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의 도시의 정원사] 가뭄·홍수도 버틸 수 있는… 물의 정원
정원 연못에 고운 빛깔의 수련과 연꽃이 부지런히 꽃을 피워 올리는 이 계절, 정원과 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정원의 중심에는 항상 물이 존재해 왔다. 고대 메소포타미아를 비롯한 주요 문명의 발상지에는 풍요로운 강이 흘렀다. 주기적으로 범람하는 나일강의 물에 삶을 의존했던 이집트인의 정원에는 귀한 물로 채워진 연못이 있었고, 그 안에는 신의 향기를 품은 푸른빛의 신성한 수련이 꽃을 피웠다. 태초의 생명을 탄생시킨 신선한 물, 풍성한 초록 식물들, 달콤한 열매와 그늘이 있는 정원이 바로 고대인들이 그렸던 파라다이스의 모습이었다.
고대인들에게 물은 어떤 이미지로 다가왔을까? 물은 생명과 풍요의 상징 그 자체였기 때문에 정원을 디자인할 때 물은 언제나 핵심적인 요소로 자리 잡았다. 에덴 동산 혹은 파라다이스 정원에 흘렀던 네 개의 강, 즉 물과 포도주, 젖과 꿀을 상징하는 수로를 열십자로 교차시켜 네 개의 사각형 구역으로 나눈 이슬람의 사분 정원이 그 대표적인 예다. 스페인 알람브라 궁전의 사자의 중정, 인도의 타지마할 정원, 무굴 제국의 창시자 바부르의 정원은 모두 대칭적인 수로와 연못, 물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한 사분 정원이다.
훌륭한 정원 디자인은 물을 어떻게 잘 다루느냐 하는 기술이 관건이었다. 고대 로마인들은 아우구스투스 시대 대규모 송·수로 건설로 풍부한 물을 이용할 수 있게 되면서 인공 폭포와 연못, 정교한 수로와 분수를 만드는 데 능통했다. 수리학과 수력학 등 물을 다루는 지식과 기술은 16세기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정원에서 훨씬 더 큰 규모의 다양하면서도 섬세한 디자인과 함께 재탄생했다. 복잡한 수로 시스템과 화려한 분수로 유명한 티볼리의 빌라 데스테 정원이 대표적이다.
이는 프랑스 절대왕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태양왕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정원을 만들고 어마어마한 규모의 운하와 연못, 분수를 가동하기 위해 유럽 전역의 수리학자들과 기술자들을 소집했다. 그는 6킬로미터 떨어진 센강에서 물을 끌어오기 위해 4년에 걸쳐 대규모 수력 펌프 장치인 마를리 기계를 만들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베르사유 정원에서는 5.5킬로미터에 걸쳐 23만 제곱미터 규모의 운하와 함께 분수 노즐 620개가 장착된 분수 50개가 시간당 9000톤의 물을 이용해 분수 쇼를 펼친다.
물을 주제로 한 현대 정원의 걸작은 아마도 20세기 최고의 조경가 제프리 젤리코(Geoffrey Jellicoe)가 잉글랜드 남서부 도싯주에 있는 슈트 하우스(Shute House)에 조성한 정원일 것이다. 그는 자연스럽게 흐르는 실개천을 인공 수로와 연결시켜 낭만주의와 고전주의 물의 정원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전 세계 곳곳에서 전례 드문 폭우와 가뭄, 홍수가 빈번해진 기후 위기의 시대에 정원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무엇보다 물 보전의 중요성을 알리고 물을 효율적으로 잘 활용할 수 있는 미래 지향적 정원 디자인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호주 빅토리아주 크랜번 왕립 식물원에 2006년 조성된 호주 정원(Australian Garden)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호주의 대표적 조경 설계사무소(TCL)와 조경 원예가 폴 톰슨(Paul Thompson)의 합작품인 이 정원은 자연 경관 속에서 물과 인간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보여준다. 호주의 내륙 사막 지형을 재현한 매우 인상적인 붉은 모래 정원(Red Sand Garden)에서부터 해안가를 향한 물의 여정은 호주에 자생하는 다양한 식물들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
이 조경가들은 2018년 빅토리아주에서 가장 오래된 벤디고 식물원에 ‘미래를 위한 정원’을 만들기도 했다. 이 정원은 향후 50년 동안 벤디고에서 예측되는 극단적인 기후 조건과 강수 패턴을 반영하여 식물을 선택했다. 집중 호우와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혁신적 시스템도 적용했다. 평상시 다양한 행사와 마켓이 열리는 중앙 잔디밭이 빗물을 저장하는 저수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물은 다시 정원 식물들에 사용되며, 미래의 가뭄과 물 부족에 대비한다. 이 정원에는 500종 이상의 토착 자생 식물뿐만 아니라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지중해 등 비슷한 기후 조건에서 자라는 강건한 외래종들이 함께 풍성하게 자란다.
이미 오랜 역사와 전통 속에 경험과 노하우가 많은 이 선진 정원들의 사례로부터 우리는 도시 정원의 효율적인 물 관리를 위한 아이디어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일단 보다 많은 빗물 정원과 자연형 연못, 습지를 만들어 빗물을 최대한 머금고 자연스럽게 땅속으로 스며들게 해야 한다. 빗물 정원이 도시의 다양한 구역에 설치되면 오염된 물이 직접 하천으로 흘러가기 전에 식물을 통해 흡수되어 정화될 수 있다. 이러한 시스템은 홍수를 방지하고, 수질을 개선하며, 도시의 생태계를 복원하는 역할을 한다. 모아둔 빗물을 건조한 시기 정원의 식물을 위해 재활용할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도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의미 있는 투자가 될 것이다. 국립세종수목원에는 인접한 금강에서 물길을 끌어와 2.4킬로미터를 구비구비 흐르도록 만든 ‘청류지원’이라는 이름의 수변 공간이 있다. 여기에는 여러 붓꽃 종류와 연꽃을 비롯한 다양한 수생 식물과 함께 각종 새와 동물, 곤충이 공존한다. 이 물길은 평상시 수목원에서 자라는 4300여 종의 식물들에 필요한 물을 공급해줄 뿐만 아니라, 가뭄과 홍수에 탄력적으로 수위를 조절하여 정원을 지속 가능하게 가꿀 수 있게 해준다.
물을 현명하게 다루는 정원은 앞으로 점점 더 심화될 기후 위기에 대비할 수 있는 미래 지향적 해결책을 제공한다. 이제 정원은 단순히 장식적 공간을 넘어 물과 생태계의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고대인들이 물의 신성함을 존중하며 그 힘으로 문명을 일구고 정원을 가꾸었던 것처럼, 우리도 이제 물을 지혜롭게 다루고 소중히 여겨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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