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여기’에 존재하기에 우린 몫을 나눌 의무가 생긴다 [책&생각]
기존 노동·성원권에 토대 두지 않는
새로운 사회적 의무로서 ‘현존’ 주목
지금 여기 함께 있다는 것
분배에 관한 인류학적 사유
제임스 퍼거슨 지음, 이동구 옮김, 조문영 감수·해제 l 여문책 l 1만4000원
한때 굳건한 것으로 여겨졌던 많은 것들이 흔들리고 무너져 내린다. 임금노동으로 기본적인 생계를 꾸려가고 국가로부터 필요한 복지를 제공받는 것은, 비록 현실과는 거리가 있을지언정 20세기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보편적인 삶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전지구적으로 성장한 자본주의 아래 임시직 같은 불안정 노동과 실업이 임금노동보다 더 보편적인 것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이주민·난민 등 다양한 형태로 국경을 넘나드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은 뚜렷해 보이던 국민국가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든다. 이런 변화 속에서 어떤 이들은 예전처럼 ‘자신의 몫을 달라’고 주장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이른바 ‘사회정책’ 자체가 임금노동자와 국가 구성원을 중심으로 짜여져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몫을 달라’고 주장할 수 없는 사람들이 정작 그것을 가장 필요로 하는 취약한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이 사태는 문제적이다.
인류학자 제임스 퍼거슨(65)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는 2021년작 ‘지금 여기에 함께 있다는 것’에서 이 문제를 다룬다. 그는 남아프리카 지역에서 ‘현금지급’ 형태로 이뤄지는 사회부조에 대한 연구를 중심으로 기본소득, 분배정치 등의 논의들을 선도적으로 이끌어온 학자다. 그는 전작 ‘분배정치의 시대’(2015)에서 기존 임금노동과 복지제도가 감당하지 못하는 현실에 걸맞은 새로운 정치적 기획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이를 ‘분배정치’라 불렀다. 분배정치란 한마디로 “누가 무엇을, 왜 가져야 하는가”를 새롭게 설정하고자 하는 정치적 질문이다. 당시 그는 ‘사회적인 부’에 대한 논의를 참고해, 임금노동을 전제로 삼지 않고도 모든 사람이 ‘사회적인 부’에 대한 자신의 몫을 요구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 바 있다. ‘지금 여기 함께 있다는 것’은 그것을 뒤따라야 할 논의를 에세이 형식으로 갈무리한 것이다.
우리는 ‘사회적 의무’를 결정하는 분배(share) 방식으로 ‘노동’과 ‘시민권’ 두 가지를 주된 토대로 삼아왔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이 두 가지를 충족하지 못하는 인구가 갈수록 늘어나 기존 방식이 더 이상 작동하지 못한다는 게 문제다. 지은이는 남반구를 중심으로 새롭게 제기되고 있는 분배 방식, 단순히 말하면 ‘모든 부는 사회적으로 축적된 것이기에 그 사회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제몫을 요구할 수 있다’는 요구에 주목한 바 있다. 예컨대 나미비아의 기본소득 보조금 정책을 옹호하는 이들은 “나미비아 국민은 국가와 광물자원의 실질적인 소유자이니, 매달 현금을 지급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임금노동의 사각지대를 끌어안지만, “국가 혹은 정부를 대표하는 기관이 승인한 집단적인 성원권에 기반을 두는 한 근본적으로는 배제라는 원칙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또 다른 문제를 품는다. 나미비아에 살고 있는, 평균적으로 그 나라 국민들보다 더 가난한 다른 나라 사람들은 과연 무엇에 기대어 자신의 몫을 주장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때문에 지은이가 새롭게 주목한 근거가 바로 ‘현존’(presence)이다. 현존은 “다른 사람들과 물리적으로 인접해 있는 상태”다. 성원권이 어떤 정체성을 공유하는 것을 ‘사회적인 것’(the social)의 전제로 보고 ‘우리 중의 하나’란 이유로 분배하는 것이라면, 현존은 우연히 물리적으로 공존하는 것 또한 ‘사회적인 것’이라 보고 ‘여기 우리와 함께 있다’는 이유로 분배하는 것이다. 현존은 수렵채집사회에 대한 인류학 연구 속에서 나온다. 사냥꾼이 사냥한 동물을 가지고 마을에 돌아왔을 때, 그 고기를 몫으로 받는 사람은 어디에 속하는지 여부를 떠나 ‘그때 거기에 있는’ 사람 모두다. 주목할 것은 현존에 근거한 그런 분배는 무엇의 대가도, 보편적인 인류애처럼 착한 마음이나 계산된 결과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내 몫을 달라는 ‘공유요구’(demand sharing)에 마지못해 따른 결과다. 인류학자 토머스 위드록에 따르면, 분배란 “무엇인가를 가져가려는 사람을 방해하지 않는 관행”이다.
지은이는 아프리카에서 택시로 주로 쓰이는 ‘미니버스’를 사례로 든다. 복작이는 버스 안에 승객이 새로 탈 때마다 기존 승객들은 “단지 나와 같은 요구를 가지고 있는(공유요구) 다른 사람이 나타났다는 이유(현존)만으로” 자기 자리를 내주거나 소중한 짐칸을 양보해야 한다. 이들이 받는 ‘사회적 의무’에 대한 압박은 추상적인 정체성이나 법 규범, 윤리 같은 데에서 오는 게 아니다. 나와 같은 취약성과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존재가 나와 물리적으로 인접해 있는 상황 자체가 분배의 의무를 강제한다. 비자발적이고 무계획적인 연결 속에 ‘사회성’이 발생하고, 물리적으로 인접해 있는 존재들이 서로 적극적인 주장과 요구를 밀고 당기면서 ‘분배’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 과정은 연민과 공감 따위가 아니라 차라리 귀찮음이나 짜증을 수반하는데, 이는 ‘진정한 의무’의 주된 속성이다. 문제를 일으키고 내 집에 들어와 며칠 신세 지겠다는 동생을 ‘어쩌겠어’ 하는 심정으로 마지못해 받아주는 것과 비슷하다.
지은이가 말하는 현존은 “‘우리’라는 감각을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성원권의 범위와 정치적 연대의 폭을 넓히”는 것과는 다르게, ‘여기’라는 감각을 중심으로 ‘사회성’을 구성하고 그에 걸맞은 정치를 구상할 수 있는 토대를 제시한다. 지은이는 현존이 그 자체로 평등을 이끌어내진 않으며 되레 그렇게 확보된 지분을 놓고 부정적인 경쟁이 벌어질 수 있다고도 지적한다. 다만 현존은 추상적인 성원권에만 고정되어 있던 우리의 한정된 시야를 ‘지금 여기’라는 실용적인 지평으로 옮겨주는 구실을 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문제점까지 함께 공유한 상태로 ‘비자발적으로 공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 출발점이다.
이에 더해, 지은이는 기존의 ‘사회적인 것’이 유효하지 않다고 해서 이를 버리면 ‘사회적 의무’처럼 거기서 비롯하던 소중한 자원까지 송두리째 잃을 수 있음을 지적한다. 우리의 핵심 과제는 단지 ‘사회적인 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상상하고 구성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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