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통한 삶이라 웃을 수 있다
비슷한 성향의 ‘중년 구락부’ 아니랄까 봐 요즘 내 페이스북 피드는 최근 개봉한 영화 ‘퍼펙트 데이즈’ 예찬으로 도배돼 있다. 나 역시 이 영화 전도사가 되어 성실한 전도 활동을 하고 있지만 인생의 새로운 좌표를 만난 듯한 찬사를 반복해 듣다 보니 내 비뚤어진 마음에 의심의 작은 모닥불이 지펴진다. 나는 정말 영화 속 히라야마(야쿠쇼 코지)의 삶에 반한 것일까?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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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데이즈’는 이율배반적 표현이지만 ‘나는 자연인이다’의 도시 버전 같은 영화다. 육십 대 후반 정도로 추정되는 독신의 히라야마는 매일 새벽 눈을 뜨면 집 앞 자판기에서 커피 한 캔을 뽑아 도쿄 시부야구의 공중 화장실 청소를 하러 간다. 누가 들여다보지 않는 변기 구석까지 꼼꼼히 닦고 나서 근처 신사 벤치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고 나뭇잎 사이로 빛나는 햇빛을 필름 카메라로 한 컷 찍는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목욕을 한 뒤 지하철역 단골 식당에서 간소한 저녁을 먹고 돌아와 책을 읽다가 잠이 든다. 일주일의 루틴이 칸트의 시계처럼 돌아가고 주말에는 빨래방과 필름 현상소, 헌책방, 단골 술집 방문이라는 주 단위 시계가 돌아간다. 영화는 히라야마의 반복되는 일상을 주인공의 표정만큼이나 과묵하게 보여준다. 요약하자면 히라야마의 삶은 ‘나는 자연인이다’처럼 외부의 자극을 최소화시킨 안빈낙도의 세계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우리가 그렇게도 무서워하는 ‘독거’와 ‘빈곤’과 ‘노년’이 환상적으로 어우러진 악몽의 시뮬레이션이다. 고독사 예약은 기본사양. 그런데 왜! 나는, 많은 관객은 내일 당장 서울시 화장실 환경미화원에 지원이라도 할 것처럼 이 영화에 열광하는 걸까.
한 줄 평에 언급되는 구도니 수행이니 하는 단어를 쓰기에 ‘퍼펙트 데이즈’는 너무 매혹이 강한 영화다. 히라야마가 출근길에 듣는 음악이 트로트 메들리 리믹스 100선이 아닌 패티 스미스라니, 그가 노란 스탠드 아래 보는 게 유튜브 드라마 요약 영상이 아니라 윌리엄 포크너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라니 강남좌파나 힙스터 중2병 취향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감각적이다. 게다가 젊은 시절부터 그렇게 열심히 들었다면 마그네틱이 다 늘어졌을 카세트테이프까지 등장시키다니, 힙스터 낭만이 너무 심하게 돋는 거 아닙니까?
그럼에도 패션만으로 넘어갈 수 없는 무게감이 히라야마의 삶에는 있다. 소박한 일상에 대한 감사가 아니라 인생을 더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국면에 다다랐을 때 그 고통을 짊어지는 방식이다. 영화에서 히라야마가 격렬한 감정을 드러내는 딱 한 장면이 있는데 전후 설명은 없지만 그가 아버지에게 큰 실망을 주고 가족과도 연을 끊고 살고 있다는 걸 알려준다. 사연은 모르겠으나 고통스럽게 눈물을 흘리는 그의 모습에서 그가 자본론을 굽는 시골 빵집 주인의 심정으로 고상하게 수도승 같은 삶을 선택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유추를 할 수 있다. 어떤 식으로든 좌절했고 세상에서 밀려났으며 더이상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삶에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은 많지 않았으리라.
히라야마는 매일 새벽 문을 열고 나오며 하늘을 한번 보고 씩 웃는다. 맑아도 웃고 흐려도 웃고 비가 와도 웃는다. 이건 소박한 일상에 대한 만족이나 감사가 아니라 고통을 이겨내는 일종의 의식이다. 나이가 들면 웃을 일이 없어진다는 건 그냥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올해 들어 한 달에 한 번씩은 부모상이 아닌 동기간의 부음 소식을 들었다. 집에 있다가 무방비 상태로 달려 나가는 모습이 훤히 보이는, 장례식장에서 가장 허름한 옷차림의 늙은 아버지의 망연한 표정과 엄마의 영정 사진 곁 낯선 조문객들 앞에서 도무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는 사춘기 소년의 얼굴을 봤다.
자식을 키우면서 내가 자식의 미래를 위해 무언가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 것들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착각이었는지 매일 깨닫고 있다. 노욕으로 똘똘 뭉쳐 전 국민의 욕을 먹는 요즘 축구협회나 한자리 얻기 위해 불타오르는 중년들의 발악을 보면 회사의 뒷방 늙은이로 존재감이 쪼그라져 가는 인생이 근사해 보일 지경이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면 불안하고 아는 번호로 전화가 오면 가슴이 내려앉는다. 히라야마처럼 가족과도 연을 끊게 하는 모종의 절망적 사건이 없더라도 나이 들어간다는 건 크고 작은 절망과 포기의 조각들로 조각보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맑은 하늘을 보면서 웃고, 먹구름 낀 하늘을 보면서 웃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스무살 무렵 영화에 나온 루 리드의 ‘퍼펙트 데이’를 처음 듣고 ‘완벽한 날이라면서 왜 이렇게 우울하냐’ 생각했다. 실연당하고 새벽까지 술 먹다가 만신창이가 돼서 지하철 첫차를 타러 갈 때의 느낌인 이 노래의 제목이 왜 ‘완벽한 날’인지 스무살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은 ‘공원에서 맥주(상그릴라)를 마시고 있다가 어두워지면 집에 돌아가’고 ‘동물원에 가서 먹이를 주고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가’는 날이 더없이 완벽한 하루라는 걸 알겠다. 중년을 지나 고요하고 파고가 최소한인 삶을 누릴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완벽한 인생이라는 걸.
‘김은형의 너도 늙는다’는?
‘너도 늙는다’의 시즌2를 온라인에서 시작합니다. 더 솔직하고 더 유쾌하고 더 괴로운 노화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갱년기 엄마의 사춘기 아들 ‘사생결단 유혈육아’도 부끄럼없이 쓸 예정입니다. 아들아! 너도 늙는다!!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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