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 조작’ 50년 만에 벗은 간첩 혐의…“기쁘기보다 허탈하다”

김용희 기자 2024. 7. 10.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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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 두 글자 받으려고 50년 동안 그렇게 애를 썼나 싶습니다. 기쁘기보다는 허탈합니다."

9일 광주고법 앞에 모인 ㄱ(70)씨는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뒤 허망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평생 억울함을 호소했던 ㄱ씨 등은 2022년 9월 또 다른 '거문도 간첩단 사건' 피해자들이 무죄를 받는 것을 보고 재심을 신청, 법원은 지난해 9월 재심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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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거문도 일가족 50년 만에 무죄
재심 재판부 “고문 탓에 허위자백”
9일 광주고등법원 앞에서 1973년 간첩사건 무죄를 받은 피고인들과 시민단체 회원들이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무죄’ 두 글자 받으려고 50년 동안 그렇게 애를 썼나 싶습니다. 기쁘기보다는 허탈합니다.”

9일 광주고법 앞에 모인 ㄱ(70)씨는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뒤 허망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날 광주고법 2형사부(재판장 이의영)는 징역형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ㄱ씨와 ㄱ씨의 친척 ㄴ씨, ㄱ씨 아버지(1914∼1986), 어머니(1917∼1994) 등 일가족 4명에게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전남 여수 거문도에 거주하는 ㄱ씨 가족은 북한 지령을 받고 고정간첩으로 활동한 혐의로 1973년 기소됐다.

당시 경찰과 검찰은 ㄱ씨가 1972년 10월 북한에 있는 삼촌에게 납북됐다가 돌아온 사실을 근거로 간첩 누명을 씌웠다. ㄱ씨가 북한에서 세뇌와 공작훈련을 받은 뒤 부모와 팔촌 관계인 ㄴ씨 등에 공작금을 주고 포섭해 간첩단을 꾸렸다는 수사 결과를 내놨다.

ㄱ씨 등은 수사 초기 사실이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장기간 구금되며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북한 공작원이 맞다”고 허위진술했다. 항소심에서 ㄱ씨는 징역 15년, ㄴ씨와 ㄱ씨 아버지는 징역 5년, ㄱ씨 어머니는 징역 3년6개월을 확정받았다.

재심 판결문엔 ㄱ씨가 허위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1973년 10월5일 여수경찰서 정보과 경찰관들에게 붙잡힌 ㄱ씨는 여관으로 끌려가 모진 학대를 당했다. ㄱ씨는 “여관방에 들어가자마자 경찰들이 옷을 벗기고는 ‘너 같은 빨갱이를 잡아 죽이려 경찰이 됐다’면서 혁대로 미친 듯이 때렸다”며 “다른 방에서 부모님들이 고문당하는 소리가 생생히 들려 부모님도 끌려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고 진술했다. 그는 “3일 뒤 경찰들이 여수경찰서 지하실로 데려가 철제침대에 팔다리를 묶더니 얼굴에 수건을 덮고 큰 주전자로 물을 붓기 시작했다”며 “어느 순간 숨이 끊겨 평안해지는 것을 느꼈는데 가슴을 짓누르는 고통 때문에 정신을 차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인공호흡을 받았다는 걸 깨달았다”고 증언했다.

판결문에는 ㄱ씨가 출소 뒤 평생 어머니를 외면했던 사연도 담겨 있었다. 수사 당시 경찰은 ㄱ씨에게 모친을 성폭행했다는 진술을 강요했다. ㄱ씨는 “얼굴에 피가 튈 정도로 허벅지를 몽둥이로 맞다가 매의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허위 자백했다”며 “그때의 치욕을 잊지 못하고 출소 뒤 어머니를 똑바로 볼 수 없어 집을 나왔다”고 했다. ㄱ씨 누나는 “어머니는 대구교도소 근처에 작은 방을 얻어 살며 동생 출소를 기다렸다”며 “집을 나간 동생을 평생 원망하고 살았는데 재심을 준비하면서 사연을 듣고 기절할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말 한마디 못한 채 동생을 붙잡고 울기만 했다”고 밝혔다.

서울에 거주했던 ㄴ씨 역시 1973년 10월10일 경찰들에게 붙잡혀 여수 여관, 광주 대공분실 등에서 한 달간 폭행, 물고문을 당했다고 증언했다.

평생 억울함을 호소했던 ㄱ씨 등은 2022년 9월 또 다른 ‘거문도 간첩단 사건’ 피해자들이 무죄를 받는 것을 보고 재심을 신청, 법원은 지난해 9월 재심을 받아들였다.

재심 재판부는 “ㄱ씨 등은 구속영장 없이 장기간 불법 구금된 상태에서 고문 등 가혹 행위와 위축된 심리상태로 인해 허위 자백을 하고 자술서를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며 “원심 법정에서도 ㄱ씨의 국선변호인은 의견서 등 서면을 한 번도 제출하지 않았고 무죄 주장이나 고문 등 불법 수사에 대해 아무런 변론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무죄 선고 이유를 밝혔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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