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년 만에 되살아난 대한제국의 ‘사직제례악’…숏폼 시대의 느린 공연
백성과 나라의 평안 기원한 제사
사라진 악기 복원, 화려한 복식 특징
유네스코 등재 위한 기초 작업의 시작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붉은 의복을 차려입은 110여명의 악단 사이로 대한제국의 황제가 천천히 걸어나온다. 용, 꿩, 산호 등 나라의 번영을 기리는 12개의 무늬가 수놓아진 검은 빛의 십이장복과 12줄의 구슬이 매달린 면류관이 화려하다. 신을 향한 걸음은 느리고 느려 구슬이 부딪히는 소리조차 고요하다. “제사를 지내는 마음은 태도로 드러나기 때문”(송지원 전 국립국악원 연구실장)이다.
“지극하도다 곤원이여. 능히 저 하늘과 짝을 이루고 넓고 포함하고 크게 빛나서 만물을 심도다.”
초헌례의 시작. 땅과 곡식의 신을 맞이한 황제가 첫 번째 술잔을 올린다. 대한제국의 제사인 사직대제(社稷大祭)를 거행한다. 무대 위의 황제가 마주한 신은 600여명의 관객들. 국립국악원이 116년 만에 되살린 ‘사직제례악’(7월 11~12일, 국립국악원)을 연출한 이대영 중앙대 교수는 지난 10일 오후 기자들과 만나 “관객들의 조상까지 제사를 지낸다는 의미를 주고자 객석을 향해 제단을 뒀다”고 말했다.
‘사직제례악’은 조선시대 땅과 곡식을 모시는 사직대제에 쓰인 음악과 노래, 무용이다. 역대 왕들의 제사를 모시는 종묘제례와 함께 조선시대 국왕이 주관한 가장 중요한 의식이다. 이 교수는 “현대적 관점으로 보면 종묘보다 사직이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며 “사직은 국민의 안녕과 행복,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라고 강조했다.
사직제례악은 일제 강점기를 지나며 명맥이 완전히 끊겼다. 1908년 전통문화말살정책으로 사라졌던 사지제례악이 복원된 것은 80년이 지나서였다. 1988년 사직대제보존회가 제례절차를, 2014년 국립국악원이 제례악을 복원했다.
‘사직제례악’ 복원에 참여한 송지원 전 국립국악원 연구실장은 “2014년엔 정조대의 사직제례악을 복원했다면 이번엔 대한제국의 사직제례악을 복원했다”며 “1897년 고종이 황제국을 선포하며 모든 의례가 황제국의 위격에 맞게 재편됐다. 이번 공연은 국립국악원 최초로 황제국 위격에 맞는 ‘사직제례악’ 재현 무대”라고 말했다.
모든 절차는 대한제국의 예법에 맞게 연출된다. 특히 황제의 복식이 가장 눈에 띄는 차이다. 송지원 전 실장은 “조선시대 제후국에선 복식에 수놓은 상징물이 9개였으나 황제는 12개”라며 “면류관 구슬도 9개에서 12개로 늘었다”고 귀띔했다.
음악은 더 풍성하면서도 단정하다. ‘악학궤범’을 바탕으로 국립국악원 악기연구소와 김현곤 국가무형유산 악기장 기능조유자, 김환중 무형유산 단소장 보유자가 대나무 두 대를 붙여 만든 악기인 관(管), 생황과 유사한 화(和), 생(笙), 우(竽)를 복원했다. 송 전 연구실장은 “더욱 위용있는 음악을 위해 일부 선율 악기는 ‘대한예전’ 기록보다 더 많은 수를 배치했다”고 말했다. 다만 제단은 실제 사직제례악과 달리 간소화했다. 공연 무대의 연출을 위해서다.
나라와 백성의 평안을 기원하는 제사는 시대를 관통한다. 송 전 실장은 “제사 행위의 가장 큰 의미는 ‘근본을 보답하고 시초를 돌이키는’ 보본반시(報本反始)”라며 “왕의 1년 스케줄에서 제사는 가장 큰 의미를 차지한다”고 했다.
하지만 1시간 30분간 예를 지키며 신께 제사를 올리는 경건한 과정은 ‘숏폼 시대’를 살고 있는 관객들에겐 ‘자기와의 싸움’이 될지 모른다. 모든 것이 한없이 느려 때론 숨이 막힐 정도다. 하지만 1시간 30분의 제례가 끝나면 고요한 평안이 찾아온다.
송 전 실장은 “지금은 조선왕조도 아닌데 이러한 제사가 필요한 것은 나를 존재하게 하고 나를 가르치며 인간답게 해준 하늘, 땅, 조상, 스승을 기리며 온전한 나의 근본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라며 “그러면서도 사직제례와 함께 울려퍼진 위용있는 음악을 집중해서 듣는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국립국악원은 대한제국의 사직제례악을 올리는 이번 공연을 유네스코 등재를 위한 기초 작업의 일환이라고 말한다. 이건회 국립국악원 정악단 예술감독은 “사직대제는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됐지만 사직제례악은 아직 그러지 못했다”며 “사직제례악의 국가무형유산 지정을 목표로 하고, 나아가 종묘제례악처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조선시대엔 사직제례악을 마친 뒤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쌀을 나눠줬다. 이번 국립국악원의 공연을 마친 후엔 관객들에게 쌀과자를 전달할 예정이다. 모두의 평안을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 교수는 “민주 국가에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지만, 황제국에선 모든 것이 황제의 소유였다. 이런 국가 체제에서 백성의 평안을 위해 제사를 지내왔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진다”며 “제례에는 객이나 구경꾼이 있으면 안된다. 모두가 제례에 참여하는 사람이다. ‘사직제례악’ 공연은 5000만 국민들이 불편함 없이 행복을 기원하기 위해 국립국악원이 올리는 제사”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해마다 10월에 사직단에서 열리는 제례엔 대통령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혹은 외교부 장관이 와서 예의사(禮儀使, 제사의 의례 절차를 맡는 임시 관직) 역할을 해보면 어떨까 싶다”고 덧붙였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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