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민특위 와해, 국가폭력 밝힐 특별법 만들어야”

강성만 기자 2024. 7. 10.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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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반민특위·국회프락치사건 기억연대 이영국 이사
전교조 해직교사 출신인 이영국 기억연대 이사가 인터뷰 뒤 사진을 찍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올해 발족 3년을 맞은 ‘반민특위·국회프락치 기억연대’(이하 기억연대)의 이영국(67) 이사는 ‘전교조 해직교사’다. 해직 5년 만인 1994년 복직해 5년 전 정년을 맞았다.

휘문고 음악교사로 임용된 1985년 민요연구회 교사회 결성을 이끌며 교육운동 일선에 뛰어든 그는 전교협(전교조 전신) 문화부장을 거쳐 1989년 5월 전교조 결성 때 초대 문화국장을 맡았다. 전교조 창립 몇 달 뒤 전국 대학가에 돌풍을 일으킨 ‘전교조 조직 복원을 위한 정태춘 순회공연’도 그가 직접 기획했다. 퇴임 뒤에는 ‘전교조 퇴직 교사 모임’인 참교육동지회에 참여해 지난 4월부터 조직위원장을 맡고 있다.

유신 말기인 1979년 서울대 음대에 입학한 그는 “7전8기의 의지”로 ‘학생운동 무풍지대’였던 음대 안에 사회과학 공부모임 ‘예술과 사회 연구회’를 만들었고 3년 뒤에는 서울대 민요연구회를 꾸려 대학가 민요 열풍을 이끌었다.

사십여 년 민주화와 참교육 실현을 위해 헌신한 그가 퇴임 뒤 열정을 불태우는 일이 하나 더 있다. 친일파 척결을 위해 태어났으나 바로 척결 대상인 친일파에 의해 해체의 길을 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반민특위)의 명예회복이다.

이 이사를 지난 4일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지난해 민주화 원로들이 만든 전국비상시국회의 공동조직위원장도 맡고 있다.

이영국 이사 부친 이봉식 전 반민특위 조사관. 이영국 이사 제공

전 반민특위 조사관 이봉식(1899~1982) 선생의 늦둥이 아들인 그는 지난 6월6일 기억연대 회원들과 함께 ‘반민특위 강제해산 75년 기억행사’를 열었다. 강제해산 뒤 첫 행사다. 고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의 자제인 김정륙 기억연대 위원장을 비롯해 13명 회원 대부분이 연로해 비교적 젊은 그와 고 김만철 특위 특경대원 손녀 김홍현씨가 발로 뛰어 행사를 꾸렸다.

1949년 6월6일은 제헌 헌법과 법률에 의거해 전해 10월 국회에 설치된 반민특위 날개가 사실상 꺾인 날이다. 친일경찰 최운하가 반민특위에 체포된 지 불과 이틀 뒤인 그날 경찰은 특위 사무실을 습격해 특별경찰대원 35명을 연행 수감하고 각종 서류와 무기, 통신기구를 탈취했다. 설립 초기만 해도 박흥식, 이광수, 김연수 등 거물 친일파를 잡아들이며 기세를 올린 반민특위는 이 사건 뒤로 급속히 와해되었다. 특위를 주도한 소장파 국회의원들도 1949년 봄부터 남조선노동당 프락치로 몰려 헌병대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고 13명이 유죄 선고를 받았다.

지난달 6일 오후 서울 중구 저동 명동성당 가톨릭회관 1층 강당에서 열린 ‘반민특위 사죄촉구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앞줄 오른쪽 넷째가 김정륙 위원장이다. 고경태 기자

2008년께부터 후손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이 이사는 특위 와해 과정에서 벌어진 국가폭력에 대해 정부가 공식 사과하고 철저한 진상규명도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이승만 지시로 친일경찰이 특위 본부를 습격해 가장 먼저 한 일이 수사 자료 압수였어요. 자료 중 일부는 소각까지 했죠. 당시 일개 순경이 특위 특별감찰부장을 겸하던 권승렬 검찰총장의 권총을 압수했어요. 특위 출범에 앞장선 제헌의원들은 프락치로 몰렸고요. 특별법을 만들어 이 과정의 국가폭력을 철저히 밝혀야 합니다.”

그는 “국회 공식 초청으로 22대 국회 개원식(미정)에 김정륙 위원장과 김웅진 제헌의원 따님 김옥자 선생과 함께 참석할 예정”이라면서 “75년 동안 역사에 묻힌 반민특위가 국가 공식 행사에서 처음 국민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앞으로 기억연대를 국회 등록 사단법인으로 전환해 지금의 후손 중심에서, 반민특위 정신에 공감하는 개인과 단체도 참여시켜 국회 내 반미특위 조형물 설치 등 여러 사업을 펼칠 계획”이라고 했다.

