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팬 분노케 한 홍명보의 "내 안의 꿈틀거린 무언가"
도전 정신은 존중하지만, 과정은 최악이었다. 울산 HD 팬들이 분노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홍명보 감독은 울산 지휘봉을 내려놓고 한국 축구 대표팀 사령탑으로 부임한다. 9월 15일 홈에서 열리는 팔레스타인과 2026 북중미 월드컵 아시아 3차 예선 1차전부터 대표팀을 이끌고, 계약 기간은 2027년 1~2월 열리는 사우디아라비아 아시안컵까지 약 2년 6개월이다.
대표팀 감독직은 '독이 든 성배'라 불리지만, 지도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자리다. 처음 대표팀 사령탑을 맡은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1무2패의 초라한 성적으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던 홍 감독에게도 마찬가지일 터.
10년 전 실패의 아픔을 맛봤던 홍 감독에겐 2년 뒤 열릴 북중미 월드컵에서 화려하게 명예를 회복할 절호의 기회다.
하지만 울산 팬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단순히 소속팀을 버리고 대표팀으로 향해서가 아니다. 홍 감독이 대표팀 사령탑 후보에 오를 때마다 줄곧 "울산을 떠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해왔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 5일 수원FC와 경기 전 취재진과 인터뷰에서는 "(감독 선임 작업을 진행하는) 이임생 기술총괄이사를 만나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다"며 대표팀 감독 부임설에 선을 그었다. 하지만 이날 밤 수원FC전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자신을 찾아온 이 이사의 설득을 뿌리치지 못하고 단 하루 만에 대표팀 사령탑 제의를 받아들였다.
시즌 중 사령탑을 잃은 울산 팬들은 격분했다. 이에 '통수', '배신자', '런명보', '피노키홍' 등 격한 반응을 보이며 홍 감독을 향해 비난을 쏟아냈다.
실망한 팬들이 납득할 만한 확실한 설명이 필요했다.
홍 감독은 10일 울산문수경기장에서 열린 광주FC와 하나은행 K리그1 2024 22라운드 홈 경기를 마친 뒤 기자회견에서 속내를 털어놨다.
홍 감독이 당장 울산 지휘봉을 내려놓는 것은 아니다. 그는 대표팀 업무를 시작하는 시점에 대해 "축구협회에서 아무런 말이 없었다. 연락하고 있지 않고, 결정된 게 없다"고 밝혔다. 오는 13일 FC서울과 23라운드 홈 경기까지는 지휘할 예정이다.
먼저 홍 감독은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을 떠올리며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가 2014년 이후였다. 월드컵이 끝난 뒤 상황은 굉장히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동안 대표팀 감독으로 하마평에 올랐던 데 대해서는 "솔직히 심정은 가고 싶지 않았다. 2014년 이후로 10년 정도 지났다. 어려운 시절도 있었지만, 울산에서 3년 반 동안 좋은 시간도 있었다"면서 "어떻게 보면 10년 전 국가대표, 축구인 홍명보의 삶의 무게를 그때 내려놓을 수 있어 홀가분한 것도 사실이었다"고 털어놨다.
이어 "그렇기에 2월부터 제 이름이 저의 의도와 상관없이 전력강화위원회, 축구협회, 언론에 나왔다"면서 "정말로 괴로웠다. 뭔가 난도질 당하는 느낌이었다"고 호소했다.
그럼에도 대표팀 감독직을 수락한 첫 번째 이유는 축구협회가 목표로 삼은 기술 철학인 'MIK(Made In Korea)'였다. 앞서 이 이사는 "(홍명보 감독은) 무엇보다 20세 이하, 23세 이하 지도자 경험 및 협회 전무 행정 경험으로 폭넓은 시각이 있다"면서 "앞으로 각급 대표팀의 연속성을 강화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홍 감독을 선임한 이유를 밝혔다.
홍 감독은 "정책은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실행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면서 "A대표팀 감독이 이를 실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임생 이사가 (MIK와) 관련해 굉장히 강하게 부탁했다. 그 부분에 대해 어느 정도 동의했다"고 덧붙였다.
두 번째 이유이자 결정적으로 다시 대표팀 지휘봉을 잡게 된 계기는 "내 안에서 무엇인가가 꿈틀거려서"였다. 홍 감독은 "(브라질 월드컵에서) 실패했던 과정과 그 후의 일들을 생각하면 너무나 끔찍한 일이었다"면서 "도전하는 게 두려웠다. 그 안으로 또 들어가는 것에 대해 답을 내리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이어 "결과적으로 내 안의 무언가가 나오기 시작했다"면서 "'다시 도전해 보고 싶다'라는 강한 승리욕이 생겼다. 새 팀을 정말로 새롭게 만들어서, 정말 강한 팀으로 만들어서 도전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홍 감독은 "(울산에서) 10년 만에 간신히 재미있는 축구도 하고 선수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나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면서 "나는 나를 버렸다. 이제는 대한민국 축구밖에 없다"고 각오를 드러냈다.
울산 팬들에게는 "죄송하고 드릴 말씀이 없다"며 고개를 숙였다. 이어 "온전히 나 개인만을 위해 울산을 이끌었다. 울산에 있으면서 선수들, 팬들, 축구만 생각하며 보낸 시간이 너무 좋았다"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얼마 전까지는 응원의 구호였는데, 오늘 야유가 됐다.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전했다.
CBS노컷뉴스 김조휘 기자 startjoy@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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