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송 참사 1주기 ③ 피해자 인터뷰 : 책임자들은 지상에, 우리는 여전히 지하에
1년 전 7월의 어느 토요일 아침 세종과 충북 청주를 잇는 지하차도로 강물이 들이치기 시작했다. 상황을 몰랐던 차들은 지하차도 안으로 우르르 들어섰다. 교통 통제는 없었다. 타이어 바퀴 절반 높이까지 차올랐던 강물은 순식간에 차체를 물 위로 둥둥 띄워놨다. 일부는 차에서 뛰어내려 자력으로 현장에서 탈출했다. 경찰과 소방을 비롯한 국가의 도움은 없었다.
이 사건으로 14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2023년 7월 15일, 충북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궁평2지하차에서 발생한 지하차도 침수 사건, 일명 ‘오송 참사’였다.
오송 참사 1주기를 맞아 뉴스타파는 참사가 벌어진 1년 전 그날로 돌아가 봤다. 차량 통제를 비롯해 현장 조치를 했어야 할 경찰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살펴봤다. 참사의 근본 원인인 임시 제방의 붕괴 과정과 책임 소재를 정리했다. 참사 이후 남겨진 유가족과 생존자들의 목소리도 들었다.<편집자 주>
오송 참사 1주기 ① ‘오송 참사’ 공소장 입수…경찰은 그날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오송 참사 1주기 ② “그건 그냥 흙더미였다”... 임시제방 붕괴의 재구성
오송 참사 1주기 ③ 책임자들은 지상에, 우리는 여전히 지하에
뉴스타파가 '오송 참사' 1주기를 맞아 유가족과 생존자들을 만났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아직 이뤄지지 않은 현실 속에서 피해자들의 마음은 그날의 지하차도처럼 깊고, 어두웠다. 가족을 잃은 상실감에, 살아남은 죄책감에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참사가 잊힐지 모른다는 걱정에도 휩싸여 있었다. "잊지 않고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으로 인터뷰에 응한 유가족 이중훈·지상희 씨, 생존자 정영석, 김 모 씨의 이야기를 전한다.
베테랑 운전 노동자이자, 자부심 강했던 747번 버스 기사
고 이수영 씨는 운전 노동자였다. 처음에는 화물차를 몰았고, 그다음은 택시를 운전했다. 운전은 정말 잘했지만, '엄마를 힘들게 하던 아빠'였다고 아들 이중훈 씨는 말했다.
어머니를 많이 힘들게 하셨던 분이셨어요. 화물차 운전을 하셨는데 사업주한테서 돈을 못 받아오니까 어머니 혼자 미용실 하시면서 저랑 남동생, 2명을 어렵게 키우셨거든요. 화물차 그만두시고 개인택시를 하셨어도 좀 많이, 돈을 많이 못 벌어오시는 편이었죠. 부부싸움도 많이 하셨고...
- 이중훈 / '오송 참사' 희생자 고 이수영 씨 아들
그러던 중 어머니가 암에 걸렸다. 아들 중훈 씨는 "그때 이후로 아버지가 많이 바뀌었다"고 회상했다. "술도 많이 드셨던 분이 어머니 간병하신다고 개인택시도 팔아서 병원비를 충당했다. 어머니 옆에서 굉장히 오랜 시간을 보냈고, 서로 의지를 많이 하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수영 씨가 버스 운전을 시작한 건 약 10년 전이다. 참사 당일 운전했던 747번 버스는 수영 씨와 6년간 함께했다. 747번 버스는 2018년 청주시에서 최초로 도입한 전기버스다. 충청북도 청주 시내와 오송 KTX역을 오간다. 수영 씨는 747번 도입 첫해부터 이 버스를 운전했다.
수영 씨에게는 청주시 최초의 전기버스를 운행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쉬는 날에도 회사에 나가 버스를 정비했고, 버스 회사 직원보다도 버스 구조를 잘 알았다고 한다. "전기버스에 대해선 아버지가 많이 알았다. 어느 날 다른 회사에서 전기버스가 고장 났는데, 아버지한테 연락이 온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런 걸로 자부심이 강하셨다"고 중훈 씨는 설명했다.
