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년 응전 엄선한 한국여성문학사…논쟁을 기다린다

임인택 기자 2024. 7. 12.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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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생각]
19~20세기 여성문학 7권으로 묶은 선집
12년 만 완수…여성문학사연구모임 주도
기준·규모·완결성 전례 없어…정전 표방
기고문 ‘여학교설시통문’을 실은 1898년 9월8일치 황성신문. 두 기혼여성이 여학교 신설과 교육 필요성을 알렸다. 이번 출간된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공론장에 글쓰는 여성의 등장’이라며 이 글을 근대 여성문학의 원류로 재평가했다. 최초 근대 여성소설인 나혜석의 ‘경희’보다 20년 앞선다. 오른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강경애·최정희·나혜석·임옥인·임순득·백신애·김일엽·송계월·모윤숙이 신문을 감싸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한겨레 자료사진. 그래픽 성기령 기자 grgr@hani.co.kr

한국 여성문학 선집(전 7권)
여성문학사연구모임 엮음 l 민음사 l 각 권 1만5000원~2만4000원

“이혼의 경력을 무슨 훈장처럼 가슴에 걸고 남성들의 위선과 이기와 폭력성과 권위주의를 폭로하고 그들과 싸운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는다. 이혼은 ‘절반의 성공’쯤으로 정의되고 간음은 ‘황홀한 반란’으로 미화된다. 그리고 자못 비장하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외친다.”

이런 서술을 담은 소설의 제목은 ‘선택’. 작가 이문열(76)의 1997년 작품이다. ‘문단 엘리트’의 선구적 백래시로, 1990년대 한국 여성문학의 기세를 반증한다. 그해 대구지하철공사는 역무직 신입 공채에 여성을 원천 차단했는데 언어도단의 시대를 여성문학이 언어로 견딘 격이다.

마침내 여성문학 연구자들은 새 ‘정전’을 만들어 규정하고자 한다. “1990년대 여성문학은 한국문학사에서 처음으로 주변적 위치를 넘어 문학장의 중심부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이명호 교수)

이번주 7권으로 묶여 출간된 ‘한국 여성문학 선집’(이하 ‘선집’) 얘기다. 지난 100여년 한국 근현대 여성문학을 열고 다지고 이끈 작가 작품을 엄선해 계보화한 대형 기획물이다. 남성·주류문학/문단에 의해 주변화해온 여성문학의 오랜 응전을 톺고, 이른바 ‘대항 정전’을 표방한다.

“여류문학”의 낙인이 70년대까지만도 강고했던 창작 세계의 이야기일 수만은 없다. 학계에선 90년대 초까지만도 “여성문학을 강의실에서 배우기 어려웠다.” 연구할라치면 “2류 연구자”가 될 각오가 요구됐다. 읽지 않으면 쓰이지 않은 것이라 할 터, 여성문학사연구모임이 12년 공력 들인 ‘선집’은 전례 없이 집요해서 전례 없이 전방위적이다. 김양선 한림대 교수, 김은하·이명호 경희대 교수, 이선옥 숙명여대 교수, 이경수 중앙대 교수, 이희원 서울과기대 명예교수가 엮었다.

‘한국 여성문학 선집’(7권)을 엮은 이선옥(숙명여대)·이희원(서울과기대)·김양선(한림대)·이명호·김은하(경희대)·이경수(중앙대) 교수(왼쪽부터). 민음사 제공

작가만 전체 110명(각 권 중복 포함)이 선발됐다. 시 64편, 소설 63편, 희곡 6편, 노동수기 3편, 평론·시평·기고·기록 등 20꼭지 이상이 작가·작품에 관한 비평적 소개 아래 구성됐다.

“사나이가 위력으로 (…) 여자는 안에 있어 밖을 말하지 말며 술과 밥을 지음이 마땅하다 하는지라. 어찌하여 사지 육체가 사나이와 일반이거늘 (…) 죽은 사람 모양이 되리오.”

‘선집’은 근현대 여성문학의 원류를 기존 연구로부터 일단 20년 앞당긴다. 1898년 9월 황성신문과 독립신문에 실린 기고 ‘여학교설시통문’이 근거다. 여학교 신설과 교육 필요성을 알린다. 투고자는 기혼 여성 김·이씨로, ‘최초 여성권리 선언문’이란 역사적 의의에 “공론장에 글쓰는 여성의 등장”이란 문학적 의미를 더한다. 이는 ‘문학’이 제도와 장르를 넘어 ‘주체적 글쓰기’로 확장됨을 전제한다. 당시 두살이었을 나혜석(1896~1948)은 20년 뒤 그간 원류로 평가되던 근대 최초 여성소설 ‘경희’(1918)를 쓰고, “경희도 사람이다”라 쓴다.

