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동학- 철학실종시대, 사라진 강원 동학사를 찾아서] 7. 청일전쟁의 이면, 강원 동학군의 지정학적 중요성

김진형 2024. 7. 11.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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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러시아 경계 동학군 북상 저지 혈안 “모두 살육하라”
일본, 러시아 개입 국제전 우려
농민군 함경도 이동 방어 철저
전라지역 서남 방향 포위 유도
‘동학당 토벌대’ 구성 최소 660명
원산→평양 진군 1만명 탄압 가세
고성 왕곡마을 함일순 일가 일화
화천지역 동학혁명재판 내용 등
강원 유적·기록 산재 재조명 필요

1894년 조선 땅은 동학군의 피로 물들었다. 일제의 조선 침탈 야욕이 강해지던 시기 다른 나라의 군대를 끌어들여 자국의 백성을 학살했던 비참한 역사 속에 민중들은 싸우기 위해 일어났다. 하지만 동학군의 희생에만 초점을 맞춰서는 안된다. 동학농민혁명 당시의 국제 정세와 사회 흐름, 민중의 변화 등을 파악해야만 진정한 의미가 드러난다. 일본군 입장에서는 강원 동학군이 함경도로 이동할 경우, 자칫 러시아가 참전하는 국제전으로 확산될 것이라고 우려할 수 밖에 없었다. 이번 시리즈에서는 강원을 포함한 조선 전체를 침탈했던 당시 일본군 움직임에 대한 더욱 철저한 연구가 필요한 이유를 밝힌다. 또 고성 왕곡마을 등 동학 유적지, 아직 연구가 거의 이뤄지지 않은 화천지역 관련 기록 등도 짚는다.

■ 동학군 직접 탄압한 일본군

“평창에 모인 약 3000의 동학당을 공격했는데, 동도가 사격으로 저항했다. 격전 2시간 끝에 점차 퇴각하기 시작하여, 오후 1시 완전히 평창을 점령하였다. 대부분의 동도는 정선방향으로 도주하였다. 동도 사상자 및 포로는 즉사 70명(포로 10명은 후저항하여 총살함). 아병은 사상 없음. 오늘은 이 지역 부근을 수색하고 내일은 정선 및 영월로 향할 예정임.”

1894년 도쿄 아사히신문 12월 16일자(양력 기준)에 실린 제18대대 우마야바라(馬屋原) 대위의 보고 내용이다. 이 시기는 청일전쟁이 점차 평양에서 중국과 연계되는 압록강으로 전장이 확대되는 때였다. 일본 입장에서는 동학군이 함경도 방면으로 북상하면 러시아가 개입할 것이라는 우려를 하는 상황이었다. 일본군이 전라도 지역인 서남 방향으로 동학군을 봉쇄했던 까닭이기도 하다.

강효숙 원광대 교수의 논문 ‘일본군 제19대대 동로군, 제18대대, 원산수비대의 강원도 농민군 탄압’은 일본 방위성 방위연구소 소장 자료를 통해 당시 강원 동학군의 상황을 지정학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들을 탄압한 일본군에 대한 기록도 있다. 이를 보면 일본군이 동학군 토벌을 위해 조선 관군과 협력하면서, 지휘까지 맡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일본 방위성 자료 추가 분석 필요

주한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는 동학군이 강원도와 함경도로 도주할 것을 경계, 서울수비대 18대대 1개 중대를 동로군에 파견했다. 강원 동학군 탄압에 투입된 일본군은 ‘동학당 토벌대’라 칭한 독립후비보병 제19대대의 동로군 220명, 18대대 22명, 원산수비대 1개 중대 220명을 합해 최소 660명에 달한다. 원산에서 평양으로 진군한 1만여 명의 일본군이 15일간 동학군 탄압에 참가한 것을 더하면 그 수는 더욱 늘어난다.

인천병참감 이토 유기는 10월 14일부터 27일까지 네 차례에 걸쳐 히로시마 대본영의 병참총감 가와카미 소로쿠에게 “농민군 토벌을 위한 별도의 일본군 파견”을 강하게 요청하기도 했다. 일본군은 동학군을 대상으로 “모두 살육하라”라는 명령을 내렸다. 동학군이 향후 조선 침탈에 있어 방해가 되는 세력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학군 최대 전투로 꼽히는 우금치(현 충남 공주) 전투에 참여한 일본군이 2700명으로 추산되는 점을 감안하면 강원도 또한 혹독한 피해를 입었음을 알 수 있다.

강효숙 교수는 “강원도 농민군이 함경도를 거쳐 북상할 경우 러시아의 참전 가능성이 매우 높아지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일본군이 강원 동학군을 철저히 감시했고, 더욱 강하게 탄압했을 것으로 짐작된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군의 강원도 동학군 탄압 관련 자료는 일본 방위성에 소장돼 있어 아직 밝혀지지 않은 내용이 더 많다. 단순히 지역 내 활동 양상 뿐만 아니라 국제적 관점으로 당시 일본군의 의도를 파악하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돌아오지 못한 ‘동학의 빛’ 고성 왕곡마을

홍천·평창·정선·강릉 말고도 동학농민혁명 관련 기록은 강원지역 곳곳에서 전해지고 있다. 고성 왕곡마을은 1889년 동학의 2대 교조 최시형이 은신해 있던 곳으로 꼽힌다. 1894년 9월 동학군이 양양·거진 지역까지 봉기했을 때는 동학군이 왕곡마을 함일순의 집에서 10여일 간 머물렀다고 한다. 관의 추격이 거세지자, 동학군은 가지고 있던 돈과 물품을 함일순의 집 오줌통에 숨겨 두고 후일 찾으러 오겠다고 했으나 결국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다. 이 돈을 요긴하게 쓴 함씨 일가는 그 빚을 갚기 위해 1997년 이곳에 동학 사적기념비가 건립될 때 부지를 제공했다.

화천지역의 동학사도 남아있는 연구 과제다. 동학농민혁명 재판 기록에는 “전 낭천(화천의 옛 지명) 군수 유진만이 군수 재임시 동학군이 관아에 쳐들어와 공물과 돈과 병기를 탈취했으나 피신했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이를 통해 화천 역시 동학군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미뤄 파악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와 관련한 조사·연구는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김진형 formation@kado.net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동학군 #일본군 #러시아 #강원도 #동학농민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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