버스와 함께, 아들의 마음도 잠겼다
그런 이수영 씨에게 버스 운행은 비가 오건 눈이 오건 '내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2023년 7월 15일,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비가 좀 많이 오긴 했지만 큰일은 없을 거라고, 아침 8시경 궁평2지하차도에 들어서면서도 그렇게 생각했다.
원래 747번 버스 노선에는 궁평2지하차도가 없었다. 하지만 원래 지나치던 길목 하나가 침수됐다는 소식이 들렸고, 이수영 씨는 급하게 노선을 우회했다. 원래는 시청과 운수회사에 먼저 보고해야 했지만, 상황이 급박했다. 관행대로 '선조치 후보고'했다. 2023년 7월 15일 아침, 이수영 씨는 궁평2지하차도로 향했다.
이미 앞서가던 다른 버스들도 궁평2지하차도를 순탄하게 통과하고 있었다. 이수영 씨도 지하차도로 향했고, 별문제 없이 통과했다. '다음에도 괜찮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 뒤, 노선을 돌아 다시 궁평2지하차도로 들어섰다. 그 길로 버스는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2023년 7월 15일 아침 8시 반쯤이었다. 같은 시각 궁평2지하차도는 물에 잠겼고, 오송 참사가 발생했다.
7월 15일은 토요일이었다. 아들 중훈 씨는 자고 있었다. 주말에는 여느 직장인이 그렇듯 늦잠을 잤고, 느지막 일어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그러던 중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아빠 버스가 침수된 것 같다'고 동생은 얘기했다. 중훈 씨는 바로 궁평2지하차도로 향했다.
궁평2지하차도에서 처음 본 광경은 '아무것도 없다'였다. 버스도 지하차도도 물에 다 잠겨 어디 있는지 알 수도 없었다. 버스는 하루가 지나서야 서서히 머리부터 형체를 드러냈다. 곧 아버지를 찾을 거라고 기대했다. 살아 있을 거라는 희망은 이미 접었지만, 시신이라도 빨리 찾고 싶었다.
하지만 이수영 씨는 버스에 없었다. 참사 후 이틀이 지난 7월 17일 새벽 1시쯤 이 씨는 다른 곳에서 발견됐다. 버스는 지하차도에서 지상 도로로 향하는 오르막길에서 침수됐지만, 이 씨는 지하차도 안에 있었다.
제가 블랙박스 영상을 봤는데, 미호강이 범람해서 지하차도로 들어온 물이 앞창문을 깨고 들어왔어요. 아마 휩쓸려서 밖으로 나간 것 같아요. 또 물살이 세다 보니까 진흙, 펄 이런 게 많이 들어와 있었어요. 아버지는 안에서 발견되셨어요.
- 이중훈 / '오송 참사' 희생자 고 이수영 씨 아들
이날 수영 씨를 포함해 747번 버스에 타고 있던 10명 중 9명이 사망했다. 시간이 지나, 유일한 생존자가 아버지 수영 씨의 도움으로 탈출했다는 사실이 전해졌다.
항상 사랑한다 말하던 오빠... "얼마나 무서웠을까"
1970년생 고 지승훈 씨는 동생을 아끼는 오빠였다. 동생 지상희 씨는 오빠를 엄격했던 사람으로 기억했다. 집에 늦게 들어오고 숙제를 안 해도 늘 동생을 혼내는 건 부모님이 아니라 오빠였다고 한다. 사사건건 간섭하는 오빠가 싫을 법도 하지만 동생은 오빠를 좋아했다. 쓴소리에서 애정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십수 년 전 부모님이 모두 일찍 돌아가시고 남매는 더 각별해졌다. 따로 살았어도 자주 전화했고 형편을 챙겼다. 참사 보름 전에도 오빠 승훈 씨는 동생 상희 씨 집에 들러 전기배선 공사를 해줬다. 7월 14일에는 비가 많이 오는 걸 보고 동생에게 연락해 누전을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승훈 씨의 직업은 인테리어 기사였다. 15일에도 일을 나가던 참이었다. 비가 많이 오는 터라 상희 씨는 오빠가 걱정됐다. 하지만 평소 꼼꼼하고 조심성이 많던 승훈 씨라 그리 불안하지는 않았다.
오빠가 일이 끝나면, 일 끝났다고 전화해 주고, 언제 또 일 나가냐고 물어보면 '언제 간다'고 말해줬어요. 또 제가 '조심해서 일해' 이러면 '그럼 바보야, 내가 널 두고 어디 갈까 봐 그래?' 항상 그렇게 말을 해줬고요. 전화 통화 했을 때는 항상 먼저 사랑한다고 말을 해줬었어요.
