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보는 홍명보를 버렸다…분노한 팬들, 외면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어떤 말로도 상처 받은 팬들의 마음을 달래기 어려울 듯하다.
대한축구협회는 지난 7일 홍명보 울산 HD 감독을 한국 축구 대표팀 사령탑으로 내정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다음날 이임생 기술총괄이사가 브리핑에서 홍 감독의 대표팀 사령탑 선임을 공식화했다.
울산 팬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줄곧 대표팀 사령탑 후보로 거론됐으나 꾸준히 거절 의사를 밝혀왔던 그가 돌연 팀을 떠나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 이에 '통수', '배신자', '런명보', '피노키홍' 등 격한 반응을 보였다.
홍 감독을 선임한 축구협회를 향한 비난도 쏟아졌다. 지난 2월 위르겐 클린스만 전 감독 경질 후 차기 사령탑 선임 작업을 진행한 지난 5개월 동안 헛발질만 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외국인 감독을 선임하겠다고 큰소리쳤기 때문이다. 유력 후보로 제시 마쉬, 헤수스 카사스 등 검증된 지도자들이 거론돼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연봉 등 세부 조건에 대한 입장차를 좁히지 못해 협상은 모두 결렬됐다.
지난 5개월을 허투루 보낸 축구협회의 선택은 결국 국내 지도자인 홍 감독이었다. 시즌 중인 현역 감독을 빼간 축구협회는 K리그를 무시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이에 울산 서포터스 '처용전사'는 성명을 통해 "협회는 처용전사와 한국 축구 팬들의 요구를 무시한 채 해결 방법이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표류하다가 결국 다시 'K리그 감독 돌려막기'라는 최악의 상황에 이르게 했다"고 규탄했다.
홍 감독 선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이임생 이사는 "시즌 중임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결정을 해준 울산 구단에 감사하다"면서 "소속팀 감독을 시즌 중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해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를 숙였다.
이 이사는 ▲빌드업 등 전술적 측면 ▲원 팀을 만드는 리더십 ▲연령별 대표팀과 연속성 ▲감독으로서 성과 ▲현재 촉박한 대표팀 일정 ▲대표팀 지도 경험 ▲외국 지도자의 철학을 입힐 시간적 여유의 부족 ▲외국 지도자의 국내 체류 문제 등 8가지 이유로 홍 감독의 선임 배경을 밝혔다.
이 이사는 홍 감독을 선임하기 위해 집까지 찾아가 설득했다. 최종 후보에 올랐던 외국인 감독 2명과 협상이 결렬돼 선택지가 홍 감독뿐이었기 때문이다.
홍 감독은 지난 5일 수원FC전을 앞두고 취재진과 인터뷰에서 "이임생 이사를 만나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다"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이 이사는 이날 밤 수원FC전을 마치고 귀가한 홍 감독을 찾아가 설득했고, 홍 감독은 단 하루 만에 대표팀 사령탑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제 홍 감독이 팬들을 납득시킬 만한 확실한 답변을 내놓을 차례였다.
홍 감독이 당장 울산 지휘봉을 내려놓은 건 아니었다. 10일 울산문수경기장에서 열린 광주FC와 하나은행 K리그1 2024 22라운드 홈 경기에서도 팀을 이끌었다.
언제부터 대표팀 업무를 시작할지는 구단과 협의를 통해 결정할 예정이다. 이 이사는 "울산 구단에서 협회에 협조하고 한국 축구 발전에 도움을 줬다"면서 "울산에서 원하는 계획대로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경기 후 홍 감독은 대표팀 감독직을 받아들인 이유를 밝혔다.
홍 감독은 먼저 처음 대표팀 감독을 맡은 2014 브라질 월드컵을 언급하며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가 2014년 이후였다. 월드컵이 끝난 뒤 상황은 굉장히 힘들었다"고 말했다. 당시 홍 감독은 대표팀을 이끌고 1무2패의 초라한 성적으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그는 "솔직히 심정은 가고 싶지 않았다. 2014년 이후로 10년 정도 지났다. 어려운 시절도 있었지만, 울산에서 3년 반 동안 좋은 시간도 있었다"면서 "어떻게 보면 10년 전 국가대표, 축구인 홍명보의 삶의 무게를 그때 내려놓을 수 있어 홀가분한 것도 사실이었다"고 털어놨다.
이어 "그렇기에 2월부터 제 이름이 저의 의도와 상관없이 전력강화위원회, 축구협회, 언론에 나왔다"면서 "정말로 괴로웠다. 뭔가 난도질 당하는 느낌이었다"고 호소했다.
그럼에도 대표팀 감독직을 수락한 데 대해서는 첫 번째 이유로 축구협회가 설정한 기술 철학인 'MIK(Made In Korea)'를 꼽았다.
2017년부터 2020년까지 축구협회 전무이사를 맡은 홍 감독은 "행정 일을 하며 그 일에 큰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그 일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나왔다"면서 "축구 대표팀과 연령별 대표팀의 연계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이루지 못했다"고 언급했다.
이어 "정책은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실행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면서 "A대표팀 감독이 이를 실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이임생 이사가 (MIK와) 관련해 굉장히 강하게 부탁했다. 그 부분에 대해 어느 정도 동의했다"고 밝혔다.
앞서 이 이사는 "(홍명보 감독은) 무엇보다 20세 이하, 23세 이하 지도자 경험 및 협회 전무 행정 경험으로 폭넓은 시각이 있다"면서 "앞으로 각급 대표팀의 연속성을 강화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홍 감독을 선임한 이유를 밝힌 바 있다.
홍 감독은 두 번째 이유이자 결정적으로 대표팀 감독직을 수락하게 된 계기에 대해 "내 안에서 무엇인가가 꿈틀거렸다"고 답했다.
2014 브라질 월드컵 실패를 떠올린 홍 감독은 "예전에 실패했던 과정과 그 후의 일들을 생각하면 너무나 끔찍한 일이었다"면서 "도전하는 게 두려웠다. 그 안으로 또 들어가는 것에 대해 답을 내리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이어 "결과적으로 내 안의 무언가가 나오기 시작했다"면서 "'다시 도전해 보고 싶다'라는 강한 승리욕이 생겼다. 새 팀을 정말로 새롭게 만들어서, 정말 강한 팀으로 만들어서 도전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홍 감독은 "(울산에서) 10년 만에 간신히 재미있는 축구도 하고 선수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나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면서 "나는 나를 버렸다. 이제는 대한민국 축구밖에 없다"고 각오를 드러냈다.
실망한 울산 팬들에게는 "죄송하고 드릴 말씀이 없다"며 고개를 숙였다. 이어 "온전히 나 개인만을 위해 울산을 이끌었다. 울산에 있으면서 선수들, 팬들, 축구만 생각하며 보낸 시간이 너무 좋았다"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얼마 전까지는 응원의 구호였는데, 오늘 야유가 됐다.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전했다.
홍 감독은 오는 9월 15일 홈에서 열리는 팔레스타인과 2026 북중미 월드컵 아시아 3차 예선 1차전부터 대표팀을 이끈다. 계약 기간은 2027년 1~2월 열리는 사우디아라비아 아시안컵까지 약 2년 6개월이다.
CBS노컷뉴스 김조휘 기자 startjoy@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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