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 알림의 가치와 앎의 의미 [똑똑! 한국사회]
이승미 |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책임연구원(반도체물리학 박사)
다음 차례는 나였다. 면접관 네 사람이 앉아 있는 책상 뒤로 영화에서 봤던 수백년 된 고건물이 보였다. 오늘은 날씨가 유난히 좋다는 한마디를 시작으로 면접이 본격 시작되었다. “자네 할머니에게 설명한다고 가정하고, 전공용어 없이 손녀가 무슨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는지 쉽게 설명해보게. 3분 주겠네.” 머릿속이 하얘졌다. ‘내 연구에서 전공용어와 방정식을 빼면 과연 무엇이 남을까?’ 이제 20년도 더 지난, 박사후연구원 면접 자리였다. 아마 그때부터였나 보다. 과학기술을 가능한 한 쉽고 재미있게 이야기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한 때가 말이다.
영국은 과학기술 문화 확산에 관한 역사가 깊은 나라다. 200년 가깝게 꾸준히 과학 대중 강연을 개최해온 왕립연구소가 있다. 그곳에서 마이클 패러데이가 시작한 크리스마스 강연은 오늘날에도 영국 공영방송을 통해 전국으로 송출되고 세계인이 녹화본을 시청하는 인기 강연이다. 직접 보여주면서 시민들에게 과학을 생활로 받아들이게 돕는 형식이다. 예를 들어, 바깥에서 번개처럼 전류가 번쩍이며 내리치는데도 ‘패러데이 케이지’ 안에서는 아무 영향 없이 멀쩡히 걷는 모습을 보여준 대중 강연이 대표적이다. 패러데이는 이 실험을 통해 금속망으로 둘러싸인 공간의 안쪽에는 전자기파가 미치지 못함을 시민들에게 단번에 알렸다.
우리의 과학기술 문화 확산은 어떨까? 요즘 청소년은 뭐든 궁금한 점은 유튜브에서 검색한다고들 한다. 과학도 마찬가지인데, 다행스럽게도 온라인 기반으로 활동하는 과학해설자가 적지 않고 연예인처럼 팬층이 형성되기도 한다. 과학기술이 더 이상 어렵고 따분하게만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으로 반가운 일이다. 국가과학기술연구회에서 정부출연연구소 과학자가 직접 연구 결과를 소개할 기회를 마련했는데, 나도 지난주 100만 구독자를 확보한 과학채널에 출연해 단위와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 관해 이야기했다. 밤 10시부터 2시간 동안 채팅창에는 흘러가듯 빠르게 질문과 감상이 쏟아졌다. 한밤중까지도 과학기술에 관심 있는 분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현실이 반가웠다.
과학도시 대전에 특화된 과학기술 문화 확산도 있다. 대한여성과학기술인회의 ‘여성과학기술인 과학탐구교실’은 대전광역시 후원으로 2004년부터 진행한 청소년 대상 프로그램으로, 누적 강연 횟수가 1800여회에 이른다. 과학 인재를 육성하고 과학에 대한 친밀도와 호기심을 높이기 위해 현장의 여성 과학기술인들이 초·중·고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춰 전공 분야와 관련한 강연을 한다. ‘1인1과학자’와 ‘움직이는 실험학습’ 같은 오프라인 강연뿐 아니라 ‘랜선 과학교실’, ‘과학도서 멘토링’ 등 다양한 과정이 있다. 지난달에 나는 과학반 학생들을 위해 하나의 주제에 관해 4인이 4주에 걸쳐 자신의 전공 연구를 각자 강의하는 ‘집중심화강연’에 참여했다. 큰아들, 큰딸과 똑같은 나이인 고등학생들 앞에서 측정과학을 재미있게 이야기하려고 노력했다. 미래의 직장 후배들이라 생각하니 더 흥이 났다.
과학기술은 일상생활과 동떨어진 활동이 아닌, 시대의 문화현상이다. 이웃 연구소에서 개발한 기술이 이듬해면 내 손의 휴대전화에 적용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과학은 끊임없는 호기심이라는 인간의 본성을 충족시키는 인류의 지식 확장 활동이 아니던가. 그러니 과학기술자는 과학기술 최전선의 지식 노동자이자 과학문화의 주역이라 하겠다. 나도 동료들과 함께 과학 대중서를 저술할 때는 힘들었지만, 과학고등학교 교사한테서 “정말 유용한 책이니 수업에 잘 활용하겠다”는 평가를 들었을 때는 그동안의 노고가 씻은 듯 사라진 경험이 있다. 한밤중에도 과학기술자에게 채팅창으로 질문을 보내는 시민들과 유튜브로 과학채널을 구독하는 수많은 시민이 있다. 과학기술 문화 확산은 이 시대 과학기술자의 의무일지도 모른다. 과학기술이 문화가 된 오늘날, 알림의 가치는 결코 앎의 의미에 뒤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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