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탕 삼탕은 없다… 값비싼 오크통 딱 한 번 쓰고 버리는 증류소 [김지호의 위스키디아]
위스키디아 뉴스레터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275747
갓 도축한 한우 사골로 뽀얗게 고아낸 육수. 우윳빛 사골국은 색감만으로 맛에 대한 기대감을 한층 고조시킵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사골도 4번 이상 끓이면 맛과 영양이 떨어집니다. 위스키 제작에 쓰이는 오크통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한두 번. 많게는 서너 번 사용하면 오크통이 가진 좋은 성분이 전부 빠져나갑니다. ‘단물’ 빠진 오크통에서 숙성시킨 원액의 맛은 맹탕에 가까울 것입니다.
위스키 맛의 70% 이상은 오크통이 결정합니다. 스카치 규정상 최소 3년, 길게는 30년 이상 원액이 오크통에서 숙성이 되기 때문에 그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스카치 업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오크통이 버번과 셰리입니다. 버번위스키가 담겼던 미국산 오크통과 스페인산 셰리 와인이 담겼던 유러피언 오크통에서 위스키를 숙성시키는 것이죠. 목재의 종류나 오크통에 담겨 있던 내용물에 따라 위스키 맛도 변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오늘날 버번 오크통의 단가는 약 100만원. 갈수록 귀해지는 셰리 오크통은 최소 200만원부터 시작합니다. 오크통은 위스키 생산 비용의 약 20% 이상을 차지합니다. 증류소의 수지타산을 생각하면 오크통의 재활용은 필연적입니다. 경제 개념이 확실한 증류소라면 오크통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사용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재탕 삼탕 문화를 역행하는 증류소가 있습니다. 집요하게 ‘퍼스트 필(First Fill)’만을 강조하며 한번 쓴 오크통은 두 번 다시 안 쓰는 곳입니다. 오크통이 가진 가장 진하고 ‘달콤한 순간’을 위스키에 오롯이 담아내는 것이죠. 스코틀랜드 스페이사이드 지역에 있는 벤로막 증류소 이야기입니다.
1898년 설립된 벤로막 증류소는 각종 불황과 손바뀜으로 오랜 기간 눈에 띄는 행보를 보이지 못했습니다. 1983년 결국 문을 닫은 증류소는 새 주인이 필요했습니다. 그로부터 10년 뒤 1993년. 독립병입 회사의 원조 격인 ‘고든 앤 맥페일’이 벤로막 증류소를 인수합니다. 고든 앤 맥페일은 128년 동안 100개 이상의 증류소와 거래를 튼, 4대째 가족 독립 영업을 유지하고 있는 회사입니다. 독립병입업계의 삼성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막대한 자금력과 체계적인 인프라를 갖추고 있는 곳입니다. 업계 ‘큰손’에 의해 인수된 벤로막 증류소는 5년간의 대대적인 재정비를 마치고 1998년, 찰스 당시 왕세자가 증류소 문을 열면서 다시 본격적인 증류를 시작합니다.
◇효율성을 포기하고 전통을 좇는 증류소
벤로막 증류소는 효율성보다 전통을 중요시합니다. 생산량보다는 품질에 중점을 두고 한 땀 한 땀 수작업으로 위스키를 생산하는 곳이죠. 연간 생산량은 약 38만 리터. 매년 2000만 리터 이상 뽑아내는 글렌피딕이나 글렌리벳 같은 대형 증류소와 비교하면 눈에 띄게 적은 양입니다. 심지어 매번 퍼스트 필을 강조하다 보니 자칫 수지타산이 안 맞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딱히 걱정은 없습니다. 고든 앤 맥페일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벤로막에서 한번 쓰고 남은 오크통은 전부 고든 앤 맥페일이 회수해, 증류액을 넣고 다시 숙성에 사용하게 됩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래인 셈이죠.
이들의 지향점은 1950년~1960년대 ‘전통 스페이사이드’ 위스키 맛을 재현하는 데 있습니다. 1950년대는 세계 대전 등의 여파로 석탄이 부족하던 시기입니다. 증류소들은 석탄 대신 피트를 연료 삼아 위스키를 만들었고 뜻하지 않게 훈제 향이 밴 위스키가 만들어졌습니다. 지금은 과실 향의 부드러운 풍미가 스페이사이드 지역의 특징이지만 당시에는 그 성격이 조금 달랐던 것이죠. 벤로막 제품에 피트의 풍미가 은은하게 깔린 이유입니다.