일본 강점기에 도쿄 유학생으로 독립운동을 펼친 그의 부친은 반민특위에서 친일파 박흥식을 체포할 때 현장 책임자였단다. “아버지가 특경대원들을 데리고 박흥식 자택을 수색했는데 찾을 수가 없었답니다. 한참 수색하다 철수할 무렵 한 방의 병풍을 제치니 박흥식이 머리를 숙인 채 엉덩이를 치켜들고 권총 쥔 두 손을 위로 올리고 벌벌 떨고 있었다고 해요. 어릴 때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죠.”

40여년 민주화·참교육 실현 헌신
정년 뒤 반민특위 명예회복 앞장
부친이 이봉식 전 특위 조사관
“친일파 박흥식 직접 체포하셨죠”

3년 전 후손들과 기억연대 발족
강제해산 75년 만에 첫 행사 열어
22대 국회, 개원식에 후손들 첫 초청

이승만 정권과 친일파의 부친에 대한 회유 시도도 상상 이상이었단다. “어머니와 누님들한테 들은 말인데요. 아버지가 조사관 시절 우리 집이 경무대(현 청와대) 바로 앞 효자동 100번지였어요. 아버지가 집에 와 보니 경무대 사람들이 가지고 왔다는 쌀가마니 두 개가 있더래요. 열어 보니 쌀은 없고 돈이 그득 있어 당시 집에 상주하던 특경대원 둘을 시켜 경무대에 돌려주었다고 해요. 한 친일파 거부는 부친이 동아일보 기자와 만나는 점심 자리에 예고도 없이 나와 자신을 친일파 명단에서 빼주면 서울 중심부의 자기 호텔을 주겠다고까지 했답니다.”

위로 누나가 셋인 이 이사는 어린 시절 하늘이 실제 노랗다고 생각했단다. 반민특위 해체 뒤 부친이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굶는 날이 너무 많아서다. “우리 집이 서울 마포구 토정동 빈민촌에서도 가장 가난했어요. 제가 초등 3학년 때 둘째 누님이 변호사 사무실에 취직했는데요. 그 전까지는 굶는 날이 너무 많았어요.”

가족 끼니도 해결 못 한 무능한 가장이었지만 아버지는 늘 당당하고 꼿꼿했단다. 그는 8살 때 아버지가 굴욕외교로 비판받은 한일협정(1965) 협상 당사자 이동원 외무부 장관 집을 찾아 호되게 꾸짖고 단장으로 내리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했다. “두 분은 같은 양성 이씨 문중으로 알고 지내셨어요. 그날 아버지가 저를 데리고 이 장관 집에 가 ‘이동원 나오라’고 호령한 뒤 지팡이로 이 장관 어깨를 내리치셨죠. 지팡이가 이 장관 귀를 스쳐 피가 흐르더군요. 그때 너무 무서워 울었던 기억이 있어요.”

지난 2월19일 복원된 반민특위 본부 터 표지판 앞에서 이영국 이사가 사진을 찍고 있다. 이영국 이사 제공

그는 자신이 3·1운동 파주 대표 9인 중 1명인 조부(이영진)의 서훈 신청을 지금껏 미루고 있는 것도 부친의 유훈 때문이라고 했다. “아버지 생전에 보훈처에서 여섯 차례나 조부의 서훈 신청을 권했어요. 하지만 아버지는 당시 광복회를 극도로 싫어해 응하지 않으셨죠. 박정희가 친일로 돌아선 이갑성(광복회 초대회장) 등을 앞세워 광복회를 만들었고 가짜 독립운동가가 판치는 곳이라고요. 가족들이 굶는 것을 보면서도 끝내 신청하지 않으셨어요.”

그는 음대에 들어가 학생운동에 뛰어든 것도 아버지 영향이 크다고 했다. “고지식해 가족을 굶긴 아버지였지만 저는 왠지 그런 어버지가 밉지 않았어요. 집에 김홍일 장군 같은 독립운동가들도 종종 찾아오시고 또 아버지가 반민특위 조사관으로 훌륭한 일을 하셨다고 생각해서죠.”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교육 운동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묻자 그는 자신이 기획한 1989년 정태춘 순회공연을 꼽았다. “정태춘 선생이 먼저 제안해 2.5톤 트럭 두 대에 각종 공연 장비를 싣고 전국 21개 대학을 돌았어요. 첫 공연이 9월20일 충주 건대 캠퍼스에서 열렸는데요. 무려 4천 명이 운동장을 가득 메웠죠. 충주 역사상 최대 인파라는 말까지 나왔어요. 순회공연이 이어지면서 관객은 더 늘어났고요. 그때 전교조에서 준 공연 예산 700만원이 턱없이 부족해 참교육 티셔츠와 볼펜을 만들어 팔기도 했어요. 공연 중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종이 상자를 돌려 후원금을 모았고요. 공연이 끝나면 상자 수십 개가 걷혔죠. 이 공연은 당시 전교조 탈퇴각서를 쓰고 열패감에 시달리던 전교조 현장 조합원들이 다시 조합 활동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기폭제가 되었어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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