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속에 마련된 조각 박물관 [김승민 큐레이터의 아트, 머니, 마켓]

2024. 7. 11.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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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김승민 큐레이터는 영국 왕립예술학교 박사로 서울, 런던, 뉴욕에서 기획사를 운영하며 600명이 넘는 작가들과 24개 도시에서 전시를 기획했다. 미술 시장의 모든 면을 다루는 칼럼을 통해 예술과 문화를 견인하고 수익도 창출하는 힘에 대한 인사이더 관점을 모색한다.
더그 에이킨이 미국 캘리포니아 카탈리나섬 인근 바다에 입수시킨 '물속의 파빌리온'(Underwater Pavilions·2016) ©Doug Aitken, Photography by Patrick T Fallon

이탈리아 서부 해안 도시 탈라모네(토스카나주)에 사는 파울로 판출리(63)는 13세에 어부가 됐다. 그리고 환갑이 넘은 지금도 작은 어선을 타고 바닷물을 가른다. 그의 고향 앞바다 속엔 평생 그를 매혹시킨 비밀이 숨겨져 있다. 난파선이 피워 내는 해림(海林)과 그 속을 유영하는 물고기 떼는 그의 영혼을 신비의 세계로 인도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의 신비로운 궁전은 파괴되기 시작했다. 거대한 괴물 '저인망 어선'이 해저 바닥까지 그물을 늘어뜨려 바닥을 샅샅이 파헤친 것. 해저 어류는 물론 해초까지 무자비하고 잔인하게 모조리 쓸어 담았다. 그는 "한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숲 전체를 태우는 짓"이라고 절규했다. 물론 시 당국이 불법 어로행위 단속에 나섰지만, 어선들은 GPS 신호를 끄고 위치를 숨긴 채 야만적인 파괴 행위를 계속했다.

이런 만행으로부터 해저 왕국을 지키기 위해 판출리는 본격적인 저항 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그의 행동은 놀라운 기적을 만들어 냈다. 그것은 바로 예술과의 만남이었다.

파울로 판출리. ⓒpaoloilpescatore

판출리는 이탈리아 최고 대리석 산지인 카라라(Carara) 지역 채석장으로부터 100여 개의 대리석을 무료로 받았다. 그리고 예술가들에게 '대리석으로 아름다운 작품을 빚어 줄 수 있는가' 의뢰했고, 그들은 기꺼이 응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경이로운 작품들은 '해저 전시장'으로 옮겨졌고, 저인망 어선의 무분별한 트롤링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어선 그물이 해저 작품들에 걸리거나 찢어졌기 때문이다.

에밀리 영(영국)의 작품 '흐느끼는 가디언'. ⓒEmily Young, Photography by Joshua Van Praag 2021

이들 작품 중 하나가 '2024 베니스 비엔날레'에 병행 전시 중인 에밀리 영(영국)의 작품 '흐느끼는 가디언'(Weeping Guardian)이다. 2015년에 바닷속으로 입수된 12톤짜리 거대한 작품이 진짜로 해저 왕국을 지키는 수호신이 된 것이다.

에밀리 영(영국)의 작품 '흐느끼는 가디언'. ⓒEmily Young, Photography by Joshua Van Praag 2021

에밀리 영과 이 프로젝트의 인연은 그가 토스카나의 산타 크로체 수녀원에서 작품 활동을 하면서 시작됐다. 석회암, 오닉스, 규암, 쇄설성 화성암, 청금석 등 이국적인 색상의 재료를 사용해 주로 인물을 조각했는데, 그는 작품을 빚을 때 '석재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석재와 협력'한다는 표현을 쓴다. 그의 할머니 캐서린 브루스는 20세기 초 파리에서 활동한 최초의 여성 조각가 중 한 사람으로, 로댕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당시 남극 탐험가 로버트 팰컨 스콧 선장과 결혼했으나, 그가 남극 탐험에서 돌아오지 못하자 그를 기리는 청동상과 대리석 조각상을 만들었다. 에밀리 영이 이 해저 프로젝트를 선뜻 수락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리라.

'흐느끼는 가디언'이 바다의 수호신이라면, 더그 에이킨(미국)이 캘리포니아 카탈리나섬 인근 바다에 입수시킨 '물속의 파빌리온'(Underwater Pavilions·2016)은 프리즘처럼 다각도로 반사하는 '포탈'을 통해 바다의 숭고함을 불러일으킨다.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MOCA)과 협력해 완성된 세 개의 이 수중 조각 작품은 기하학적 디자인의 반사면과 돌을 닮은 표면 등으로 이뤄져 있다. 스노클러 및 스쿠버 다이버들은 이 작품 사이를 헤엄칠 때, 마치 만화경 속을 지나는 듯한 황홀감과 신비로움, 그리고 거대한 바다의 리듬과 생명력을 온몸으로 체험하게 된다. 이런 바닷속 예술은 해양 보존의 중요성에 대해 눈뜨게 하고 실제 참여로 이어진다.

더그 에이킨이 미국 캘리포니아 카탈리나섬 인근 바다에 입수시킨 '물속의 파빌리온'(Underwater Pavilions·2016). ©Doug Aitken, Photography by Patrick T Fallon

런던에 거주할 때 나는 어항에 바닷물고기를 키웠다. '진짜' 바닷물로 어항을 채우고 온도조절기와 산소 탱크까지 설치했지만, 물고기는 살지 못했다. 어항 5분의 1 크기의 '살아있는 돌'을 어항에 넣고 2주 넘게 기다려 돌 속의 미생물이 나와야 비로소 그 물은 '살아있는 물'이 된다. 2년 동안 이 어항은 나에게 매일 경이로움을 선사했지만, 한 번의 실수(청소 중 온도계를 건드려 물 온도가 1도 상승했다)는 참혹한 재앙을 불러왔다. 평소 볼 수 없었던 이상한 바다 지렁이들이 나타났고 물고기들은 생명을 잃었다. 그리고 이 경험은 2009년 '지구를 인터뷰하다: 사진으로 보는 기후변화' 전시를 기획하는 단초가 됐다. 런던(주영 한국문화원)과 서울(대림미술관)에서 열렸는데, 당시 예술가들이 예측했던 지구의 모습은 지금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저인망 어선이 해저 환경을 파괴하면서, 올해 해저에 매장된 탄소가 대기 중으로 방출되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온 것이다. 미국 유타주립대학교 등 연구진은 이 내용을 국제학술지 '프런티어스(Frontiers)'에 발표했다. 이어 네이처 지도 저인망 어선의 활동이 기록된 1996~2022년의 자료를 검토한 결과, 저인망 어선에 의해 해저에서 방출된 탄소량은 약 85억~92억 톤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특히 동중국해, 발트해, 북해, 그린란드해 등 저인망 어업이 활발히 이뤄지는 곳일수록 방출 탄소량이 많았다.

이탈리아의 한 어부가 자신의 고향 앞바다를 지켰듯, 예술 작품이 질식해 가는 이 소중한 바다를 살릴 수 있다면? 아드리아해의 물결 위에서 나는 가슴 벅찬 희망의 해조음을 듣는다.

김승민 슬리퍼스써밋 & 스테파니킴 갤러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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