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하는 아빠 과학자]⑨ "네덜란드에선 육아휴직 없어도 육아·연구 병행 어렵지 않아"
<편집자 주> 육아휴직을 쓰는 아빠가 늘고 있다고 합니다. 과학기술계에서도 느는 추세지만 현장 경험과 연구 지속성이 과학자에게 중요한 만큼 자녀를 위해 연구를 멈추는 건 쉽지 않습니다. 연구의 꽃을 피워야 하는 시기인 30, 40대 아빠 과학자에게 육아휴직은 어려운 결정입니다. 하지만 과학기술계도 예외여서는 안됩니다. 장기적으로 일과 가정이 양립해야 인재가 지속적으로 유입되기 때문입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동아사이언스는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WISET)과 함께 육아휴직, 단축근무 등 육아지원 제도를 활용하는 과학자들을 직접 만났습니다. 남성 과학자가 겪는 현실 육아, 필요한 육아지원 제도, 아빠가 되면서 달라진 삶과 일에 대한 태도 등을 릴레이 인터뷰를 통해 생생히 들여다 봅니다. 과학자를 꿈꾸는 이들에게 '육아'가 걸림돌이 되지 않는 합리적, 현실적인 방안을 함께 고민해 보기를 기대합니다.
서유럽의 나라 네덜란드는 '과학 강국'이다. 세계적인 반도체 장비 제조업체 ASML, 전기전자업체 필립스 등 장쟁한 과학기술 기업이 있다. 이공계 분야에서 암스테르담대, 라이덴대, 그론능겐대 등 세계 정상급 대학이 있다. 이곳의 아빠 과학자들은 어떻게 육아를 하고 있는지 지난 5일 이우제 ASML 연구원, 김용수 암스테르담대 교수를 화상으로 만나 들어봤다. 이들은 한 목소리로 "네덜란드 특유의 가족중심적인 분위기 덕분에 육아와 연구를 병행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고 언급했다.
이 연구원은 석사까지 한국에서 마치고 2015년 9월 테벤트대에서 '응용물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네덜란드에 정착했다. 현재 이 연구원은 ASML에서 이미징 장비의 성능을 테스트하는 기술을 연구하고 장비를 테스트하는 일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 박사 과정까지 마친 김 교수는 2018년 말 암스테르담대에서 암 연구를 하기 위해 네덜란드에 왔다.
이들이 네덜란드에 정착해 가장 놀란 점은 가족중심적인 분위기다. 김 교수는 "함께 연구하는 팀원들과 같이 밥 먹는 일이 손에 꼽을 정도로 '개인주의' 하다"면서 "놀랍게도 그 개인주의 안에 가족이 들어가 있어 가족과 관련한 일은 어떤 일보다 중요하게 여기며 그 기준을 타인에게도 적용한다"고 말했다.
이 연구원은 "네덜란드에 정착한지 6개월 됐을 때 중요한 학회 출장을 앞두고 출발 당일 아내가 아팠다"면서 "그날 연락해서 사정을 설명하니 동료들이 모두 '당연히 가족이 먼저지. 집에서 아내를 돌봐'라며 이해를 해줬다"고 말했다. 자녀 학교 행사, 부모님 건강검진, 자녀 병원 방문, 집 수리 등 크고 작은 가족일로 근무 시간 중간에 나오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김 교수는 아내가 첫째를 2019년 한국에서 낳을 때 한국에 2개월, 둘째를 2023년에 낳을 때 1개월 머물렀다. 네덜란드 노동자에게 부여된 휴가는 기관별로 살짝 다르지만 대부분 약 40일이다. 이들은 "휴가 날짜 안에서 가족 일로 장기간 휴가를 써도 당연시 여기는 분위기"라고 입을 모았다.
분위기와는 달리 육아 관련 제도는 한국보다 특별히 월등하지 않다. 네덜란드는 모든 여성 근로자가 출산 전 6주, 출산 후 10주 총 16주의 출산휴가를 사용해야 한다. 유급 육아휴직 제도가 생긴 것도 2022년 8월이 처음이다. 배우자 출산휴가도 2020년 전엔 3일만 주어졌다. 현재 배우자 출산휴가는 출산 6개월까지 6주를 쓸 수 있게 바뀌었다.
그럼에도 네덜란드 합계출산율은 2022년 기준 1.49명으로 높은 편이다. 이처럼 네덜란드에 육아친화제도가 발달하지 않은 데 대해 김 교수는 "특별히 육아제도가 없어도 충분히 일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특히 다채로운 '유연근무제'를 허용하는 분위기가 과학자들이 연구와 육아를 동시에 할 수 있도록 돕는다. 8세, 5세 자녀가 있는 이 연구원은 아침 7시 반에 출근해 4시에 퇴근한다. 4시부터는 자녀를 학교에서 하원시키고 함께 시간을 보낸다. 네덜란드에서는 만 4세에 8년간의 초등학교 과정이 시작된다. 학교는 7시에 시작한다.