- 지상희 / '오송 참사' 희생자 고 지승훈 씨 동생
7월 15일 참사가 났다는 소식에도 동생은 오빠가 저곳에 있으리라고, 전혀 상상하지 않았다. 뉴스를 보며 '저분들 어떡해'라고만 생각했다. 그날따라 오빠와 연락이 안 됐지만, '일이 바쁜가 보다'라고 여겼다.
지하차도 안에 오빠가 있었다는 소식은 하루가 지난 7월 16일 오전 10시쯤 들었다. 경찰로부터 신원확인을 해야 하니 병원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당장 병원으로 향했다. 가면서도 상희 씨는 오빠가 많이 다쳐 경찰이 대신 전화했다고만 생각했다. 병원에 거의 다 도착할 즈음 다시 경찰의 연락을 받았다. 병실이 아닌 영안실로 오라는 이야기였다. 상희 씨는 주저앉았다.
승훈 씨가 몰던 트럭은 진흙과 오물 범벅이 된 채로 발견됐다. 오빠는 지하차도 배수구 근처에 있었다. 상희 씨는 참사 몇 주 뒤 트럭의 블랙박스 영상을 봤다. 거기서 오빠는 동료에게 전화해 '물이 들어온다, 나가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차를 빠져나와 이미 다 잠긴 지하차도 안에서 살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었다. 얼마나 무서웠을지, 동생은 오빠가 느꼈을 공포를 떠올리며 자주 참담해진다.
(블랙박스 영상을 보니까) 어떻게 이렇게 금방 물이 찰 수 있는지... 오빠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날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다시 돌아가서 일을 못 가게 말릴 수 있다면 좋겠어요.
- 지상희 / '오송 참사' 희생자 고 지승훈 씨 동생
누군가의 출근길, 여행길이었던 지하차도...침수 원인은 '부실 제방'
오송 참사 희생자는 총 14명, 생존자는 16명이다. 모두 일하러, 여행을 가러, 누군가를 만나러 지하차도를 지나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평범한 삶을 앗아간 참사는 폭우로 시작됐지만, 자연재해는 아니었다. 오송 참사가 '인재'라는 사실이 드러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충청북도와 청주시, 경찰, 금강유역환경청,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행복청), 시공사인 금호건설, 감리회사인 이산 등의 잘못이 속속 드러났다. 검찰 수사 결과에 따르면, 충청북도와 청주시는 여러 번의 홍수 경고를 무시했고, 환경청과 행복청, 청주시는 궁평2지하차도 침수의 원인이 된 미호강 인근 부실 임시제방을 방치했다. 시공사인 금호건설과 감리회사인 이산은 부실 제방을 만들었다.
참사 피해자들은 이들의 처벌과 재발방지 대책을 요구하려 모임을 만들었다. 참사 약 11일 뒤인 2023년 7월 26일 오송 참사 유가족협의회가 결성됐다. 8월 16일에는 생존자협의회도 생겼다. 유가족과 생존자들은 지난 1년간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어떤 때는 시청에서, 또 어 때는 검찰청에서, 국회에서, 법원에서, 길거리에서 현수막을 펼쳤고, 기자회견을 했다.
약 1년이 지나고, 지난 5월 금호건설 현장소장과 이산의 감리단장은 1심 재판에서 각각 징역 7년 6월, 징역 6년을 받았다. 하지만 항소했다. 다른 책임자들의 판결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김영환 충북도지사나 이범석 청주시장 등 최종 관리 책임이 있는 기관장들은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피해자들 "오송 참사는 중대시민재해 1호 사건"
현재 오송 참사의 쟁점 중 하나는 중대시민재해의 인정 여부다.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대재해법)에 따르면 '공중이용시설의 설계, 제조, 관리상 결함으로 사망자가 1명 이상 발생한 재해'는 중대시민재해다. 오송 참사가 여기에 해당한다는 분석이 많다.
