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계집’에서 삼국지의 ‘히로인’으로 [책&생각]
삼국지 히로인 재해석한 신작
폐월; 초선전
박서련 지음 l 은행나무 l 1만6800원
박서련의 첫 책은 2018년 제2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인 ‘체공녀 강주룡’이었다. 1930년대 실존 여성 노동운동가의 사랑과 투쟁을 그린 이 소설은 한 힘 있는 여성 작가의 탄생을 알리는 고고성과도 같았다. 과연 그 뒤로 박서련은 여러 권의 장편과 소설집을 부지런히 내놓으며 한국 소설의 중추를 이루는 작가로 성장했다.
그의 새 장편 ‘폐월; 초선전’은 다시 역사 속 여성 인물에 주목한 작품이다. ‘역사 속’ 인물이라고는 했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인 초선은 사실 가공의 존재에 가깝다. 중국 역사서 삼국지 위서 여포전에 짧게 언급된 “동탁의 시비(侍婢, 계집종)”를 삼국지연의의 작가 나관중이 왕윤의 시비로 각색해 동탁과 여포 사이를 이간질하는 계략에 동원하면서 초선은 삼국지의 히로인이라 부를 법한 자리로 올라선다. 뿐만 아니라 초선은 실존 인물들인 서시, 왕소군, 양귀비와 함께 중국 4대 미녀로까지 꼽히는데, 이들을 일컫는 ‘침어낙안’(浸魚落雁, 물고기가 가라앉고 기러기가 떨어질 정도의 미모), ‘폐월수화’(閉月羞花, 달을 가리고 꽃을 부끄럽게 만드는 미모) 중 초선을 가리키는 표현 ‘폐월’이 소설 제목이 되었다. 소설 속에서 왕윤은 “네 생김이 그처럼 눈에 띄어 달조차 지워버린다는 말이다”라며 초선의 미모를 추어올린다.
박서련의 소설은 초선이 미모를 무기로 동탁과 여포를 이간질함으로써 여포로 하여금 자신의 양아버지이자 절대 권력자였던 동탁을 죽이도록 만든다는 삼국지연의의 틀을 대체로 좇는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초선은 단순히 왕윤의 지시에 따르는 수동적 존재로 그려지지 않고 주체적으로 모의를 하고 함정을 파는 등 적극적인 면모를 보인다. 초선의 시점을 택한 일인칭 서술은 그의 그런 성격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킨다.
주인공 초선의 성격은 어릴적 첫 기억에서부터 두드러진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일은 누군가 나를 잡아먹으려 하던 일이다.” 극심한 기근이 닥치자 저를 키우던 어른들이 이웃집과 서로 아이를 바꾸어 잡아먹기 위한 거래를 했는데, 어린 초선이 그 음모로부터 도망쳤던 것. 그때는 아직 초선이 되기 전이었고, 그 뒤 이곳저곳을 떠돌던 아이는 “얘, 아가, 계집애, 거지, 꼬마…” 등 이름 아닌 이름으로 불린다. 어린 거지 무리에 속해 구걸로 연명하던 그가 황건당의 난이라는 혼란기에 왕윤에게 거두어진 뒤 자신을 몰락한 충신의 딸이라 속이고 그의 수양딸이 되는 장면에서도 초선의 성격은 한껏 발휘된다.
“정말 여자는 관리가 될 수 없습니까?”
어린 수양딸이 아버지와 같은 높은 관리가 되고 싶다고 말하자 왕윤은 크게 웃으며, 여인으로서 관모에 손댈 수 있는 자는 오직 초선뿐이라고 알려준다. 높은 관직에 오르는 이들이 쓰는 관모는 담비(貂, 초) 털과 매미(蟬, 선) 날개로 만들어져 망가지기 쉬운데, 그 관모를 관리하는 여인을 초선이라 이른다는 것. “그러면 저도 초선이 되겠습니다.” 그가 초선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내력이다.
높은 관리의 수양딸로서 안락한 미래가 보장되었던 초선이 하루아침에 가기(家妓)로 신분이 떨어지게 된 사정 역시 그의 적극적 성격 탓이 크다. 왕윤에게 고마움을 넘어 연정을 품게 된 그가 첩으로라도 자신을 곁에 두어 달라 간청하는 과정에서 그간 자신이 고한 거짓말을 모두 털어놓았던 것. “나는 죽음을 각오했다. (…) 그토록 나는 나의 아버지를.” 마침표 뒤에 생략된 술어는 물론 “연모했다”일 테다. 죽음을 각오한 사랑의 결과 신분이 강등된 초선이 동료 가기 도화를 통해 여자들끼리의 사랑에 눈뜨고 그에 탐닉하는 모습 역시 금지된 욕망을 추구하는 초선의 적극적·모험적 성격을 알게 한다.
“훗날 네 정조가 크게 쓰일 일이 있을 것이다.”
아직 초경을 치르지 않은 초선에게 왕윤은 이렇게 말하고, 초선 역시 “내 정조는 아버지의 것”이라는 속엣말로 왕윤의 주문에 기꺼이 응할 각오를 다진다. 뿐만 아니라 동탁으로 하여금 자신을 두고 수하인 여포와 척을 지게 만드는 계략을 꾸미는 과정에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고 행동에 나선다. 동탁과 여포는 약속이나 한 듯 “고작 계집 때문에”라 말하며 서로를 원망하지만, 그들을 파국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 바로 ‘고작 계집’이었다. 계략에 말려든 두 장수가 배신과 죽음의 칼춤을 추고, 일시적으로 권력을 잡았던 왕윤 역시 동탁 잔당의 반격으로 파멸하는 결말은 삼국지연의에 그려진 바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면 그 여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 젊고 아리따웠던 초선은 어디로 갔을까.”
동탁이 죽은 뒤 초선은 여포의 첩이 되었다고 삼국지연의는 기록하는데, 그 뒤의 행방은 묘연하다. “관운장은 내 의기에 탄복하여 나를 거두기도 하고 나라를 망칠 요녀라며 나를 죽이기도 한다.” 박서련 소설 속 초선의 말마따나 삼국지연의 이후의 이야기들에서 초선은 서사의 필요에 따라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초선은 왕윤의 연환계에 이용당한 것에 못지않게 “서사에 이용당한 여자였다”(‘작가의 말’). 박서련의 소설에서 초선은 권력자들과 이야기꾼들의 ‘이용’을 꿰뚫어보고 그로부터 벗어나는 주체적이며 반성적인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숱한 영웅들의 의기와 용맹을 구경거리 삼고 나라를 세우고 무너뜨리는 대의와 명분을 우스개로 여기며 끝끝내 오래도록 나는 살아남고 만다.”
소설 마지막 대목에서 끝끝내 오래도록 살아남은 초선의 태도는 장자의 양생술을 떠오르게 한다. 거지와 양녀와 가기의 신분을 오간 자신의 삶을 감히 “삼공구경” 및 “천자”의 그것에 견주고, 영웅의 삶과 죽음, 나라의 흥망성쇠 같은 “모든 순리는 허망한 것이로되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고 자부하는 모습을 보라. 그가 어릴적 양아버지에게 아뢰었던 꿈을, 이름 없는 노파로 사는 지금에 와서 이루었음을 이런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지 않겠나.
“내가 움막을 짓고 사는 산자락에는 담비가 살고 여름이면 매미가 운다. 머리 위에 초(貂)와 선(蟬)을 이고 사니 부러울 것이 없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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