4세, 1세 자녀가 있는 이 교수는 둘째가 어려 아내와 번갈아 가며 특정 요일에 쉬는 주 4일 근무를 하고 있다. 그는 "오랫동안 연구를 쉬면 연구 흐름을 놓치기 쉽다"면서 "이처럼 다양한 유연근무제로 연구를 이어가면서도 육아를 할 수 있게 하는 분위기가 연구에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이같은 육아친화적인 문화는 과학자들의 연구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교수가 연구지원금을 정부나 기관으로부터 받기 위해 사업과제를 청해야 해요. 이 자격요건에 '박사 학위 취득 후 5년', '박사 학위 취득 후 10년' 등 연구기간에 따라 과제별로 신청 자격 요건이 있어요. 이때 아빠는 6개월, 엄마는 2년간 육아를 하는 데 시간을 투자했다고 보고 그만큼 유예 기간을 줍니다." 김 교수의 설명이다.
모든 대학교에서 박사후연구원뿐 아니라 박사과정생은 교직원으로 포함시킨다. 대부분 대학에서 박사과정생은 최소 4년을 계약한다. 이 연구원은 "이같은 안정적인 환경 덕분에 한국과 달리 박사과정 중에 연구원들이 자녀를 출산하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이 연구원은 "가족 일로 연구를 잠시 다른 동료에게 맡겨야 하는 날이 있지만 서로 먼저 맡아줄테니 편안하게 갔다오라는 분위기다"라면서 "미안함이나 죄책감을 덜 느끼게 된다"고 했다.
이 연구원은 또 자녀의 치료 문제로 대학에서 박사 과정 중 수개월 간 연구에 집중하지 못해 성과를 내지 못한적이 있었다. 4년 계약 기간이 만료돼 '8개월간 계약 기간 연장 신청을 하고 학위를 따겠다'고 연장 신청을 학교에 했다. 그날 바로 학교 학과장으로부터 '8개월이 부족하지 않냐'면서 연장을 더 해줄테니 편안하게 연구해라라는 전화를 받았다. 안정적으로 연구를 할 수 있다는 믿음이 크게 생겼다는 게 이 연구원의 생각이다.
김 교수는 "네덜란드 과학계 자체가 '경쟁'보다는 '협업' 위주"라면서 "대학 연구팀끼리 서로 필요한 장비, 데이터 등을 자유롭게 공유할 수 있는 분위기"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 연구원과 김 교수는 '내 손으로 내 자녀를 키울 수 있다'는 점이 네덜란드에서 연구와 육아를 이어가는 것의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아보카도 비빔밥, 피자, 볶음밥 등을 자녀에게 직접 만들어 줄 수 있어 행복합니다. 회사나 대학에서 충분히 연구한 뒤 집에 돌아가면 가족생각만 해요. 자녀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어떤 활동을 좋아하는지, 어떤 친구를 좋아하는지 확실히 알 여유가 있습니다. 최고의 장점이지요."라고 말했다.
이하 일문일답.
Q. 유연근무제가 다채롭게 적용되는 까닭이 무엇인가.
"노동자의 권리가 굉장히 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네덜란드는 모든 직장에서 노동자가 3년만 일하면 직장이 정규직으로 고용해야 할 정도로 노동자 권리가 강하다. 직장에서 직원을 쉽게 입사시키지도 않고 퇴사시키지도 못한다. 때문에 직장에서는 최대한 노동자의 권리를 존중해 직장에 오래 다니게 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직원별로 요구하는 근무 조건을 직장과 직원이 협상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다. 또 네덜란드도 고령화가 심해서 사회 전체적으로 육아를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더욱 조성해 출산율을 높이려고 하고 있다."(김 교수)
Q. 네덜란드 박사과정생이 자녀를 많이 출산한다는 점이 한국과 매우 다른 것 같다.
"그렇다. 일단 충분한 계약 기간으로 안정적인 환경인데다 박사학위 이수학점이 높지 않다. 40점인데 반은 자기계발, 반은 전공공부를 위한 학점이다. 전공공부를 위한 학점은 학회 참여, 학부생 지도 등을 해도 이수할 수 있다. 학점을 따기 쉬워 공부 부담이 적다.
네덜란드에서는 석사 때까지 지식을 공부하는 데 매진하고 박사 때부터는 나만의 연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다. 창의적인 연구를 통해 좋은 논문을 써야 하는 것이다. 학교에서 연구원이 자신의 연구에 몰입하면 될 뿐 학교 공부에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이 연구원)
Q. 네덜란드에 여성이 출산 후에도 커리어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나.
"대부분 한다. 유연 근무제 때문에 가능한 것 같다. 5일 중 2일은 조부모가, 2일은 휴가를 내거나 일을 쉬는 날로 정해서 돌보기 위해 부모가, 나머지는 기관에 돌봄을 부탁하는 경우가 굉장히 흔하다."
[이채린 기자 rini11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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