인터뷰를 정리했다.

“끊다” 그가 겪은 직업 중 가장 힘들었던 일은? 콜센터 상담이었다. 나중에 묘비 문구를 적을 때, 이름 옆에 “콜센터가 제일 힘들었다”라고 써야겠다고 마음먹을 정도였다. “그 일을 또 할 수 있을까 자문해본다. 꽃게잡이 배도 한 번 더 탈 수 있다. 그런데 콜센터는 절대 다시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헤드셋을 통해 쏟아지는 모욕과 냉대를 견뎌내야 했던 건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처절한 경험이었다.

콜센터 상담 때, 남들이 보기에는 쓴웃음이 나올 만한 상황이었지만 어느 ‘미종료 통화’에서 그는 깊은 좌절감을 느꼈다. 그날, 물품 취소를 요청하던 고객은 ‘당신들 팀장보고 처리하라 해!’라며 ‘대나무숲을 호령하는 한 마리의 호랑이처럼’ 말했다. 상담사는 먼저 전화를 끊을 수 없다. 그게 룰이다. 상담이 끝나도 고객이 전화를 먼저 끊기를 기다려야 한다. 통화 종료를 기다리는데, 방금까지 목소리를 높이던 그 고객의 다른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렸다. “감사합니다. ○○은행, 상담원 ○○○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그 고객도 콜센터 상담사였던 것이다. 블랙 코미디 같은 상황. 그는 ‘미종료 통화’를 끊어야 했다.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웹툰·드라마 제목이 순간 떠올랐다. 빠져나올 수 없는 어떤 미로에 갇혀 있는 것 같았고, 끝을 볼 수 없는 구덩이에 빠져 있는 기분이 들었다. 목격하지 말아야 될 걸 목격한 느낌이 들어서, 전화를 바로 끊을 수밖에 없었다.”

“적다” 사라질 가능성이 높은 직업의 풍경을 묘사하면서 그는 만가를 흥얼거리는 장례식을 떠올렸다. 노동의 공간에서 펼쳐지는 고통과 욕망, 그것들의 색깔, 냄새, 맛을 기록하고 싶었고, 이번 책은 사라지는 직업에 대한 따뜻한 작별 인사라고 여겼다.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노동·공간임에도 새롭고 흡인력 있게 읽히는 건 그가 채집한 디테일 덕분이다. 업계에 있지 않으면 모를 구체적 내용들이 담겨 있어 생동감을 더했다. “시시콜콜한 세부 사항을 수집하는 걸 좋아한다. 작가로서 나만의 무기 같은 것이다. 어떤 속사정 같은 걸 알아야만 전체를 알게 됐다는 개인적 강박 같은 게 있다. 그걸 알아야 전체를, 본질을 말할 수 있을 거 같은 심리가 있다.”

차곡차곡 디테일을 쌓을 수 있는 비결이 있다면, 바로 일기다. 일할 때마다 일기를 썼다. 쓰는 방식이 독특하다. 그날 가장 중요하다고 느낀 대화를 먼저 적었다. “대화 중심으로 기억을 많이 하는 편이다.” 대화를 적고, 누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그 사람은 어떻게 생겼는지, 그 사람이 있던 장소는 어떤 곳이었는지 덧붙였다. “세어보지 않았는데, 그런 일기가 스프링 노트로 30~40권 되는 것 같다.” ‘대화 일기’를 날짜순으로 정리했다. 몇 월 며칠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표로 분류한 다음에 책 얼개를 짰다.

한승태 작가가 일할 때마다 적은 ‘대화 일기’. ⓒ한승태 제공

“읽고 쓰다” 대학 문학 동아리에서 활동했던 그는 교과서에 언급된 작가들의 작품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특히 이청준과 채만식의 작품을 좋아했다. “이청준 작가의 서사가 무척 독특하다고 느껴 중·단편을 즐겨 읽었다. 또 그 어떤 한국 소설에서도 채만식의 유머를 발견한 적이 없었다. 〈태평천하〉 같은 작품이 왜 한 권으로 끝나나 아쉬울 정도였다.” 책에서 엿보이는 ‘한승태식 유머’의 배경이다.

노동 에세이를 쓰면서는 조지 오웰과 잭 런던의 작품을 자주 읽었다. 조지 오웰은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면서 파리·런던의 도시빈민이 먹고사는 이야기를 썼고(〈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잭 런던은 빈곤 지역에 잠입해 ‘체험하며’ 부랑자들과 노동자들의 삶을 기록했다(〈밑바닥 사람들〉).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일하며 먹고사는지, 그런 내용이 저의 감성이나 문학적 욕구를 자극했다. 두 작가의 책을 읽으면서 체험을 기반으로 해 글을 쓰는 문학계 전통이 있구나 싶었다. 내 책도 그런 전통의 일부분이라는 마음으로 글을 쓰게 되었다.”

한승태 작가는 논픽션을 ‘공동체의 투병기’라고 말한다. 고통을 겪은 이가 그 고통을 잘 모르는 이에게 전하는 투병기에서 텍스트의 힘과 ‘공감’을 느낀다. “투병기에 어떤 해결책이 있는 게 아니다.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하지만 논픽션이나 르포가 예컨대 콜센터 감정노동자들이 느꼈던 고통에 공감해줄 수는 있지 않을까. 삶의 모습들을 조각조각 모으고 그 맥락을 연결해 한국 사회의 정신적 지도를 그려보고 싶다.”

차형석 기자 ch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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