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잊지 못할 보릿고개

조규익 숭실대 명예교수·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장 2024. 7. 12.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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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오뉴월이면 마을 20호 중 한두 집은 절량(絶糧)의 위기를 맞곤 했다. 보리 수확 전 항아리가 비기 시작한 것. ‘보리야, 보리야, 어서 익어라!’ 이삭 쓰다듬으며 기원하지만, 끼니 때마다 작은 바가지로 곡물 항아리 바닥 긁는 소리만 높아갔다. 배고파 우는 아이들 보며 지아비는 동네에 곡식 꾸러 다니고, 지어미는 들판으로 나물 찾아 허둥댔다. 아이들 얼굴에 허연 버짐 피고, 깡마른 부모 얼굴엔 근심이 시커먼 더껑이로 앉았다.

언젠가 답사차 들른 중국의 삼합진에서 강 건너로 바라본 북한 회령 언저리의 산들은 ‘버짐 피어난’ 어릴 적 우리들 모습이었다. 마구잡이로 땔감을 채취한 까닭일까. 성한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았다. 최근 유튜브로 탈북 동포들의 술회를 접하며 그 참상의 진실을 알았다. 먹을 것 없는 북한 동포들이 벗겨먹을 것은 산밖에 없다는 말을 이구동성으로 내뱉었다. 유년 시절 매년 한 번씩 넘던 보릿고개가 북한 동포들에겐 사철 넘어야 할 ‘굶주림 고개’임을 깨달았다.

서울의 대학으로 직장을 옮기고 출근한 첫날. 선배 교수들 몇이 맛있는 점심을 사겠다고 했다. 잘사는 동네로 차를 모는 것을 보며 ‘기대 만땅’이었다. 그런데 웬걸? 좁디좁은 골목길로 들어가 허름한 집 앞에 차를 세웠다. 간판을 보니 ‘○○꽁보리밥’ 아닌가. ‘보릿고개 트라우마’에 걸린 나를 꽁보리밥 집으로 끌고 온 선배들이 야속했다. ‘이 집 보리밥이 젤이여~!’ 너스레 떨며 고추장과 나물들을 넣고 썩썩 비빈 다음, 입맛 다시며 먹는 그들. 하는 수 없이 나도 눈 딱 감고 그리했다. 턱뼈에 힘을 주어 몇 번 씹자 비릿한 흙냄새가 났고, 나중엔 향으로 바뀌었다. 트라우마가 추억으로 변하면서 가끔 그 집을 드나들게 되었다.

이 땅의 시니어들 치고 보릿고개 겪지 않은 사람 몇이나 되랴. 그러나 보릿고개의 추억을 아름답게 간직한 경우는 별로 없으리라. ‘이밥에 고깃국’을 먹게 해주겠노라 속여 온 것이 북한 ‘수령’들이다. ‘이밥에 고깃국’이 싫증 나 꽁보리밥집을 찾아다니는 ‘남조선 동포들’을 보며 굶주림 속에 흘려보낸 세월이 몹시 억울할 탈북 동포들에게 우리의 트라우마를 들려주고 싶은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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