버튼 하나로 모든 증류 과정이 완성되는 최신식 증류소와는 다르게 벤로막은 모든 게 수동입니다. 위스키 생산의 모든 공정 과정에 사람이 직접 개입하고 있는 것이죠. 심지어 증류소 내 모든 작업 기록도 수기로 작성되고 있습니다. 그나마 사무실에 있는 컴퓨터 한대는 이메일을 주고받을 때 사용하는 정도. 하나부터 열까지 고집스럽게 사람 냄새가 배어 있는 곳입니다.
◇수상 경력이 증명해주는 벤로막의 맛
위스키 구매자들은 늘 합리적인 소비를 추구합니다. 최대한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취합해서 의사결정을 하는 편이죠. 특히 공신력 있는 기관이 주최한 주류 품평회에서의 수상 경력은 신뢰를 얻기 좋은 매개체입니다. 물론 수상 경력이 모두의 입맛을 충족시키지는 못하겠지만 그 수가 많아지면 “혹시 정말 맛있는 게 아닌가?” 한 번쯤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벤로막 15년이 보유한 수상 경력이 그 좋은 예이죠.
2015년 세상에 알려진 벤로막 15년은 2018년, 월드 위스키 매거진으로부터 최고의 스페이사이드 위스키로 뽑힙니다. 이후 매년 여러 매체에서 수상을 이어갔고 2024년 미국 최대 주류 품평회 중 하나인 샌프란시스코 월드 스피릿 컴피티션(San Francisco World Spirit Competition)에서 플레티넘을 수상합니다. 플레티넘은 40여 명의 심사위원으로부터 만장일치로 3년 연속 골드 등급을 수여 받은 제품에만 수여됩니다. 유난히 사랑받는 제품에는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마셔봤습니다.
퍼스트 필 셰리와 버번 오크통에서 숙성된 위스키를 섞은 벤로막 15년은 맛이 꽤 다채롭습니다. 코에 잔이 닿았을 때 스치는 훈제 향을 살짝 걷어내면 달콤한 과일과 초콜릿 풍미가 느껴집니다. 위스키를 한 모금 머금고 입 안에 펴 바르는 순간 셰리 특유의 건포도, 구운 시나몬 사과파이와 다크 초콜릿이 연상됩니다. 이후 오렌지 껍질에서 느껴질 법한 시트러스한 맛과 함께 가벼운 훈제 향이 입 안에서 맴돕니다. 그 어떤 맛도 뾰족뾰족 튀지 않고 균형감 있게 정돈된 느낌입니다. 알코올 도수는 43도.
조금 더 젊고 개성 있는 맛을 느끼고 싶다면 벤로막 10년도 괜찮은 선택지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퍼스트 필 버번 오크통에서 느껴지는 청사과와 레몬 필의 상큼한 맛이 피트와 잘 버무려져 있습니다. 가격은 6만~7만 원대. 이 가격대에서는 비교군이 많지 않을 정도로 가격 측면의 우수성도 있는 제품입니다. 비슷한 가격대에서 짠맛이나 해조류의 느낌이 더 좋다면 탈리스커 10년 정도. 물론 피트의 강도는 벤로막이 조금 더 약한 편입니다.
위스키 입문자에게 피트는 호불호가 갈리는 영역입니다. 대신 한번 빠지면 탈출구가 없는 곳이죠. 다양한 위스키를 즐기다 보면 피트는 꼭 한 번쯤은 통과해야 할 관문 중 하나입니다. 어쩌면 벤로막이 피트 입문을 위한 가이드 역할을 해줄지도 모르겠습니다. 체계적으로 정량화된 규칙 외에 인간의 본능과 경험이 매 순간 개입해 새로운 위스키를 만드는 벤로막 증류소. 인간의 창작 본능과 과학의 접점에서 전통을 유지하며 고품질 소량 생산만을 고집하는 이곳에서, 조금은 다른 스페이사이드 위스키 맛을 경험해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위스키디아 뉴스레터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275747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단독] 안귀령, 이재명 구속 주장 시위대에 “곱게 늙어라”
- 오타니 또 한번 상 휩쓰나… 이번엔 몇관왕?
- 풀장서 ‘차량 입수’ 퍼포먼스까지... 中광저우모터쇼에서 車업체들 생존 경쟁
- 쇼트트랙 기대주 주재희, 남자 1000m 주니어 세계 신기록 작성
- ‘이재명 사법리스크’ 현실화… 리더십에 큰 타격
- 동방신기 출신 시아준수, 여성 BJ에 협박당해 8억원 뜯겨
- “설마 돈 때문에?”… 기초수급 학생들 대신 수학여행비 내준 학부모
- [속보] 이재명 “항소할 것…수긍하기 어려운 결론”
- ‘구제역 공갈·협박’ 증인 출석한 쯔양, “내가 직접 나와서 해결해야”
- 조선닷컴 접속 폭주로 잠시 시스템이 원활하지 않았습니다. 독자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