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에너지 괴짜가 나와야 한다”
석광훈 에너지전환포럼 전문위원은 급증하는 전력수요에 대비하는 동시에 탄소중립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달성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변화로 ‘전력시장 개혁’을 말한다. 특히 한국전력을 통한 전력 판매 독점제도가 전기요금을 ‘선심성 복지정책’으로 한정시켜 에너지전환시대에 필요한 변화를 무용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석광훈 연구위원은 ‘전력시장 개방’이라는 오래된, 하지만 여전히 낯선 의제를 ‘AI 시대’를 맞이하는 현재의 과제로 던졌다.
수도권에 과부화된 전력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분산에너지활성화특별법(분산에너지법)’이 시행됐다.
정부에서는 ‘전력계통 영향평가’ 등을 통해 데이터센터가 수도권에 신규로 설립되는 것을 강력하게 통제하고 있다. 그런 만큼 대규모로 전력을 사용하는 데이터센터 등은 지방 이전이 불가피할 거라고 본다. 하지만 분산에너지법 등을 통한 지역별 차등요금제가 기업들의 지방 이전에 유인책이 된다거나, 재생에너지를 활성화하는 기반이 될 거라고 지금 단계에서 전망하기는 어렵다.
이유가 뭔가?
한국은 발전 부문 외에는 한전의 시장 독점 체제로 운영되고 있는데, 발전 부문 역시 80% 이상이 한전의 자회사가 들어와 있어 사실상 경쟁체제라고 할 수 없다. 분산에너지법이 시행된다고 하지만 한전의 이런 시장 지배력이 그대로 유지되는 한, 다양한 발전사업자들이 자율 경쟁을 통해 에너지 효율성을 높이는 구조적 변화를 이끌기는 어렵다. 예컨대 이명박 정부 당시 제주도에서 추진했던 ‘스마트그리드 단지’ 역시 정보통신 업체들 주도로 재생에너지 맞춤형 요금제를 도입하도록 해 가격경쟁을 시키겠다는 취지로 시작됐지만 한국전력이 전력시장 운용, 전력 계통 등 모든 분야에 뛰어들며 ‘한전이 심판과 선수를 모두 한다’는 비판이 나왔다. 결국 민간사업자들의 참여가 흐지부지됐고 사업 종료 후에 아무런 변화도, 교훈을 남기지 못했다. 분산에너지법이 시행된다 해도 한전의 독점적 지위는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큰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한전이 전력시장을 독점하는 게 왜 문제인가?
저렴한 전기요금이 한때는 정치권의 선한 의지가 반영된 ‘복지’였으나, 이제는 정권에 유리하게 여론을 움직이는 도구가 되고 있다. 게다가 전기요금 인하는 소득역진성이 강해서 전기를 많이 쓸수록 수혜가 커진다. 일반 시민들이 아니라 기업이 이득을 보는데도 이런 허점이 간과된 채 ‘전기는 공공재’라는 명분으로 한전의 전력시장 독점 체제가 강화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전력산업 구조가 전기라는 공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변화를 가로막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는 RE100이라는 외부적 압력과 한전 부채 202조원이라는 내부적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결단이 필요하다. 전기 판매시장을 개방해 발전사업자들이 소비자 맞춤형·IT 결합형 요금제를 개발하고, 에너지신산업을 스스로 개척해 에너지 전환을 이끌 기회를 줘야 한다. 실제 OECD에서 멕시코와 한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가 전력시장을 개방했다.
발전사업자가 소매 전력시장에 참여할 때 어떤 변화를 이끌 수 있나?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에너지 기업이 있다. 영국의 ‘옥토퍼스 에너지(Octopus Energy)’다. 2015년 창업한 옥토퍼스 에너지는 현재 전력시장 점유율 1위, 영국 최대의 에너지 공급업체가 됐다. 이곳은 개인의 태양광·스마트가전·배터리·전기차 등의 에너지 생산과 소비량을 통합 모니터링 하는 스마트제어 프로그램과 변동형 전기요금제를 무기로 기존 전기사업자들을 밀어냈다. 옥토퍼스의 변동형 요금제는 전력망 재생에너지 비중에 따라 낮시간과 새벽에는 저렴하게, 저녁 피크시간에는 높게 전력값이 변동하는 요금제다. 한전도 운영해온 심야전기처럼 단순한 요금제부터 하루 전 도매 전기요금에 연동해 다음 날 24시간 동안 30분 단위 요금 일정을 공지해주는 동적요금제(dynamic tariff)까지 3~4개 요금제를 운영한다. 소비자들에게 태양광 패널 설치를 지원하고, 유휴 에너지를 저장할 배터리도 공급했다. 그러면서 소비자가 전기를 판매할 수 있는 솔루션을 제공했다. 그 결과 옥토퍼스 에너지 소비자들은 고정 전기요금을 쓰는 소비자들보다 1년에 평균 절반가량 저렴한 요금을 낸다. 지난 4월, 〈블룸버그〉에서는 옥토퍼스 에너지의 전력 서비스를 경험한 소비자들이 이웃들에게 ‘에너지 괴짜(energy nerds)’라 불리며 에너지 전도사 역할을 하고 있다는 기획기사를 내기도 했다. 이 업체는 현재 미국, 유럽, 오스트레일리아, 일본 등에 지사를 두고 영국에서 성공한 모델을 세계로 확산시키고 있기도 하다.
한국에도 ‘에너지 괴짜’가 나올 수 있을까?
우리도 기술적 역량은 부족하지 않다. 국내 가전사들과 정보통신 업체들은 태양광·배터리·스마트 홈기기 모두 고품질로 제조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도 국내의 폐쇄된 전력시장과 고정 요금제로 인해 전력 거래 경험을 축적할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상황이다. 에너지전환 시대, 전력시장에서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기기를 제조하는 역량을 넘어 양방향 전력 거래의 경험과 데이터를 축적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소비자 역시 전력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프로슈머가 되는 경험을 쌓을 수 있다. 이런 경험을 해본 소비자와 1년 내내 정해진 요금을 쓰며 전력시장의 구조를 이해할 기회도 갖지 못한 소비자는 사고방식도, 행동양식도 다르다. 누가 적극적으로 에너지전환과 탄소중립에 목소리를 내는 ‘에너지 시민’이 될 수 있겠나?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김다은 기자 midnightblu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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