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대전에서의 학창시절, 그 추억을 회고하며

2024. 7. 1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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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 전 인천산곡남중 교장

흔히들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고 말한다. 분명 추억은 남다른 가치를 소유한다. 여기에는 기쁨, 긍지처럼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플러스 요인이 있고, 아쉬움, 불만처럼 정서적 부담을 남기는 마이너스 요인도 있다. 둘 다 삶에 영향을 미치는 동력(動力)임에 틀림없다. 필자 또한 예외가 아니다. 고향 대전에서의 꿈 많고 순수했던 중·고등 학창시절의 추억은 두 가지를 모두 품고 평생 필자의 삶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쳐왔다.

필자는 중학교 시절(1973-1976), 특히 중3 시절의 추억에 애착을 많이 느낀다. 당시 전국의 5대 도시가 고교평준화를 단행함에 따라 대전은 고교입시가 치열함을 넘어 마치 사활이 달린 듯 학교마다 경쟁이 혹독했다. 필자의 모교인 D중학교는 장로교계통의 미션스쿨이었다. 당시 중3 담당 선생님들은 학생들 지도에 특별히 헌신적이었다. 물론 그것은 한강 이남의 중부지방에서 오랜 명문고로 역사와 전통을 지닌 D고등학교에 진학을 시키기 위한 경쟁 때문이었다.

매달 월말고사 성적에 따라 교과별로 틀린 문항의 개수만큼 따끔한 체벌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폭력'이기 이전에 따뜻한 '사랑의 매'로 인식되었다. 성적 발표와 함께 소위 '타작 시간'으로 얼룩진 각 교과는 고교입시라는 현실의 치열함을 인식시켰고 '노력 없이 얻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학습의 진리를 각인시켰다. 야간 10시까지 거행되던 자율학습은 도시락 2-3개 중의 마지막을 비우고도 허기질 정도로 에너지 소모가 많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담임선생님은 늘 함께 하며 우리 곁에 든든한 응원군이었다.

'일촌광음불가경(一寸光陰不可經)' 이듯이 한순간도 아까워 귀가 길의 어두운 버스 안에서조차 책을 가까이 하다 보니 시력이 급강하하고 급기야는 안경을 착용하게 되었다. 이런 인고의 시간 끝에 당시 고교입학 학력고사에서 200점 만점에 198점(커트라인 191점)으로 무난히 D고교에 합격하였다. 당시 모교 중학교는 총 44명이란 합격자를 배출하는 성과를 거뒀다. 지금도 당시의 빛바랜 졸업사진을 보면 그 옛 이야기들이 떠오르고 생생한 추억에 젖곤 한다.

대망의 고교 3년간(1976-1979)은 그야말로 지역사회의 기대 속에서 괄목상대(刮目相對)하게 성장하던 시절이었다. 한 반에 60명씩 총 12개 반 720명의 동급생들은 당시 교련이란 군사훈련에도 그 흔한 기합 한 번 받지 않고 존중을 받으며 고교 시절을 보냈다. 모두가 공부에의 자발성과 적극성을 가진 성실한 동급생들은 당시에는 몰랐지만 대학 재학 중부터 각종 4대(사법, 행정, 외무, 기술) 고시에 합격을 하면서 두각을 드러냈다. 그런 친구들과 같은 반과 학교에서 동고동락을 했다는 추억은 두고두고 긍지와 기쁨, 자부심의 원천이었다.

고2 학년말, 학년주임 선생님은 이과에서 문과로 전과하려는 필자에게 승인을 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설득하셨다. 그것은 단도직입적으로 S대를 갈래 말래 하는 것이었다. 당시 대학 입학 정원이 늘어난 이과는 상대적으로 문과에 비해 수월했다. 하지만 충분히 미래의 비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만 고집하던 필자는 결국 문과에서 S대 지원에 밀려 교사 양성의 전통의 명문 K사범대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그 결정의 8할은 대학 합격자 발표 후에 "그래, 수석했냐?"고 묻던 담임선생님의 질문에서 드러났다. S대 지원에 박절했던 모습은 바로 이것이었다. 하지만 필자의 의지를 격려하고 지지하지 않은 것은 평생 불만과 아쉬움이 남아 있다.

'순결, 진실, 용기'의 고등학교 교훈을 늘 잊지 않고 기억한다. 또한 모교 야구팀을 찾아 응원하는 것도 일상이 되었다. "우리는 D고,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 야!"라는 응원 구호는 늘 생생하다. 이제 동기생들이 하나씩 은퇴하며 제2의 인생을 사는 지금도 대전 사랑과 모교에 대한 애정은 식을 줄 모른다. 더불어 지역사회의 기댓값을 생전에 반드시 되돌리고, 나아가 이 나라를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이타적인 인물로 봉사할 것을 다짐해 본다. 이는 필자의 평생 결의이고 고향 대전에서의 아름답고도 아쉬운 추억으로 가슴 속에 남아 있다. 전재학 전 인천산곡남중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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