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의 정석’ 정려원 “‘졸업’은 운명 같은 인생작…많이 배웠죠”
‘첫사랑의 아이콘’. 배우 정려원이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 이후 약 20년 만에 이 타이틀을 다시 한 번 달았다. 이제 그의 인생캐릭터는 남자 주인공의 전연인, 첫사랑,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의대생 유희진이 아니다. 최근 종영한 tvN드라마 ‘졸업’ 속, ‘사교육 1번지’라 불리는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서 ‘스타 국어강사’가 된 서른다섯 서혜진이 그의 새로운 인생캐다.
서혜진이라는 캐릭터는 주인을 찾아가듯, 어느 날 불쑥 정려원의 앞에 나타났다. 지난 9일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정려원은 “마치 운명 같았다”고 작품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작년 3월, 그는 일기장을 펴놓고 함께 일해보고 싶은 작가‧감독의 이름을 적었다고 한다. 여기엔 ‘멜로 장인’ 안판석 감독도 포함됐다. 정려원은 이 꿈을 생각보다 빨리 이룰 수 있었다.
그로부터 딱 두 달이 지난 5월의 어느 날, 소속사 직원이 “누나, 이거 빨리 읽어야 될 것 같다”며 대본을 들고 찾아왔다. 그는 안판석 이름 석 자를 듣자마자 대본을 펴보지도 않고 합류를 결정했다. 운명적인 첫 만남이었다. 어떤 내용인지, 어떤 역할인지 전혀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대본을 읽지도 않고 결정한 건 생전 처음이었다. 감독님 이름을 일기장에 써놨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며 “’간절히 바라면 이렇게 만나기도 하는구나’, ‘스스로 준비돼 있으면 잘 해내겠구나’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 대학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시작했던 강사 아르바이트, 그게 국어강사 혜진의 시작점이다. 이후 승승장구하며 집안을 일으킨 가장이자, 뛰어난 강의력으로 학생‧학부모의 존경과 신임을 한 몸에 받는 14년차 스타강사가 됐다.
아무래도 학창시절을 한국이 아닌 호주에서 보낸 정려원은 이 배역을 준비하며 고민이 많았을 터다. 스스로도 “영어 강사 역이니 나에게 왔겠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맡은 역할이 국어강사인 걸 알곤 “이거 하나도 모르는데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고 했다. 그런 불안이 무색하게, 정려원은 맡은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그가 판서하며 강의하는 장면을 두고 시청자들 사이에서 “실제 강사 같다” “고등학생으로 돌아간 것 같다”라는 반응이 나왔을 정도다.
물론 그 뒤에는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 정려원은 ‘연습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교사 남편을 둔 친구에게 부탁해 교과서에 나오는 책을 구해서 읽고, 대치동 학원에 몰래 들어가 수업도 들었다. 여러 인강(인터넷 강의)을 찾아보고 , 자문해준 강사의 강의 영상도 돌려보며 강사들이 많이 하는 말, 판서 사이에 대사를 넣는 법 등을 연습했다.
안 감독과 동료 배우들의 공도 컸다. 정려원은 “감독님은 뭔가를 더하는 것보다는 빼는 걸 좋아하시는 분”이라며 “연기 디렉션은 딱 한 번 하셨다”고 했다. 이어 “답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스스로 답을 찾아나가도록 하셨는데, 그 과정에서 많이 배웠다”고 했다. 또 동료 배우들과의 합도 좋았다고 했다. 그는 “대사, 상대 배우 연기가 좋으니까 감정이 저절로 자연스럽게 나오더라”라며 “이런 현장에서 연기해야 ‘맛이 난다’고 하는구나 깨달았다”고 했다.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버린 혜진의 마음속 한 구석엔, 20대 초반의 혜진이 사는 텅 빈 방이 있었다. 다른 곳은 모두 돈과 차, 집, 명예, 존경, 우월감 등으로 채워졌으나 그 방 하나만은 텅 빈 채로 남아 있었다. 그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건 제자이자 동료 강사인 이준호(위하준)였다. 이준호는 뚜벅뚜벅 걸어 들어와 어린 혜진을 감싸 안아 다독여 주고, 밥 먹이고 쓰다듬어 주고, 일상을 함께 하며 그 공간을 사랑으로 꽉 채워주었다. 그런 다음 어린 혜진의 손을 꽉 잡고 방을 나왔다. 비었던 방은 준호의 사랑으로 가득 찬 공간이 됐다. 혜진은 그 덕분에 학원에서도, 인생의 한 챕터에서도 마침표를 찍고 졸업할 수 있었다. 잊고 있던 법 공부라는 꿈을 이루려 기쁜 마음으로 떠날 수 있었다.
혜진에게 준호가 있듯, 정려원에게는 ‘졸업’이 있다. 그는 이 작품으로 스스로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을 얻었다. 그는 “제 불안을 졸업하게 해준 작품”이라며 “다시 봐도 인생작(作)이 맞는 것 같다”고 했다. 이어 “저는 원래 감독님의 확인을 받아야 마음이 편했는데, 안 감독님은 절대 정답을 말씀해주시는 스타일이 아니다”라며 “제가 스스로 ‘오케이’를 해야 했고, 그렇게 스스로에게 ‘충분하다’고 말해주는 법을 배운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혜진을 떠나보내기 싫다”며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엔 혜진을 향한 애정과 이별의 아쉬움이 담뿍 묻어있었다. 그러면서 “혜진에겐 ‘enough’, 충분했고, 자신을 진실로 대할 수 있게 돼 고맙다고 하고 싶다”며 “혜진에게도, 저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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