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운 산에 마음도 눕히러 가는 곳 [책&생각]

한겨레 2024. 7. 12.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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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입구 책방 안내판 위로 삼나무 가지가 늘어져 가지치기를 하고 있을 때, 지나가던 마을 삼춘이 반가운 얼굴로 말을 걸어오셨습니다.

제주의 중산간지역인 와산리에 8년 전 터를 잡고 살다가 올해 초에 책방을 열면서 두 딸네의 의견대로, '와산'의 '누울 와(臥)'자를 풀어 써넣어 '누운산책방'이라고 이름을 붙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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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책방은요 누운산책방
이웃 유채꽃밭에서 바라본 누운산책방 전경. 이현숙 제공

골목 입구 책방 안내판 위로 삼나무 가지가 늘어져 가지치기를 하고 있을 때, 지나가던 마을 삼춘이 반가운 얼굴로 말을 걸어오셨습니다. “‘누운산책방’이 뭐 하는 곳인가 궁금했네. 누워서 뭘 하는 데인가?”

제주의 중산간지역인 와산리에 8년 전 터를 잡고 살다가 올해 초에 책방을 열면서 두 딸네의 의견대로, ‘와산’의 ‘누울 와(臥)’자를 풀어 써넣어 ‘누운산책방’이라고 이름을 붙이게 되었습니다. ‘서점’이란 명칭에 익숙한 분들이 많은데다가, ‘누운 산책방’으로 읽는 분들도 종종 계셔서, 책을 파는 곳이라고 설명을 드려야 할 때도 있었지요.

‘누운산책방’이라는 이름에는, 손님들이 책방에 머무시는 동안 느끼셨으면 하는 저의 바람이 담겨 있습니다. 상승과 성취를 향해 수직선을 따라 뛰어올라가던 일상에서 내려서서 잠시 멈추어 서기를, 지친 마음을 눕히고 가쁜 숨을 돌리기를, 존재에 대한 답을 찾아 눈을 밝힐 수 있기를, 높이 쌓아 올린 울타리를 거두어 내고 서로 손 내밀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지요.

후박나무가 내다보이는 동쪽 창과 서가. 이현숙 제공
누운산처럼 늘어선 책꽂이와 그림책들. 이현숙 제공

사람마다 인연의 때가 다 달라서 섣불리 책을 권하지는 못합니다. 다만, 고래의 등 같기도 하고 나직한 언덕 같기도 한 책방의 로고와 비슷한 모양새가 되도록 책꽂이들을 배치해 놓았는데, 책꽂이마다 어떤 주제의 책들이 진열되어 있는지를 안내해 드리곤 합니다. “이쪽 책꽂이에는 누구나 언젠가 맞이하게 될 죽음에 대한 책들이 있어요.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에 대한 책들, 사별의 아픔을 위로해주는 책들, 사랑하는 사람을 자살로 보낸 분들이 충분한 애도를 거쳐 어두운 동굴에서 나오도록 도와주는 책들, 그리고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영혼의 세계를 얘기해주는 책들이에요. 그 옆으로는 명상과 마음공부에 대한 책들, 이어지는 책꽂이에는 심리학, 여성, 반려동물, 식물과 자연과 지구환경, 마을공동체와 난민에 대한 책들이 있어요”라고 말이지요.

책방 분위기가 화사하다고 얘기하시곤 하는데, 여러 개의 책상 위에 표지가 보이도록 가득 진열된 그림책들의 다채로운 색상 때문인 것 같습니다. 짧지만 많은 상징과 의미를 담고 있는 글과 멋진 그림들이 어우러진 그림책을 통해 휴식과 위로와 치유가 일어나는 것을 경험합니다.

죽음과 관련된 자신의 체험들을 이야기 나누는 죽음카페. 이현숙 제공
김추령 작가의 기후위기 강의. 이현숙 제공
임경희 선생님의 그림책 강의. 이현숙 제공

궂은 날씨로 어둑한 초봄이었어요. 젊은 여성 두 명이 책방에 들어와 말없이 책을 구경하고는 고른 책들을 들고 계산대로 왔는데, 자살로 오빠를 보낸 여동생이 쓴 문고본 크기의 책도 있었어요. 그 책을 집어 들게 한 힘든 일을 겪었나 보다고 짐작되었지만 “요즘 자살로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많아서 안타까워요”라고 에둘러 말을 건넸죠. 순간 한 사람이 왈칵 울음을 터뜨렸어요. 또 한 사람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친구의 1주기를 앞두고 있다고 했죠. 저는 죽음학 공부를 통해 알게 된 이야기들을 들려주며 위로와 살아갈 힘이 전해지길 바랐어요. 책방을 떠나기 전, “안아 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청했고, 저는 잠시 두 사람의 엄마가 되어 안아주었습니다. 잊지 못하지요. 책방을 왜 열었는지, 그 의미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으니까요.

제주/이현숙 누운산책방 책방지기

누운산책방
제주시 조천읍 와선로 164-24
instagram.com/nuunsan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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