중대재해법 시행령에 따르면, 거리 100미터 이상인 지하차도는 공중이용시설이다. 궁평2지하차도는 430미터로, 관리 주체는 충청북도다. 국가하천의 보나 하구둑도 중대재해법상 공중이용시설이다. 오송 참사의 일차적 원인인 부실 임시제방이 있던 미호강은 2017년 국가하천으로 승격됐다. 부실 임시제방은 미호강 교량 공사 과정에서 무단 설치됐다. 미호강의 관리 주체는 금강유역환경청이고, 청주시는 관리를 위탁받았다. 교량 공사 발주처는 행복청이다.
중대재해법에 따라 김영환 충북도지사와 이범석 청주시장, 조희송 금강유역환경청장, 이상래 전 행복청장은 모두 처벌 대상에 오를 수 있다. 유가족협의회는 지난해 8월, 이들을 중대재해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다. 만약 이들의 혐의가 인정되면 오송 참사는 중대시민재해 1호 사건이 된다. 이중훈 씨는 "중대시민재해로 처벌이 된다면, 다른 기관장들도 좀 더 경각심을 갖지 않을까 한다. 1호이자 마지막 중대시민재해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책임자는 지상에, 피해자는 여전히 지하에
하지만 중대재해법 적용을 놓고 검찰은 여전히 결론을 내리지 않고 있다. 지난 3월부터 이상래 전 행복청장과 이범석 청주시장, 김영환 충북도지사를 한 번씩 불러 조사했을 뿐이다. 오송 참사 생존자 김 모 씨는 "사실 검찰 조사는 거의 마무리 단계라는 의견이 팽배하다. 그럼 이제 기소를 하냐 안 하냐 이 결정만 남은건데, 검찰이 좌고우면하고 있는 거 아닌가"라고 말했다.
검찰의 수사가 길어지는 동안, 고위공직자들은 책임 회피성 발언을 늘어놨다.
김영환 충북도지사는 지난해 10월 10일 국정감사에 나와 참사 당일 충북도가 기준이 충족됐음에도 교통통제를 실시하지 않았으며 미호천 범람 위험 신고를 받고도 비상 대응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국무조정실의 감찰 결과에 대한 질문을 받자 "검찰 수사의 과정에 있다"며 제대로 된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이범석 청주시장은 지난해 9월 청주시의회에서 '미호천 공사를 발주한 행복청과 지하차도 관리주체인 충북도에 법적 책임이 있다'는 취지로 주장하며 "시장으로서 관할 지역에 일어난 어떤 사고든 책임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법적 책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오송 참사 책임으로 지난해 8월 해임된 이상래 전 행복청장은 10월 26일 국정감사에서 "(미호강) 제방과 관련해 행복청은 실질적인 책임이 없다. 많은 인명피해가 났는데 나라도 옷을 벗어서 조금 위로가 된다면 만족한다"고 말했다.
참사 트라우마에 죄책감도...살아남은 자의 고통
지금도 피해자들은 참사의 고통을 부둥켜안고 살고 있다. 유가족 지상희 씨는 "심리 치료를 계속 받고 있다"며 "비가 많이 오면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 무슨 일이 생길까 불안다. 그러며 애들한테 전화해서 '어디 가지 마. 비 많이 온다더라', '오늘은 운전하지 마' 그렇게 맨날 얘기한다. 특히 터널이나 지하차도는 절대 가지 말라고 한다"고 말했다.
생존자 정영석 씨의 일상을 지배하는 건 죄책감이다. 영석 씨 차량을 따라서 지하차도로 들어선 사람 가운데, 사망자가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날이 7월 15일 토요일이었는데 아내가 갑상선 암에 걸려서 3일 후에 수술 날짜를 잡아놨었어요. 저도 사고를 겪었지만, 또 바로 집에 가서 아내를 다음 날에 병원에 입원시켜야 되니까... 그런 것들을 준비하다 보니 너무 정신이 없었어요. 아내 수술을 다 끝내고 나서 집에 돌아와서 조금 숨을 돌리고 보니까... 저 때문에, 제가 차를 끌고 가면서 혹시 저를 보고 (지하차도로) 따라 들어와서 돌아가신 분이 없을까? 그런 죄책감 때문에 너무 힘들었어요. 계속 눈물도 펑펑나고 '혹시 나 때문에 돌아가신 분이 있었을 거야’'라는 생각이 너무 힘들게 만들었어요.
