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돌과 융합의 100년… 한국미술의 ‘위대한 탄생’
권진규·박수근·이중섭·김환기
김차섭·이수억·최홍원 작가 등
1910년∼2000년대 작품 조망
기법 변화·조형 실험 등 한 눈에
천재 조각가이자 비운의 예술가 춘천고 출신 권진규 조각가의 마지막 외출 장소는 고려대박물관 현대미술실 개관식이었다. 그는 이곳에 전시된 자신의 작품 ‘가사를 걸친 자소상’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폐관 후서야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다음날 작업실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한쪽 어깨에 붉은 가사를 걸친 승려 흉상의 자신 모습을 구우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제는 흙이 된 권진규의 모습을 춘천문화예술회관에서 마주할 수 있다. 춘천문화재단은 도 최초로 ‘한국근현대미술명작전’을 개최, 박수근·김창열·박서보·이중섭·장욱진·천경자 등 64명의 작품 81점을 20일까지 전시한다. 고려대박물관 소장품을 중심으로 1910년∼2000년대까지 한국 근현대 미술의 흐름을 조망하는 대규모 전시다. 김차섭·변희천·이수억·이철이·이판석·장운상·장일섭·최홍원 등 한국미술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겼지만,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지역 연고 작가들의 작품도 만날 수 있다. 일제강점기·한국전쟁·민주화·세계화 등 시대적 맥락에서 드러난 작품세계를 △계승 △수용 △혁신 △자립 등 4개의 섹션으로 나눠 보여준다. 작가들 생애의 끝, 결말을 이미 알고 있어도, 그들이 남긴 작품은 볼수록 궁금해지고 눈에 밟힌다.
계승
조선말 한국미술은 전통을 지키려는 사람들과 새로운 문물을 수용하려는 개화파 간 혼돈 속에서 있었다. 이러한 흐름은 미술에도 적용, 전통과 근대의 혼재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김은호 작가가 그린 ‘순종어진’은 전통 양식을 따르면서도, 사진을 참조해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남종화 전통기법을 이어간 허백련 작가의 ‘산수도’는 근·중·원경을 강물과 구름으로 구분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옛 법을 충실히 따르고 내면화했던 작가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국내 최초 미술 유학생 고희동, 마라토너 손기정 선수의 올림픽 우승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운 것으로 유명한 이상범 작가의 실경산수화 ‘보덕굴’도 볼 수 있다. 당시 작가가 일제를 피하기 위해 금강산에 들러 그린 것으로 보이는데, 이응노 작가의 ‘금강산 보덕굴’과 함께 대표적인 금강산 소재 작품이다.
수용
일본 조선총독부는 문화통치를 위해 조선미술전람회를 개최, 당대 미술의 구심점이었던 관전(官展)의 역사를 주도했다. 이에 대한 찬반으로 작가들도 나뉘었다. 일본, 프랑스 등의 영향으로 아카데미즘도 유행했다. 한국작가 최초로 파리 유학을 한 이종우 작가의 ‘응시’를 보면 치밀한 묘사로 얼굴의 골상과 주름 등을 그려냈다. 사실적 표현에서 그림 속 인물이 그림 밖을 강렬하게 응시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1930년대 국내 초기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오지호 작가가 바다 풍경을 그린 ‘항구’에는 자유에 대한 갈망이 드러나 있다.
한국적 서정성을 강조한 박수근·이중섭·장욱진 등 대표 근현대 작가의 작품도 볼 수 있다. 처음부터 관전에 반대했거나, 관전에 참여했으나 결국 자신만의 예술 영역을 구축한 이들이다. 박수근 특유의 따뜻함이 돋보이는 ‘복숭아’는 화강암 같은 질감의 독자적 화풍이 돋보인다. 이중섭 작가가 별세 1년 전 그린 ‘꽃과 노란 어린이’는 소박하게 핀 복사꽃을 둘러싼 어린이들처럼 동심에 살고 싶어했던 그의 ‘유토피아’를 느낄 수 있다. 헤어진 두 아들을 그리워하는 마음도 녹아있는 듯하다.
자립
한국전쟁과 분단, 민주화 혁명 등을 거치며 작가들도 국가 주도의 기존 틀에서 나와 탈(脫) 국전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기존 회화를 넘어 색채와 질감 등을 중시하는 추상미술의 시대가 열렸다. 김환기 작가의 ‘월광’은 파리 활동 당시 가장 매력적인 소재였던 산과 달을 그린 작품이다. 작가 특유의 푸른색이 기하학적으로 단순화돼 있다. 밤하늘의 둥근 달빛이 기하학 구성과 만나 시적 감성을 전한다. 이응노 작가는 ‘창조’에서 물감을 뿌리고, 던지며 분노나 불안을 숨기지 않았다. 무한한 자유와 직관적 추상성을 지향한 데서 전쟁 후 유럽 앵포르멜(Informel) 사조도 느껴진다. 실제 앵포르멜은 서예의 추상성에 주목, 그가 독창적 조형언어를 구축하는 시발점이 됐다.
혁신
급격한 경제성장과 함께 한국 미술은 서양의 영향으로 고유성이 떨어진다는 위기의식에 부딪혔다. 동양화를 한국화로 바꾸고, 중국 필법을 한국화적으로 바꾸는 등 ‘가장 한국적인 것’을 찾는 노력이 돋보인 시기다. 이대원 작가는 ‘농원’에서 산과 나뭇가지를 다양한 색채의 점유법으로 그려 본인만의 한국화를 재창조했다. 강렬한 색채로 자연의 생명력과 경쾌함을 느낄 수 있다.
‘물방울 작가’로 유명한 김창열 작가의 ‘회귀’에서는 글자 위 수많은 물방울이 보인다. 천자문을 외워 그린 작품으로 전쟁 당시 고통에 잠긴 전우들을 보며 느낀 불안함과 치유의 의미를 물방울에 담았다. 두려움을 증발시켜 무(無)로 돌아가자는 위로도 읽힌다. 곧고 날카로운 조형성을 가진 한자와 부드러운 질감의 물방울을 대조적으로 제시하면서 물방울을 더욱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국내 수묵추상의 거장 서세옥 작가의 ‘군무도’에서는 인간군상을 고리로 농담과 여백을 실험한 그의 조형적 연출을 볼 수 있다.
■ 지역 연고 작가도 한 자리
뒤집힌 세계지도를 그려 서구주의에서 벗어나 동양의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김차섭 작가의 ‘고통의 화가-pain-ter’부터 알을 깨고 나오는 새의 모습으로 삶과 죽음 등 철학적 고찰을 하는 최홍원 작가의 ‘새’, 도미술협회 초대 회장이었던 이수억 작가가 한국적 소재와 서구적 표현을 곁들여 그린 ‘광릉추경’ 등 춘천 연고작가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개막 행사에는 김차섭 작가의 아내 김명희 작가를 비롯해 이철이·최홍원 작가의 유가족, 원로작가와 미술단체 대표 50여 명이 함께 했다. 매일 오전 11시·오후 2·4시 전시해설이 마련되고, 감상을 독창적인 사고로 재구성해 볼 수 있는 워크숍도 마련됐다. 최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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