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發 저가 공습에 의류산업 위기…기술 경쟁력만이 돌파구"
'창립 50주년' 영원무역 이끈 성기학 회장
방글라데시에 '섬유 대학' 건립
의복 디자인 등 커리큘럼 교육
기술 경쟁력서 우위 확보할 것
과테말라 등 중남미 시장 진출
모로코·튀니지에 유럽 거점 건설
생산기지 확대로 경쟁력 높일 것
한국 디자이너들 잠재력 있지만
브랜딩 역량, 세계 수준 못 미쳐
장기 투자하며 경영능력 키워야
기업 우선과제는 지속적 수익
눈앞의 큰 이익만 좇기보단
좋은 파트너와 함께 성장
스물일곱 청년이 지인 둘과 수출회사를 차렸다. 한국의 연 수출액이 50억달러가 안 되던 1974년이었다. 그로부터 50년. 영원무역은 매출 4조원대의 글로벌 의류 제조업자개발생산(ODM) 업체로 성장했다. 올해 창립 50주년을 맞은 영원무역의 창업자 성기학 회장의 이야기다. 50년간 가장 잘한 일을 묻자 돌아온 답은 겸손했다. “버틴 겁니다.” 성 회장은 “원래 포기를 잘 안 하는 스타일”이라며 웃었다. 옷차림은 수수했다. 넥타이 없는 셔츠 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그는 글로벌 패션업체 회장이지만 와이셔츠는 이틀씩 입고, 오래전 미국 공항에 있는 중저가 매장에서 산 넥타이를 즐겨 맨다. 올해 77세임에도 여전히 일 년의 절반을 해외 생산기지에서 보낸다. 11일 성 회장을 서울 퇴계로에 있는 영원아웃도어에서 만났다.
▷올해가 창립 50주년입니다.
“사업 시작한 게 어제 같은데 벌써 50년이네요. 창업 당시 1차 오일쇼크가 미처 극복되지 않아 무척 힘들었습니다. 클리프 리처드의 ‘The Young Ones’란 팝송이 유행해 사명을 영원으로 지었죠.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한결같이 어떻게 고객을 섬길까 고민한 것이 50년간 쉼 없이 성장한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번도 적자를 내지 않은 비결은 뭔가요.
“기업 경영활동의 최우선 과제는 지속적으로 수익을 내는 것입니다. 좋은 거래선을 확보하고, 우리와 함께 그들도 성장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당장의 이익에 눈이 멀어 바이어를 쥐어짜서 한꺼번에 큰 이익을 낸 뒤 이후에 적자를 내는 것은 효율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패션산업에서도 기술 우위가 필요한데요.
“방글라데시에서 직조, 프린팅, 디자인 등 분야별로 7개 연구개발(R&D)센터를 운영할 것입니다. 외부 교수진 20명, 국내외 석·박사급 연구인력 30여 명 등 총 2000여 명이 근무하게 됩니다. 2026년까지 충원을 완료할 예정입니다. 인근에 올해 말 목표로 섬유, 의복 디자인 커리큘럼을 갖춘 대학 수준의 교육 기관도 세웁니다. 사내 교육·연구기관으로 운영한 뒤 외부 학생도 모집합니다. 이를 통해 기술 경쟁력 우위를 확보해야죠.”
▷해외 공장이 계속 늘고 있습니다.
“1980년대 방글라데시에 해외 첫 공장을 지은 이유는 싼 임금보다는 한국에 부과된 주요 수출국 쿼터 때문이었습니다. 이후 중국엔 임금이 싸서, 베트남엔 생산기지 다양화 전략의 일환으로 생산기지를 세웠습니다. 시장 규모가 큰 인도와 케냐에도 생산 거점을 마련 했습니다. 생산 기지를 확대하면 ‘적시 납품(speed to market)’ 등 여러 측면에서 경쟁력을 높일 수 있습니다.”
▷인도, 케냐 이외에 더 진출할 국가가 있습니까.
“중남미 시장 확대를 위해 엘살바도르 인근 과테말라에 꽤 큰 규모로 추가 투자할 계획입니다. 유럽 시장을 염두에 두고 모로코, 튀니지, 보스니아에 생산기지를 세우는 방안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해외 사업장에 자주 가십니다.
“현장이 거기에 있고, 모든 생산이 해외법인에서 이뤄지니까요. 최고경영자(CEO)가 현장을 중시하면 다른 간부들도 현장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흔히 현장에 답이 있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습니다. 현장에 가보면 말과 글로 주고받은 것과 다른 것이 항상 있습니다. 회사의 이상과 현장을 매칭하는 과정이 경영이라고 봅니다.”
▷대표 브랜드 노스페이스는 요즘도 잘되나요.
“노스페이스는 지난해 국내 단일 브랜드 최초로 매출 1조원을 돌파했습니다. 좋은 품질의 원자재로 트렌드에 맞는 옷을 만들었기에 10년간 국가고객만족도(NCSI) 지수에서 의류 브랜드 1위를 할 수 있었습니다. ‘좋은 옷을 오래 입는 것이 자연보호’라는 신념을 노스페이스에 구현하고자 노력해왔습니다. 눕시 패딩은 10년은 거뜬히 입을 수 있는 실용적인 옷입니다.”
▷일각에선 패션 라이선스 사업이 한계에 부닥쳤다고 합니다.
“자체 브랜드와 라이선스 브랜드가 경쟁하는 시장이 건전합니다. 라이선스가 잘되니 라이선스를 해야 한다는 도그마에 빠져선 곤란합니다. 제가 강조하는 게 있습니다. 각자의 길이 다르고 그걸 존중해야 한다는 겁니다. 경영엔 100가지 다른 길이 있고, 나름대로 다 가치 있는 길입니다.”
▷K웨이브가 거센데, K패션 브랜드는 적습니다.
“한국 의류업계엔 세계적인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ODM 기업이 많습니다. 하지만 한국 고유의 패션 브랜딩 역량은 세계적인 수준에 미치지 못합니다. 최근 등장한 신세대 디자이너들에 대한 기대가 큽니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투자하면서 경영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원무역은 자체 브랜드를 안 만듭니까.
“누군가 저에게 나이키처럼 하면 어떤가 물은 적이 있습니다. 나이키와 영원무역의 경험은 다릅니다. 각자 전문 영역이 있습니다.”
▷인수한 자전거 회사 스캇의 실적이 부진합니다.
“코로나 기간 스캇뿐만 아니라 모든 자전거 브랜드가 재고 분석을 제대로 하지 않은 실책을 저질렀습니다. 과다한 재고를 소진하는 데 시간이 걸리겠지만 스캇은 최고의 품질과 기술력을 갖췄기 때문에 지금의 난국을 타개할 수 있습니다.”
▷C커머스 공습은 어떻게 보십니까.
“의류 등 소비재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업종에서 심각한 중국발 과잉 공급과 저가 공세가 거셉니다. 한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시급히 해결해야 할 심각한 문제입니다. 정부는 긴급히 대비책을 세우고 제도를 정비해야 합니다. 소비자들에게 중국발 저가 제품의 실상을 알려야 합니다.”
▷50년 뒤 영원무역은 어떤 기업일까요.
“우리 업종에서 최고, 최대 기업이 되는 것을 넘어 가장 존경받는 기업으로 자리 잡길 바랍니다. 패션산업을 통해 국가와 세계 경제에 크게 이바지하는 기업이 됐으면 합니다.”
전설리/오형주 기자 slj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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