- 정영석 / '오송 참사' 생존자
또 다른 생존자 김 모 씨는 "참사 이후부터는 거의 수면장애 때문에 잠을 잘 자지 못했다. 두통도 계속 있었다. 지금도 계속 정신과를 다니면서 신경안정제랑 항우울제, 수면유도제를 먹고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들이 앞으로 견뎌 나가야 할 시간들이 더 많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책임자 처벌이 다 끝나려면, 얼마나 더 걸릴지 모른다. 지상희 씨는 "(금호건설 현장소장이랑 감리단장이) 항소했다는데, 징역 7년, 6년이 뭐가 억울하다는 건지 모르겠다. 우리는 모두 가족을 잃었는데. 그게(1심 재판 결과) 뭐가 억울하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세월호 참사' 10주기, '이태원 참사'도 1주기가 지났고, 2주기도 얼마 안 남았잖아요. 오송 참사는 1년, 2년, 3년, 4년 과연 몇 년 동안 (진상규명 요구를) 해야 될까? 그 사람들이 언제쯤 처벌받을 수 있을까? 저는 그런 생각 때문에 유가족협의회 활동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아요.
- 이중훈 / '오송 참사' 희생자 고 이수영 씨 아들
2차 가해를 삼켜내는 일도 버겁다. 생존자 김 모 씨는 "2차 가해라고 느껴지는 댓글들이 있다. 지하차도 안은 물이 차 있는지 잘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지하차도에 그렇게 물이 차 있는데 왜 들어가냐'라는 댓글이 달린다. 설치류 '레밍'에 비유하는 댓글도 봤다"며 "부실 제방을 만든 시공사부터 소방이나 경찰, 청주시, 충북도, 행복청 이런 데서 잘못했는데, 왜 우리가 욕을 먹어야 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오늘이 오송 참사 날이었구나" 기억해 주길...
지난 8일 오전 10시, 청주에 폭우가 쏟아졌다. 이날 유가족과 생존자들은 다시 궁평2지하차도에 모였다. 참사 1주기를 맞아 피해자들은 지하차도 안에서 다시금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 대책 수립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최은경 유가족협의회 공동대표(희생자 고 백 모 씨의 딸)는 "아마 그때도 이렇게 비가 많이 쏟아졌을 거다. 오늘도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쏟아졌다. 기억과 다짐을 하려고 이 자리에 섰다. 이 비는 돌아가신 열네 분의 울음이 아닐까 한다. 우리 억울하게 죽은 거를 풀어주라는 의미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최 대표는 "요새도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가 또 멈췄다가 한다. 날씨는 인력으로 막을 수가 없다. 이런 기후변화에 헤쳐 나갈 수 있는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지하차도 옆에 강이 흐르고 있으면, 강이 넘친다고 했을 때를 대비했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도 '보여주기식'으로만 대책을 내놓는 것 같은데, 제대로 된 안전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기자회견이 끝나자 피해자들은 비를 뚫고, 행진을 시작했다. 각 손에는 오송 참사를 알리는 피켓이 들려 있었다. 첫날 행진은 청주 강내면에서 시작해 시내에 있는 버스터미널에서 끝났다. 행진은 매일 이어졌고, 오늘(11일) 충북도청이 마지막 장소였다.
피해자들이 다시 거리에 선 이유는 '시민의 기억'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참사를 기억하고, 함께 진상규명을 요구해야 정부도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가족 지상희 씨는 "보통 남에 대해 말하는 게 3, 4일이면 끝나지 않나. 1년이니까, 이제 잊을 거다. 그래도 이분들이 스스로 잘못해서 돌아가신 게 아니니까 잊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오늘이 오송 참사 1주기지', '아, 2주기지' 라면서 기억해 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저희가 계속 도청이나 정부 기관에 진상규명 요청하는 것도 힘들고, 검찰 수사를 마냥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지치기도 해요. 지금은 저희의 활동을 알아봐 주시는 분이 없지만, 혹시나 알아봐 주신다면 조금이나마 격려를 해주시면 좋겠어요. 이런 참사가 두 번 다시 발생되지 않게끔 열심히 활동하고 있어요. 관심과 힘을 주신다면 조금 더 안전한 나라가 되지 않을까요. 한 걸음 한 걸음 이렇게 가다 보면 좀 더 안전한 나라가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 이중훈 / '오송 참사' 희생자 고 이수영 씨 아들
뉴스타파 홍주환 thehong@newstap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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