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나라를 구한 ‘스토커’ 이야기

유석재 기자 2024. 7. 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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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포서의 일화를 그린 현대 삽화. 신포서가 7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통곡하자 진 애공이 내관을 시켜 식사를 권하는 모습.

삶을 살다 보면 이런 깨달음을 얻을 때가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옛 속담 틀린 거 하나 없더라!”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빛을 잃은 속담도 있습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말입니다. 이건 ‘아무리 어려워도 노력하면 안 될 일 없다’는 뜻이지만, 듣기에 따라서 스토커, 즉 남을 쫓아다니며 괴롭히는 사람에게 힘을 실어주는 말처럼 들리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스토킹은 이제 범죄라는 인식이 굳어졌습니다. 2021년 ‘스토킹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 시행된 이후 지난해 1월 ‘스토킹 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습니다. 2022년 한 해 동안 1만579건의 스토킹 사건이 수사 대상이 됐다고 합니다.

문제는 스토킹의 대상일 것입니다. 싫다는 이성(異性)이 아니라, 사생활을 보호받고 싶은 스타가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방향이라는 전혀 새로운 개념의 ‘스토킹’이라면 어떨까요. 그렇게 된다면 이제 더 이상 스토킹이라 부르지도 말아야겠지만 말입니다.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지만 이런 스토리를 한번 꺼내볼까 합니다.

한 사내가 궁성의 뜰 담벽에 기대어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가 입고 있는 의관의 흔적으로 미루어 그는 어느 먼 나라의 귀인이었음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이상했습니다. 도포는 온통 흙먼지 투성이었고, 그나마 군데군데 찢기거나 해진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신발도 신지 않은 채였습니다.

그의 쉬어버린 울음소리 또한 처절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가슴에 응어리진 한과 울분이 통곡소리 마디마다에 맺혀 있었습니다. 마치 피를 토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의 맨발은 말라붙은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더욱 기이한 일은, 누가 봐도 제정신이 아닌 듯싶은 이 사내의 행동을 아무도 제지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뜰을 오가는 비장이나 나인들은 애써 그 사내를 외면한 채 저마다 총총히 길을 재촉했습니다. 그러면서 수군거렸습니다. “세상에 저 사람, 저러고 있는 지 벌써 7일이 됐다.”

그 사내의 이름은 신포서(申包胥), 초(楚)나라 사람. 이곳은 옹주(雍州), 진(秦)나라 애공(哀公)의 궁전. 때는 기원전 506년.

이야기는 한참 전으로 거슬러올라갑니다. 초나라의 귀족 오자서(伍子胥)는 당대의 이름높은 호걸로서 각국의 명사들과 교류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초 평왕(平王)은 태자와의 사이가 벌어져 태자의 스승이었던 오자서의 부친을 살해했습니다. 오자서는 복수를 다짐하고 오(吳)나라로 망명하다가 절친한 친구였던 신포서를 길에서 만났습니다. 자초지종을 설명한 오자서는 눈물을 삼키며 맹세했습니다. “내 초나라를 반드시 멸망시키리라.”

친구의 불운을 애통해하던 신포서는, 그러나 역시 눈물을 머금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초나라를 반드시 살리는 것이 또한 나의 길일세.”

오자서는 오나라에서 유명한 칼 마니아였던 오왕 합려(闔廬)의 밑으로 들어가 군사 담당 고관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런데 오자서는 대단히 운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그 타이밍에 오나라로 찾아와 그를 도와준 사람이 하필이면 세계 전사(戰史)상 불멸의 전략가, ‘아트 오브 워(Art of War·손자병법)’의 저자 손무(孫武)였던 것입니다.

손무의 전략에 힘입은 오자서는 군사를 일으켜 끝내 초나라의 수도를 점령했습니다. 그는 이미 죽은 평왕의 시신까지 들춰내 쇠채찍으로 시신을 가격하며 욕을 보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신포서는 옛 친구를 꾸짖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오자서는 그에게 답하면서 불멸의 명언을 남겼습니다.

“일모도원(日暮途遠). 어찌 천리에 순리로써만 따를 수 있으리.”

일모도원이란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다’는 뜻입니다. 신포서는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쳤다면 그의 이름은 역사에 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밤낮을 쉬지 않고 서쪽으로 걸어갔습니다. 발은 모두 부르트고 터져, 내딛는 걸음마다 피를 흘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진나라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그가 걸어간 거리는 대략 부산에서 신의주 쯤 됩니다.

그리고 진나라 군주인 애공을 찾아갔습니다. “저의 조국을 도와주소서!” 그러나 오랜 평화가 계속됐던 춘추(春秋) 말기 시절 서쪽 변방에서 음풍농월에 젖어있던 애공에게, 갑자기 데프콘 1을 발동해 근린국가에 파병한다는 것은 행여 꿈에 나올까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신포서는 계속 말했습니다. “오나라가 우리 초나라를 완전히 점령하게 되면, 그 다음은 당신네들 차롑니다! 오나라를 평정한다면 진나라에게도 보답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임장도 없는 사절에게 애공은 냉랭했습니다. “경의 뜻은 잘 알겠소. 우리 진국은 엄정한 태도로 초국에서 발생한 사태를 관심있게 예의주시하며 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소” 운운하더니 평화유지군은커녕 의료지원단 파견조차 약속하지 않고 그냥 연회장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러면서 한 마디 툭 던졌습니다. “영빈관에 가서 좀 쉬시구려. 행색이 그게 뭐요?”