강경애(1906~1944)는 항일 투쟁과 여성을 다룬 ‘소금’(1934)이 그간 알려졌다. ‘선집’은 더불어 식민지 노동 현실을 여성 관점화한 ‘인간문제’(1934)를 부각한다. “치열한 작가정신”을 구현했던 강경애 바로 다음, 체제 복무하여 격동기 드물게 “문학 권력”을 구가한 최정희(1906~1990)와 그의 초기작 ‘지맥’(1939)이 소개되는 책이 제2권 ‘1920년대 후반~1945년 계급·민족·여성의 교차’다. 최정희의 딸 김채원(1946~)이 소설 ‘겨울의 환’으로 6권에 선별된다.

‘여성문학의 암흑기’인 해방 이래 1950년대(3권)는 강신재(1924~2001)로 설명될 만하다. 특히 ‘해방촌 가는 길’(1957)은 ‘양공주’를 주인공 삼되 “가부장적 민족주의 서사가 아닌 강인한 생존주체로서” 그린다. 정비석의 ‘자유부인’(1954)이 풍미한, 작중 탈선한 교수 부인 오선영은 가부장의 전통 체제로 결국 속죄 ‘귀순’해야 했던 시대, 강신재의 차별점이다. 게다 그것은 단절되지 않는다. 일테면 이연주(1953~1992)의 시집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1991)으로까지 계보화하기 때문이다.

박경리(1926~2008)가 1950년대 단편 활동에 이어 장편을 집중 발표하는 1960년대엔 박순녀(1928~)도 있다. 1962년 단편 ‘아이러브유’이다. 일제강점기 여학교를 회상하며 식민 체제를 고발하고, 탈식민 여성의식을 가진 불온한 여성 주체로까지 나아간다. 황순원은 “동화 같다”고 평했다.

시의 계보에선 해방 후 강은교와 문정희를 지나 1970년대 김승희, 1980년대 고정희, 최승자, 김혜순 등에 의해 이미 정점을 찍었다 해도 무방하겠다. 이후 남성 평단은 “기존의 ‘여류’라는 말이 더 이상 존재 가치가 없음을 증명해주고 있다”고 쓰지만, ‘선집’은 이 정도 평가에 동의하는 것 같지 않다.

이번 기획의 가장 도드라진 특징을 여성노동 수기의 저자 장남수(1958~)의 등장으로 설명 가능해 보인다. ‘선집’의 새 기준으로 ‘노동하는 주체의 글쓰기’ 계보화를 명시하기 때문이다. 1980년대는 여성 자전적 글쓰기를 문학적으로 성취시킨 ‘엄마의 말뚝 1·2’(1980~81)의 박완서(1931~2011)가 연다. 날것의 노동자 버전이 장남수의 ‘빼앗긴 일터’(1984)일 것이다. 80년대 이 두 담론이 ‘개인’ ‘욕망’과 만날 때, 1990년대 우뚝 선 신경숙(1963~)의, “가장 감동적인 노동소설”(백낙청)로도 평가받은, ‘외딴방’(1995)이 있지 않을까.

‘페미니즘의 봉기’로까지 얘기되는 1990년대의 대변자를 한둘 꼽긴 어렵다. 실제 제7권의 작가 수가 최다다. 그래 봐야 26명. 응당 호응과 논쟁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정전 무용론’부터 소환될지 모른다. 여성 영문학 정전 격인 ‘노턴 여성문학 앤솔러지’에 엘리자베스 비숍(1911~1979)은 제 시 앞에 의견을 달았다. “두 개의 성별로 나누는 것은 예술과 무관한 가치를 그 작품 안에 가두는 일이다.”

책임연구자 김양선 교수에게 ‘지지 대 논쟁’의 희망 비율을 물었다.

“지지가 6, 논쟁이 4면 좋겠다. 두려운 마음으로 있다. 우리가 판을 깔았으니 원재료 삼아 다른 해석, 다른 발견이 이어질 거라 기대한다.”

문학판이 살아 있다면, 지지를 가장한 무관심, 논쟁을 가장한 백래시로 퉁쳐지진 않을 것이다. 이문열의 ‘선택’도, 이번 ‘선집’도 모두 민음사에서 나온 점 또한 흥미롭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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