신포서의 ‘스토킹’ 스토리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좌전(左傳)’의 정공(定公) 4년조는 이 때의 처절한 장면을 이렇게 서술합니다.

對曰: “寡君越在草莽, 未獲所伏, 下臣何敢卽安?” 立依於庭牆而哭, 日夜不絶聲, 勺飮不入口, 七日.

(대왈: “과군월재초망, 미획소복, 하신하감즉안?” 입의어정장이곡, 일야부절성, 작음불입구, 칠일.)

신포서가 대답했다. “저희 임금께서는 풀숲 위를 뛰어다니시느라고 엎드려 숨을 곳조차 없으십니다. 미천한 신이 어찌 감히 편히 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고는 궁성 뜰의 담벽에 기대어 통곡했는데, 밤낮으로 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음식도 입에 넣지 않은 채 7일이 지났다.

처음에 진 애공은 귀찮은 듯 ‘저렇게 엉성하게 외교를 하니 나라가 저 지경이 되는 것’이라며 혀를 찼을 것입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을 때만 해도 ‘저러다 가겠지’라 여겼을 것입니다. 5일이 지나면 ‘독종을 만났군’이라 생각했을 것이고 ‘사람을 시켜 끌어낸다면 오히려 내가 욕을 먹을 것’이란 판단도 들었을 것입니다. 6일이 지났을 때는 주위를 모두 물리치고 아무 말 없이 혼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7일이 지난 날 밤, 진 애공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는 신포서가 기대 있는 담장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즉석에서 이런 시(詩)를 읊었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서 지은 이 시는 동시대 인물인 공자도 감동해 ‘시경(詩經)’ 진풍(秦風)에 실었다고 하지만, 원래부터 진나라에 회자되던 유행가였을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豈曰無衣(기왈무의) 어찌 옷이 없다 하리오!

與子同袍(여자동포) 내 그대와 함께 도포를 입으리로다

王于興師(왕우흥사) 왕이 이에 군사를 일으키니

與子同仇(여자동구) 내 함께 그대의 적과 싸우리라.

신포서는 진나라 군대의 전차 500대와 함께 초나라를 점령한 오군을 향해 반격전을 벌였습니다. 오자서의 전왕 시신 훼손 사건으로 민심은 악화됐고, 먼 거리에서 생각지도 못한 원병이 기습을 벌인 사태였습니다. 당시 오나라 주둔군의 전략가였을 손무는 이 사태에서 어떤 행동을 취했을까요. 아마도 그의 선택이 정답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병력을 최대한 보존한 채 전면 퇴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신포서는 끝내 나라를 구했습니다. 진심 어린 끈질김이 ‘손자병법’의 저자조차 후퇴하게 한 셈입니다.

근래 문제되는 스토킹이 지극한 사적(私的) 관계에서의 끈질김이라면, 신포서의 이야기는 공공(公共)과 대의(大義)를 위한 자기희생이었습니다. 그의 끈질김은 결국 사직(체제)과 백성(국민)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런 막무가내식 국제교류나 협상의 시대 역시 멀찌감치 흘러갔을지도 모릅니다. 2020년대의 현재는 분명 보다 세련되고 치밀한 방식과 매너를 요구합니다. 500원짜리 지폐 한 장 달랑 들고 가서 “이 철갑선을 봐라! 우리는 조선소를 지을 수 있다”라는 현하웅변으로 외국인들을 감동시켰다는 식의 무용담이 통하기에는 이미 세월이 너무 버겁습니다. 대학원에서 제자로 받아들여주지 않겠다는 교수의 집 앞에서 밤새도록 무릎꿇고 기다렸다는 얘기들도 1990년대 중반쯤으로 그 시효를 다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포서의 스토리를 그저 흘러간 옛 충신의 얘기쯤으로 치부해버릴 수는 없습니다. 무엇을 주목해야 할까요? 그것은 한 인간을 지탱시켜온 놀라운 정신적 에너지가 ‘끈기’라는 한 과도한 심리적 특질과 연결됐을 때 어떤 감탄스런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에 대한 실례(實例)인 것입니다. 자신에게 잠재된 에너지를 어떠한 방식으로 어떻게 유용하고 값지게 쓸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했습니다. “정말 정신적인 진보의 수단은 지혜 깊은 가르침으로써 인도된 끊임없는 인내와 노력밖에는 없다.” 그렇습니다. 스토킹은 생산적인 행위로 바뀌어야 합니다. 자신이 지금 현재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가, 하려고 하는 일은 무엇인가, 이 일이 내가 갈 길이라면 나는 어떻게 그 일에 매진(邁進)해야 하는가… 그러한 집착(執着)이야말로 프로이트가 말했던 방어기제(defence mechanism) 중 불안을 승화(昇華)한다는 차원에서의 값진 행위일 것입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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